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28 19:05최종 업데이트 24.03.28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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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 '오마이뉴스 기자 박정훈'과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 박정훈',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연대를 모색해 나갑니다. [편집자말]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법무부는 최저임금·밀양송전탑 등 제가 운동에 참여했던 다른 사건과 엮어서 저를 공안사범으로 분류해서 수감시켰습니다. 위신은 조금 떨어졌지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 대단한 시국사범이 아니라고 수차례 얘기했습니다. 통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가석방이 없는 파란색 밧줄에 묶여 호송차에 타야 했습니다. 2014년 4월 15일이었습니다.

긴 첫날 밤이 지나고, 세월호 침몰 소식을 TV로 보았습니다. TV 속 뉴스가 너무 비현실적이라 교정 당국에서 편집한 건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방송 화면과 신문의 활자로는 가늠할 수 없었던 그날의 참상은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 교도관들이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모포를 덮고 흐느꼈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나름의 정답을 찾아 감옥에 들어갔습니다만, 창살 밖에서 벌어지는 국가폭력을 가만히 지켜만 봐야 했던 것은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언론사 기자로 활동하시는 박정훈 기자님도 비슷한 경험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사건의 관찰자이자 전달자로서 지켜야 할 직업윤리들이 때로는 창살처럼 느껴지지는 않으시는지 궁금합니다. 게다가 언론사 기자들과 사회운동가들이 다루는 괴롭고 힘든 사건들은 반복됩니다. 전쟁으로는 평화를 지킬 수 없다며 병역거부를 했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민간인들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군대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싶었지만, 채상병의 죽음과 박정훈 대령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평화가 무엇이냐?'라는 노래를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노래에서는 노동자, 장애인, 농민, 많은 생명들이 차별받고 배제되지 않는 세상을 평화라고 부릅니다. 아름다운 노랫말 같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병역거부자가 병역거부자의 정치를 응원할 수 없었던 이유
 

박정훈씨가 2013년 10월 8일 서울 대한문앞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한 모습. ⓒ 권우성

 
수많은 실패 속에서 나의 신념을 전시하고 설명하는 것보다 주변의 동료들과 시민들의 공감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노동운동을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민주당 위성정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되려고 했던 임태훈씨의 공천탈락에 같은 병역거부자로서 공분할 수 없었습니다.

평화운동의 현장에는 늘 사람과 돈이 부족한데 능력 있는 사람은 국회로 빠져나갑니다. 평화운동뿐만 아니라 시민운동과 노동운동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운동이 위기라고 하는데, 운동현장을 등지고 국회의원을 꿈꿉니다. 심지어 진보운동의 힘이 아닌 거대 정당의 힘을 빌려 권력을 가지려고 합니다.

더불어민주연합은 시민사회, 진보당, 새진보연합의 비례연합정당이라고 하지만 비례대표의 최종결정권은 민주당에 있습니다. 더군다나 민주당은 어떠한 눈치도 보지 않습니다. 민주당에 의해 모욕적으로 평가당하고 잘려 나가는 진보적 활동가들을 보면서 제가 살아왔던 지난 세월들이 잘려 나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시민사회활동가들과 노동운동가들이 정치적 야망과 꿈을 가지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물 없는 정치도 공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운동은 사라지고 인물만 남는 정치운동은 사유화되고, 인물은 없고 운동만 있는 정치운동은 쓸쓸합니다.

진보정당도 국민의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가 지난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2대 국회에서 야당과 검찰의 디지털수사망(디넷·D-NET) 국정조사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 남소연

