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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포토뉴스

지난 2월 28일 경기도 파주 문산읍 문산우체국에서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마스크를 판매를 예고해 주민들이 줄을 서 있다. ⓒ 이희훈
 
"그런데 이 망할 놈의 병은! 그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까지도 마음으로 병을 앓게 한다니까요."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 나오는 호텔 경비원의 외침이다. 너무도 맞는 말이다. 감염 바이러스는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침투한다. 1940년대 오랑시(프랑스령 알제리) 호텔 경비원이 외쳤던 저 말은, 2020년 대한민국에서도 여지없이 통할 듯하다.
 
무엇이 페스트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까지 마음의 병에 시달리도록 하는 걸까. 카뮈는 <페스트>의 주인공 의사 리외의 입을 빌려 감염병으로 봉쇄된 도시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지난 석 달, 그러니까 1월 초 중국 우한에서 바이러스성 폐렴이 집단으로 발병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 코로나19와 맞서고 있는 지금까지의 우리 모습과도 비슷하다.
 
언론의 폐해
 
교통이 끊기니 경제가 끊겼고, 사랑이 끊겼다. <페스트> 속 봉쇄된 도시는 높은 물가에 허덕이면서 보고 싶은 사람과 편지조차 주고받을 수 없는 이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봉쇄라는 외부적 요인보다 각양각색의 내부적 요인이 더 무서웠다.
 
"석간신문 가두 판매원들이 쥐들의 습격이 중단되었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리외가 가서 보니, 수위는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다른 손은 목덜미에 댄 채, 상반신을 침대 밖으로 내놓고 무척 괴로워하며 불그스름한 담즙을 뽑아내듯 오물통에 토하고 있었다."
 
"어떤 신문기자가 지겨워서 하품을 하며 되는 대로 쓴 논설을 읽고 허황된 희망을 품거나 근거 없는 공포를 느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야사에 담긴 예언이 충분치 않으면 기자들에게 그런 것을 주문하여 쓰도록 했는데, 그 점에 관한 한 기자들은 그들의 모델인 몇 세기 전의 사람들만큼 능력을 보여주었다. 예언 중 어떤 것들은 심지어 신문에 연재되기도 했으며, 사람들은 건강하던 시절에 읽던 연애 이야기만큼이나 그것들을 열심히 읽었다."

 
감염병은 재난이다. 재난 시 언론의 중요성은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페스트>의 언론은 현상을 제대로 짚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팩트가 아닌 예언에 집착할 정도로 무능했다. 그 모습만 조금 다를 뿐, 지금 우리도 공적 마스크 제도를 두고 사회주의 운운하는 '대기자'의 논설을 마주하고 있다. 재난 정국에서도 오보나 자극적 보도가 쏟아졌고, 그나마 오보를 낸 언론사에서 사과문을 올린 것에 감사하고 있다. <페스트>에선 이렇게 말한다.
 
"(언론에서 보도되는) 그런 예언들은 마지막에 가면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준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페스트만은 그렇지 않았다."
 
가짜뉴스와 사회적 약자
  
지난 2월 27일 서울 송파구 문정동 로데오거리에서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 송파구청이 방역작업을 하고 있다. ⓒ 이희훈
 
코로나19 정국에서 가짜뉴스와 파렴치범의 소식을 듣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대통령이 왼손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다는 조작 사진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고, 정부가 방역 마스크를 북한에 보냈다는 허위사실이 나돌았다. 마스크 매점매석 등 신체의 안전을 볼모로 이익을 챙기려는 이들도 넘쳐났다. 80년 전을 배경으로 한 <페스트> 속 모습도 그랬다.
 
"200년 전 프랑스 남부에서 페스트가 대유행이었을 때 의사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기름 먹인 옷을 입었다는 사실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상인들이 그 기사를 이용해 유행하지 않는 (레인코트) 재고품들을 팔아치웠고, 시민들은 그 옷의 도움을 받아 면역력이 생기기를 기대했다."
 
"어느 카페에서 '양질의 포도주가 세균을 죽입니다'라고 써 붙이자, 전염병을 예방하는 데 술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이미 상식처럼 받아들이던 대중에게 그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마술사나 가톨릭교회의 성인들이 쓴 예언서가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돌아다녔다. 도시의 인쇄업자들은 예언에 대한 열광적인 관심을 활용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던 책을 대량으로 찍어 유통시켰다. 대중의 흥미가 지칠 줄 모르고 이어지자, 그들은 시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런 유형의 야사를 모두 찾아내 시중에 퍼뜨렸다."

