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28 20:30최종 업데이트 24.03.28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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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인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장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새천년이 시작되고 24년이나 흘렀다. 그렇지만, '구천년' 때나 유행하던 흑백 색깔론을 여전히 맹종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5일, 국민의힘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변호인인 유영하 변호사를 대구 달서갑 후보로 단수 공천했다. 그런데 이날 진보당이 비례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에 합류할 후보자로 장진숙 진보당 공동대표, 전종덕 전 민주노총 사무총장, 손솔 진보당 수석대변인을 선출하자 또다시 색깔론이 일었다.


소수정당인 진보당과 최대 노동단체인 민주노총 출신을 국회에 보내는 것은 비례대표 제도의 취지에 부합한다. 그런데도 '탄핵의 강'을 도로 넘는 유영하 공천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고, 엉뚱한 쪽을 향한 색깔 공세만 제기되고 있다.

언론에서도 '친북·괴담 세력 국회 입성 길 터준 야(野) 위성정당(2월 23일 <서울신문>)', '이재명, 친북세력·조국과 손잡고 중도층 마음 얻겠나'(3월 6일 <세계일보>) 같은 사설을 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색깔론' 조장하는 여권
 

인요한 국민의미래 선거대책위원장이 지난 26일 오전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선거대책위원회 회의에 앞서 참석자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남소연

 
윤석열 정권은 검찰 출신 엘리트라는 자부심이 충만한 정권으로 비쳐진다. 그런 윤석열 정권 역시 엘리트 정권의 이미지와 동떨어지는 구시대 색깔론에 함몰돼 있다.

국민의힘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의 인요한 선거대책위원장도 혁신위원장 때의 이미지에 개의치 않고 색깔론에 가세했다. 보도에 따르면, 26일 대책위 회의 때 그는 "이념과 사상에 대해서는 전쟁을 치러서라도 지켜야 할 부분이 있다"며 이념전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같은 날 국무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내년도 예산안을 함께 논의하자'며 의료계에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는 한편, "반국가세력들이 국가안보를 흔들고 국민 안전을 위협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을 모아야 하겠다"라며 색깔론을 자극했다. 의료계를 향해 쏟아붓던 그간의 에너지를 '반국가세력' 쪽으로 돌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처럼 여겨지는 대목이다.

윤 대통령과 인요한 위원장의 발언이 나오기 전날인 25일 밤에는 국민의힘 지역구 후보들에게 "더 이상 이 나라를 범죄자들과 종북세력에게 내주지 맙시다"라는 현수막을 내걸라는 윤재옥 공동선거대책위원장 명의의 지시가 전달됐다. 선거를 보름 앞둔 시점에서 색깔론을 본격 가동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논란이 되자 국민의힘은 26일 오전 지시를 철회했다. 

천안함 비극을 선거에 이용... 결과는 '패배'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지난 25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 천안함 46용사 묘역을 찾아 참배 후 묘비 주변을 살펴보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7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인 스콧 스나이더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은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이날 주최한 '캐피털 케이블' 행사에서 북한의 대남 압박을 지칭하며 "선거에 이 같은 행위가 미치는 영향을 놓고 북풍이라는 말이 있다"라며 "현시점에 그런 영향은 없을 것으로 본다"고 진단했다.

그는 북한의 대남 행동에 대해 남한 국민들이 잘 알고 있고 지적했다. 북한 정권이 남한 보수 정당을 싫어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북한 변수가 이번 총선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전망이다.

북한발 북풍이 시원치 않을 성싶으면 자체적으로라도 색깔론을 일으키는 게 한국 보수세력의 패턴이다. 윤 대통령과 인 위원장이 같은 날 색깔론을 언급했으니, 국민의힘과 국민의미래가 4월 9일까지 '북한의 도움' 없이 이 이슈를 어떻게 증폭시켜 나갈지 주목할 만하다.

예전에는 북풍 철새나 색깔론 철새의 도래가 선거철마다 장관을 이루었다. 이런 철새들은 21세기 들어서도 계속 찾아오고 있다. 하지만, 예전만큼의 힘이 없다. 지상의 관람객들은 이들을 보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도 국민의힘 정권과 그 위성정당은 아직도 20세기 정치에 매몰돼 있다.

21세기 한반도 정치지형이 그런 철새들의 서식에 유리하지 않다는 점은 천안함 사건 직후의 2010년 6·2 지방선거로도 증명된다. 이명박 정권은 그해 3월 26일 46명의 국군 장병이 백령도 해상에서 희생된 이 비극적인 사건을 지방선거를 위해 활용했다. 사건의 진상 규명에 집중하기보다는 대북 적개심을 고조시켜 북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 사태에 대한 최초의 대국민 담화를 선거 9일 전인 5월 24일 발표했다. 담화문 앞부분에서 "또 북한이었습니다"라고 던진 그는 "우리는 천안함 사태를 통해 다시 한번 뼈아픈 교훈을 얻었습니다"라며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인 집단과 대치하고 있다는 현실을 잊고 있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런 뒤 "우리 국민의 안보의식도 더욱 튼튼해져야 합니다"라고 주문했다. 투표를 앞둔 국민들에게 대북 안보의식의 함양을 촉구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그는 5·24조치로 불리게 될 유명한 발언을 했다. 남북한의 인적·물적 교류를 원칙상 금지하는 조치였다. 선거가 임박한 시점에서 냉전 분위기를 가중시켰던 것이다. 

