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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수목드라마 <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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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수목드라마 <싸인>(오후 10시 방송)은 단순한 메디컬 수사물이 아니다. 시신을 부검해 사인을 밝혀내고 사건현장을 조사해 증거를 찾아내는 이 드라마는 외형적으로는 <CSI>와 닮았으나 단순히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 오히려 이 드라마는 시체부검과 사건해결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것들을 둘러싼 이면, 그 권력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싸인>은 어떻게 보면 정치드라마에 더 가깝다.

<싸인>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권력과 탐욕이다. 강한 권력이 있으면 이 세상에는 무서울 것이 없다. 강서연(황선희 분)이 유명가수 서윤형(건일 분)을 살해하고도 법의 심판을 받기는커녕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유력한 대권후보 강준혁 의원(박영지 분)의 딸이기 때문이다.

강준혁의 수족인 장 변호사(장현성 분)는 서윤형의 매니저와 코디네이터, 동료가수를 매수해 살인사건을 계획하고, 검시관을 매수해 증거를 없앤 뒤, 서윤형의 부검을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 이명한(전광렬 분) 교수를 끌어들여 증거를 조작한다. 그리고 코디네이터에게 돈을 주고 죄를 뒤집어씌운다. 사건의 진실을 캐고 다니는 경찰 최이한(정겨운 분)을 흠씬 두들겨 패 경고를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결국 그 권력 앞에 진실을 밝혀내려던 이들은 힘을 잃고 만다. 윤지훈(박신양 분)은 남부분원으로 좌천당하고, 고다경(김아중 분)은 검시관을 그만둔다. 최이한은 구타를 당하고, 정우진(엄지원 분)은 "칼 잘못 휘두르면 자네 팔이 잘려나갈지도 모른다"는 부장검사의 경고에 결국 사건을 덮는다.

거대 권력 앞에 손쉽게 은폐되는 진실

이처럼 거대한 권력 앞에 진실은 쉽게 은폐되고, 진실을 밝혀내려던 이들은 힘없이 쓰러진다. <싸인>의 장항준 감독과 김은희 작가가 서윤형 살인사건을 드라마의 첫 에피소드로 삼았던 건 이 드라마의 지향점을 말해준다. 지난날 우리 사회의 권력이 바로 이렇게 진실을 은폐했고, 그것을 우리 사회가 묵과해 왔다고 말이다.

강한 권력을 가진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욕을 듣기 좋은 명분으로 포장해 왔다. 자신들이 더 큰 권력을 원하는 것은 결코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함이라고. 그래서 강준혁은 역동적이고 힘찬, 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미군 총기사건의 진실을 은폐해달라고 부탁하고, 이명한은 더 강한 국과수를 만들기 위해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더 큰 권력, 더 강한 권력을 원하는 이들 앞에 국익이나 국과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것이 설사 사람의 목숨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윤지훈과 이명한의 대립은 단순히 권력을 둘러싼 선악구도라기보다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탐욕의 이데올로기와 그로 인해 결여된 원칙과 원리에 대한 이해의 대립이다.

한·미·일 3자회담을 앞두고 주한미군이 사람을 총으로 쏴 죽였다.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는 강준혁으로서는 자칫 이 일로 국내에 반미감정이라도 불면 큰일이 아닐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는 이명한에게 사건을 조작해줄 것을 부탁하고, 이명한은 행정안전부 차관 정도가 아닌 차기 대통령이란 든든한 배경을 얻고 그 배경이 지닌 권력으로 국과수를 발전시키기 위해 기꺼이 동참한다.

누구를 위한 국익인가

윤지훈과 이명한. 둘 중 누가 더 국과수를 제대로 된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을까?
 윤지훈과 이명한. 둘 중 누가 더 국과수를 제대로 된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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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이 말한 국익과 더 나은 국과수는 결코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예컨대 이명한은 부검에 대해 "부검은 산 사람의 사회와 질서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 '산 사람'의 테두리에 결코 사건의 진실을 원하는 망자의 가족과 주변사람들은 해당되지 않는다. 오직 부검결과 조작으로 수혜를 입은 소수만이 그가 말한 산 사람에 포함될 뿐이다. 그래서 윤지훈은 이명한에게 "어떤 산 사람이냐?"고 반문한다.

"부검실에 들어온 이상 다 똑같은 사람입니다. 국적이 뭐건, 인종이 뭐건, 남자건 여자건 돈이 많건 적건, 다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 어떤 누구도 죽어서 마땅한 사람은 없습니다."

극중 윤지훈의 대사는 망자의 시신을 부검함으로써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는 국과수의 법의관이라면 당연히 갖고 있어야 할 의식일 것이다. 그러나 이명한은 그런 윤지훈의 생각을 허울 좋은 이상론으로 치부한다. 그에게 현재는 "백악관 말 한마디에 수만 명의 목숨이 없어지는 세상"이고, 따라서 그는 "죽은 사람이 이 사회에 전혀 쓸모없는 쓰레기라면 국익을 택하겠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법의학자로서 양심을 내버린 채 더 강한 국과수를 만들기 위해 사건의 증거를 조작하고 진실을 은폐했던 이명한의 노력이 정말 더 강한 국과수를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서윤형 살인사건의 책임을 윤지훈에게 떠넘긴 그는 언론플레이를 통해 윤지훈 한 사람을 부정한 법의관으로 매도했지만 결과적으로 신뢰도에 타격을 입은 건 윤지훈만이 아닌 국과수 그 자체였다.

트럭운전사 연쇄살인사건 때는 500억 투자 때문에 행정안전부 차관 앞에서 '멋들어진' 부검을 하기 위해 결정적인 증거를 소홀히 하다 결국 사건을 크게 키워 여론의 뭇매를 맞고 검찰로부터 창피를 당했다. 또한 미군 총기사건의 진실이 밝혀지자 이명한은 자신의 지시를 받고 부검결과를 조작했던 법의관 주인혁(이정현 분)을 파면시키지만 이미 국과수는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른 후였다.

<싸인>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

이처럼 이명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국과수를 개선하고 지금보다 더 강한 국과수를 만들겠다고 천명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행동들은 국과수의 신뢰도를 하락시키고 엉망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 자신은 어쩌면 진실로 자신의 행동이 국과수를 위한 것이었다고 믿을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그것들은 국과수에 악영향을 미쳤다.

오히려 국과수를 국민과 수사기관으로부터 신뢰받고, 더 나은 미래로 인도하는 것은 원리와 원칙에 입각해 끝까지 진실을 밝히려 묵묵히 노력하는 윤지훈과 같은 인물이다.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서 <싸인>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더 나은 미래를 명분으로 권력을 탐하는 권력자와, 개인의 탐욕으로 그것을 자의반 타의반 눈감아준 이 사회는, 과연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태그:#싸인, #장항준, #박신양, #전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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