 
<페스트>에서 감염병을 가장 먼저 마주한 이들은 사회적 약자였다. 페스트가 한창일 때 위험에 노출된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도 폐쇄병동 환자들의 죽음과 콜센터 집단감염을 통해 비슷한 모습을 목도했다. 폭주하는 물량으로 이곳저곳을 누비던 택배기사가 목숨을 잃은 채 건물 4층과 5층 사이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서 리외는 자기 환자 중에서 가장 가난한 환자들이 살고 있는 변두리 지역부터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중략) 채소 쓰레기와 더러운 걸레 위에 던져져 있는 쥐가 십여 마리에 이르렀다."
 
"부족한 생활필수품들이 일반 시장에서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팔렸다. 그 결과, 가난한 가정은 무척 괴로운 상황에 놓인 반면, 부유한 가정은 부족한 것이 거의 없었다."
 
"간호사나 무덤 파는 인부들이 페스트로 많이 사망했다. (중략) 그러나 인력이 부족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에 가장 놀라게 됐다. (중략) 페스트 때문에 모든 경제 활동이 중단되었고 실업자가 엄청나게 많이 발생한 것이다. (중략) 변고가 생긴 경우가 아니면 그들은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략) 실업자들이 있는 한 견딜 수 있다고 그(도지사)는 생각하고 있었다."

 
두 부류의 사람들
 
지난 3월 6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일대에서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수방사 소속 병사들이 방역작업을 하고 있다. ⓒ 이희훈
 
우직한 의사 리외와 자진해서 '보건대'를 조직한 타루는 <페스트>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싸우는' 인물로 등장한다. 리외에겐 의사로서의 책임감이, 타루에겐 인간에 대한 사랑이 동력으로 작용했다. 누구나, 언제든, 어디서든, 까닭 없이 죽을 수도 있는 부조리(이는 '철학자' 카뮈의 주요 개념이기도 하다)한 상황에서 두 사람은 시종일관 싸움을 택한다.
 
반면 아랍인 문제를 취재하러 왔던 랑베르는 도시를 탈출하기 위해 애쓴다. 이제 막 부부의 인연을 맺은 아내가 파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리외와 타루를 향해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영웅주의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어요. 내가 관심 있는 건, 사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 죽는 것이에요. (중략) 영웅놀이는 그만두고 모든 사람이 해방되기를 기다리자고요. 나는 그 이상은 하지 않겠어요."
 
사랑을 좇는다는 랑베르지만, 사실 그는 회피를 선택한 것이다. 페스트와 같은 부조리를 마주한 인간이 가장 직관적으로 하는 선택이 바로 회피이다. 도시의 저명한 신부 파늘루는 랑베르보단 세련된 방식으로 회피를 선택한다. 그는 설교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유사 이래 하느님께서 내리신 재앙은 오만한 자들과 눈먼 자들을 하느님 발밑에 꿇어앉혔습니다. (중략) 오늘 여러분에게 페스트가 닥친 것은 반성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의로운 사람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이 떠는 것은 당연합니다. (중략) 그 (하느님의) 불빛은 죽음과 불안과 아우성의 길을 통해 오늘 우리를 본질적인 침묵으로, 모든 생명의 원칙으로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 거대한 위안입니다."
 
'코로나19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2020년 대한민국의 몇몇 설교도 이와 닮아 있다. 일부 종교가 이번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모습도 자연스레 떠오른다.
 
파늘루는 위안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역시 부조리를 회피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랑베르는 그나마 혼자의 선택이었지만, 파늘루는 많은 이에게 회피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랑베르의 회피보다 파늘루의 회피가 훨씬 위험하다. 리외는 파늘루의 설교에 대해 타루와 대화를 나누며 "신이 침묵하고 있는 하늘을 바라볼 일이 아니라, 신을 믿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죽음과 싸우는 것이 어쩌면 신에게도 더 좋을지 모릅니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의 '회심'
 
지난 3월 9일 경북 경산에서 코로나19에 감염된 중증환자가 서울 양천구 감염병 전담병원인 서남병원에 후송되어 음압 바이오백에 실려 이동하고 있다. ⓒ 이희훈
그런데 "영웅주의"를 이야기했던 랑베르도, "하느님의 재앙"을 설파했던 파늘루도 결국 마음을 돌린다. 랑베르는 오랜 노력 끝에 경비대를 매수해 도시를 빠져나가기 직전이었다. 그럼에도 긴 시간 리외와 타루의 싸움을 목도한 그는 "혼자서만 행복한 것은 수치스러울 수 있다"라며 보건대에 합류한다. 일종의 수오지심이 발동한 것이다.
 
파늘루의 상황은 좀 더 극적이다. 판사 오통의 어린 아들이 페스트에 걸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본 그는 "주님, 이 아이를 구해주소서!"라고 외친다. 하지만 그의 기도도 아이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치료에 온 힘을 쏟았던 리외는 평소와 달리 격앙된 목소리로 "적어도 이 아이는 아무 죄가 없었습니다. 잘 알고 계시겠죠!"라며 파늘루에게 따졌다. "악한 사람이 (페스트에) 떠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던 그의 설교 내용을 지적한 것이다.
 