이 시기에는 유권자들의 이목을 끌 만한 간첩 사건도 있었다. 4월 21일, 주요 언론의 톱기사가 '황장엽 암살조 북 간첩 검거'(<조선일보>), '북 검찰총국 소속 황장엽 암살조 2명 검거(<중앙일보>), '북 황장엽 암살조 탈북자 위장 남파'(<동아일보>)로 채워졌다. 

그런 보도 속에는 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부분들이 있었다. 일례로, 위 <동아일보> 기사는 황장엽 암살 특명을 받은 인민무력부 정찰총국 김명호·동명관 소좌가 4월 20일 서울중앙지검과 국가정보원에 의해 구속됐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이 신문에 따르면, 그해 1월과 2월에 탈북자 신분으로 각각 들어온 김명호와 동명관은 입국 뒤의 합동신문 때 자백을 했다고 한다. 이들의 입국 동기가 거짓말로 판단돼 집중 추궁했더니 '황장엽을 암살하러 왔다'고 자백했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4월 20일 구속됐다는 보도가 다음 날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사건의 진위 여하를 떠나 이를 선거용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 시기에 한나라당은 이명박계인 친이계와 박근혜계인 친박계가 정부 관청의 세종시 이전 문제로 내부 갈등을 빚고 있었다. 친이계는 세종시 이전 계획을 수정하려 하고 친박계는 세종시 이전 계획을 원안대로 추진하려 했다.

이로 인한 대립의 심화는 박근혜가 지방선거 지원에 소극적이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명박 정권은 이런 당내 분규부터 해소하고 선거에 임하기보다는 북풍이나 색깔론에 의지해 지방선거를 편하게 치르려 했던 것이다.

6월 2일의 지방 선거는 한나라당의 패배로 귀결됐다. 이 당은 16개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서 6석을 차지하고(민주당은 7석), 228개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에서 82석을 얻었다(민주당은 92석). 천안함 비극을 선거에 이용하려 했지만, 민심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국민들은 속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2일 경기도 평택 소재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거행된 제9회 서해수호의날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다음날 발행된 <서울신문> 기사 '[선택 6·2] 표심의 반란… 무너진 여(與) 대세론'은 "천안함에 안주했던 여권은 매서운 민심을 재확인했다"며 "전문가들은 천안함으로 조성된 여권 대세론에 거센 반발이 일어난 것이라고 진단했다"고 한 뒤 전문가들의 말을 이렇게 소개했다.

"여권의 북풍 의도에 대한 역반응이 일어났다."
"천안함 북풍이 역풍을 맞은 것."


이명박의 담화문이 발표되고 이틀이 지난 5월 26일, 5개 야당을 포함한 91개 사회단체가 이른바 '반북풍 연대'를 가동시켰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비상시국회의'를 결성한 이들은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북풍 선거에 맞설 의지를 표명했다.

이런 움직임이 북풍 선거를 약화시킨 측면도 있지만, 이 바람을 잠재운 것은 무엇보다 대중의 정치의식이었다. 북풍을 막아주는 방풍막이 대중의 의식 속에 내재된 결과였다. 스콧 스나이더의 말처럼 당시의 우리 국민들도 다 알고 있었다. 이런 국민들을 바보로 생각하고 북풍을 일으킨 쪽이 바보였던 셈이다.

지방선거 패배 1년 반 뒤인 2012년 2월 7일,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는 새로운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의결(2.2)한 상태에서 붉은 색 로고와 심볼을 새로 채택했다. 좌파의 색깔로 불리던 붉은 색을 사용하겠다는 이 결정은 색깔론이 더는 통하지 않는 현실을 이 시기 보수세력도 알고 있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점은 앞서 '종북 현수막'을 게시하라는 당의 지시에 대한 국민의힘 지역구 후보자들의 반응에서도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무당층의 관심은 먹고 사는 문제 해결에 달렸다", "종북이념 타령이 선거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라는 일선 후보자들의 반발이 컸다고 한다.

세상을 흑과 백으로 양분하는 색깔론은 한국 선거에서는 이미 통하지 않는다. 천안함 사건 직후의 지방선거는 이런 변화를 반영하는 핵심 자료다. 오늘날의 선거는 흑백으로 나뉘는 선거가 아니라 다채로운 색상으로 빛나는 선거여야 한다. 흑백 색깔론에 불을 지피는 윤석열 정권의 모습은 이들의 정치의식이 아직도 흑백 TV 시대에 묶여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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