 
시민사회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의 위기 속에서 조국혁신당까지 인기를 얻으니 '희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 힘든 나날입니다. 문화적, 사회적 자본을 세습하는 새로운 계급격차 문제를 상징하는 조국이 진보를 대표하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인정합니다. 저와 같은 생각은 전체 국민의 지지와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국민의 지지와 선택은커녕 진보적 운동을 하면서 정치인을 꿈꾸던 이들의 선택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고민과 대안 없이 조국혁신당과 위성정당 비판만 해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게다가 진보 진영의 상징이었던 많은 유명 인사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무책임한 정치 행보를 하고 있습니다. 이준석과 각을 새웠던 류호정 전 의원은 갑자기 이준석과 손을 잡고 개혁신당에서 지역구 출마를 선언하더니, 결국 후보 등록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는 제3지대 정치는 실패했다고 선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실패를, 모두의 실패라고 말합니다. 정치인뿐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노동운동이 실패한 것을 두고 전체노동운동의 실패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봐왔습니다. 모두의 실패라고 말할 수 있는 건 함께 결정하고 행동했을 때뿐입니다.

이준석은 그래도 지역구 출마라도 하는데, 진보적 인사들은 민주당의 선택을 받아 비례대표로 의원직을 달려고 합니다. 국민들의 눈에 진보는 권력과 좋은 자리를 쫓아 움직이는 사람들로 보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민주당에서 정치인을 꿈꾸며 바닥부터 열심히 활동했던 당원들의 눈에도 갑자기 나타난 진보적 인사들이 좋게 보이지는 않을 겁니다.
 

녹색정의당 김준우 상임선대위원장이 지난 26일 국회에서 열린 선거대책위원회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래서 저는 이번 총선을 독자적인 힘으로 완주하려는 노동당과 녹색정의당을 응원합니다. 정치적 결사체라면, 국민들의 준엄한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 비록 4월 10일 선거 이후 우리가 마주해야 할 현실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독자적 진보정당의 간판으로 국민의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

진보정당 운동의 폐허위에서도 우리의 삶은 계속되고 저항도 계속될 것입니다. 내가 커다란 변화를 만들어내겠다는 생각을 버린다면 희망은 있습니다. 나의 실패가 모두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동료에게는 아직 기회가 남아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후위기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녹색정의당 후보로 나선 기후전문가 조천호 박사의 정치 도전은 감사하고 소중한 일입니다. 건설 현장에서 형틀목수반장으로 활동했던 노동당 비례대표 후보 1번 남한나의 도전도, 비례대표 후보 2번 유진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의 도전도 응원합니다. 이들의 도전은 진보정당 운동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밀알이 될 것입니다.

그래도 노동운동이 희망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본부 조합원과 너머서울, 1만원교통패스연대 회원들이 2023년 3월 20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전력 서울본부 앞에서 공공요금 인상 철회와 사회보험 강화 등을 요구하며 용산 대통령실로 거리행진을 진행하고 있다. ⓒ 유성호

 
얼마 전 노조에서 노동안전보건위원회라는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노동자의 산업안전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노동자들의 회의입니다. 대한항공, 인천공항, 마사회, 지하철, 철도, 가스공사, 발전 산업 등 다종다양한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모였습니다. 청소노동자로 일하신 분은 어느새 '근골격계 질환' 산재 전문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마사회 노동자는 사측과의 노동안전문제를 논의하면서 노조에서 배운 어려운 용어를 꺼냈더니 사측이 깜짝 놀라며 진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줬다고 합니다. 다들 현장에서 아파보고 다쳐본 후 산재전문가가 되어 동료 노동자의 안전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금배지 대신 노조조끼를 입은 노동자들의 정치인입니다.

정치를 여의도 국회와 용산 대통령실로만 한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 곳곳이 국회의사당입니다. 자기 삶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곳, 민원을 듣고 자원을 배분하고 서로 대립하고 타협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모든 곳에서 정치투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국회의 마이크와 길거리의 마이크 소리의 차이가 작아질 때, 국회 상임위 회의와 노동조합 회의 결과의 차이가 작아질 때 민주주의가 꽃피고 정치에 대한 혐오도 사라질 거라 믿습니다. 이 일을 바로 언론이 하는 게 아닐까요? 배제된 목소리의 볼륨을 높여 공론장으로 끌고 오는 일, 언론노동자 박정훈 기자님은 요즘 어떤 목소리를 듣고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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