파늘루는 두 번째 설교를 통해 여전히 하나님을 이야기했지만, "여러분" 대신 "우리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후 보건대에 합류해 리외와 타루의 싸움을 지원하다 이름 모를 병으로 죽는다(페스트로 추정). 더불어 항상 꼿꼿한 자세로 "하느님의 뜻은 측량할 길이 없으니 항상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던 오통도 아들의 죽음 후 자원봉사에 합류했다가 목숨을 잃는다.
 
리외, 타루, 랑베르, 파늘루, 오통은 영웅이 아니었다. 초기에 랑베르가 말했던 "영웅주의"가 발동돼 행동에 나선 것도 아니었다. "페스트가 너무 강해 (노력을 기울여도) 아무 소용없을 것"이란 누군가의 자조에, 타루는 "우리가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알게 되겠죠"라고 답한다. 타루의 말처럼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을 다 한 사람들이었다.
 
이들 외에 보건대의 사무 업무를 맡은 시청 비정규직 그랑과 혈청 개발에 매진한 노련한 의사 카스텔도 있었다. 또 보건대에 합류한 수많은 사람들과 도시 곳곳을 지킨 이름 없는 시민들이 있었다. 리외와 타루가 처음부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도, 랑베르·파늘루·오통이 마음을 돌릴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도시의 구성원들을 잇는 보이지 않는 끈 때문이었다. 소수의 영웅이 아닌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페스트가 잠잠해진 이후의 상황을 카뮈는 이렇게 묘사한다.
 
"리외는 무엇을 얻었는가? 페스트를 겪었고 페스트에 대한 추억을 가졌다는 것, 우정을 경험했고 우정에 대한 추억을 가졌다는 것, 애정을 알게 되고 언젠가는 애정에 대한 추억을 갖게 되리라는 것, 그가 얻은 것은 그것뿐이었다. 페스트 그리고 삶과의 싸움에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인식과 기억뿐이었다. 타루가 싸움에서 이긴다고 말한 것은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우리는 이걸 연대라고 표현한다. <페스트>의 사람들처럼, 대한민국의 많은 이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코로나19와 싸우고 있다.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는 공직자, 그리고 곳곳에서 성금과 목소리로 어려운 이들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는 시민들이 그 주인공이다.
 
누구나, 언제든, 어디서든, 까닭 없이 죽을 수도 있는 부조리한 상황에서, 그들은 회피 대신 '각자의 위치에서 할 일을 다 하기'로 마음먹었다. 리외가 페스트를 "끝없는 패배"로 인식하면서도 "그렇다고 투쟁을 멈출 수는 없잖아요"라고 말했듯, 그들 역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다.
 
두 사람 : 타루와 코타르
 
지난 3월 13일 서울 구로구 구로역에서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역사 방역을 하고 있다. ⓒ 이희훈
 
카뮈는 <페스트>에 두 가지 장치를 심어놓았다. 먼저 페스트가 종식돼 도시가 축제 분위기일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던 타루가 페스트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카뮈는 이 책의 마지막을 이렇게 끝낸다. 감염병에 국한해서 봐도, 부조리는 항상 존재한다는 은유적 관점에서 봐도 귀담아들을 만한 이야기다.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수십 년 동안 가구나 내복에 잠복해 있고, 방이나 지하실, 트렁크, 손수건, 낡은 서류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또한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페스트가 쥐들을 다시 깨우고 그 쥐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로 보내 죽게 할 날이 오리라는 사실도 그는 알고 있었다."
 
다른 장치는 코타르라는 인물이다. 범죄를 저지르고 자살을 시도했던 코타르는 페스트 창궐 후 수사기관의 감시가 소홀해진 것에 감사하며 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도시가 봉쇄된 틈을 타 밀거래로 돈을 많이 벌면서 부조리한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앞서 소개한 "페스트가 너무 강해 (노력을 기울여도) 아무 소용없을 것"이란 말도 코타르가 한 것이었다. 페스트의 기세가 주춤한 탓에 불안해 하던 그는, 리외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승리를 장담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라고 말하자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도시 봉쇄를 해제한다는 도청의 공식 성명이 발표된 후, 코타르는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결국 검거된다. 이 도시에서 소수였던 그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되지만, 2020년 대한민국에선 그런 부류가 꽤 눈에 띈다. 코로나19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이들은 지금 이 부조리한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하다.

코로나19에 기생하는 2020년판 코타르는 누구인가.

페스트 (무선)

알베르 카뮈 (지은이), 유호식 (옮긴이), 문학동네(2015)


태그:#코로나19, #카뮈, #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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