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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그 서점, 지금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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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학교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동네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대입학력고사(지금의 수학능력시험)를 치르기 전까지는 서울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촌놈이었으니 낯설기도 하고 때로는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다. 더욱이 내가 살던 집은 나 말고도 동남아 노동자 여섯 명이 같이 생활하고 있었으니 난생 처음 해보는 서울생활이 이국적이기까지 했다. 당시 이들은 대부분 보문동 일대에 많았던 봉제공장 노동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쉬운 건 군대 가기 전까지 이들과 단 한번도 대화를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후회막급이지만 대학 새내기때 어디 집에 들어갈 시간이라도 있었겠는가! 12년 학교생활을 보상이라도 받아야 하는 듯 허구한날 술에 빠져 동기들 하숙집을 전전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새내기 딱지를 뗄 즘 덜컥 군대소집영장을 받고 말았다. 나머지 삼년은 공부해야지 싶어 입영을 선택했고 친구들과 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요즘 신세대들은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김민우라는 사실을 모를게다. 당시 최고의 아이돌 가수였다)를 목놓아 부르며 머리를 짧게 깍고 강원도 철원에서 이십 육개월을 꼬박 채웠다. 전역하고 돌아온 서울은 처음 본 서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복학하고 학교에 가보니 남자 동기들은 죄다 군대에 가고 없지 여자 동기들은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있었으니 마음 둘 곳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학교생활에도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교수님 수업내용 열심히 받아적고 시험때도 교수님 수업내용을 달달 외워써야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었으니 그게 고등학교 4학년이지 무슨 대학생이냐 싶었다. 겉도는 대학생활, 그래서 자주 찾은 곳이 동네서점이었다. 복학하고 다시 구한 자취방이 있는 집 근처에 '청룡서적'이라는 작은 동네서점이 있었다. 수업이 일찍 끝나거나 주말이면 이 곳에서 책을 뒤져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건전한 방황이었다.

아직도 내 책장에는 '청룡서적' 직인이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책들이 꽤 있다. 심지어 '청룡서적' 전화번호가 선명한 책갈피까지 발견되곤 한다.

주말이면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체육복에 슬리퍼 차림으로 이 서점을 찾았다. 고전을 비롯해서 꽤 많은 책들이 있었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이 책 저 책 훑어보다보면 반나절이 훌쩍 지나곤 했으니 시간 죽이는 데는 이만한 곳이 없었다. 손이 닿지 않은 곳, 의자를 딛고 서도 손이 닿을 듯 말 듯 한 곳에 있는 책은 사장님께서 친절하게 꺼내주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 명 두 명 들어온 사람들이 비좁은 공간을 헤집고 자리를 잡았다. 초등학생도 있었고 점잖아 보이는 중년신사도 있었다. 서서 책장을 넘기기도 하고 쪼그려 앉아 책을 보는 이들도 있었다. 원하는 책만 사서 곧바로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참 동안 책을 읽고는 그냥 책꽂이에 꽂아두고 가 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도 사장님은 늘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이곳이 좋은 또 하나는 내가 원하는 책이 없다고 해서 굳이 종로까지 나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장님께 얘기하면 수일 내에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서점을 나설 때면 꼭 책 한두권 쯤은 구입했다. 빈손으로 나서기 미안하기도 했고 읽지는 못해도 책 모으는 걸 좋아해서. 지금 내 책꽂이를 보니  [향연], [고독한 군중], [해적], [카리마조프의 형제들], [자유에서의 도피], [분노의 포도] 등이 그 때 샀던 책들인 것 같다.

내년이면 또다른 낯선 곳 대전에 내려온지 햇수로 10년이다. 내려와 몇 년은 자주 서울에 올라갔다. 가끔 그 서점을 지나칠 때면 가벼운 미소를 짓곤 했는데 최근 몇 년 동안은 서울을 가보지 못해서 아직도 그 서점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지금 내가 사는 동네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있어서 동네서점이 몇 곳 있다. 하루는 읽고 싶은 책이 있어 근처 동네서점을 찾았는데 온통 참고서뿐 교양서적은 베스트 셀러 몇권만 꽂혀 있는 걸 봤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수학정석]과 [성문영어]를 제외하면 그다지 많은 참고서가 없었는데 요즘은 무슨 참고서가 이리도 많은지.....이 좁디좁은 동네서점에 교양서적이 꽂혀있을 만한 공간은 없어 보였다.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학교가 없는 곳에도 동네서점이 꽤 있었는데... 아쉽다.

문화란 늘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최소의 비용과 수고로 즐길 수 있어야 참된 문화다. 책이야 두말할 나위 없다. 사라져가는 동네서점, 참고서로 도배된 동네서점이 대문만 나서면 들를 수 있는 동네서점, 교양서적으로 가득찬 동네서점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많은 이들이 같이 고민해 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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