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06 13:43최종 업데이트 24.03.13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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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 '염경철의 심야토론' 방송 갈무리(2018.7.28.) ⓒ KBS 갈무리

 
세대공감에 이어, 총선을 1달여 앞두고 몇 번에 걸쳐 정치 얘기를 해 보려고 한다. 한국 정치의 과제를 물으면 수많은 답변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첫째가 '정치개혁'이라고 확신한다. 정치개혁의 취지를 가장 설득력 있게 말한 사람은 고 노회찬 의원이다. 그는 2004년 TV 토론회에서 '시커메진 정치 불판을 이제는 갈아야 한다'고 했다. 그것을 나는 이렇게 더 설명하고 싶다.

"1987년에 처음 샀을 때만 해도 상당히 좋은 불판(대통령 직선제, 소선거구제)이었다. 그때는 고기(후보)만 좋으면 됐다. 그러나 30년 넘게 쓰다 보니 이제는 꽃등심 한우를 구워도 금세 타고, 다 들러붙는다. 원래부터 불판이 나쁜 게 아니라, 불판 갈 때가 지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 고기(후보)가 더 좋다, 저 마트(정당)가 더 싸다'며 고기와 마트 바꿀 타령만 한다. 물론 고기도 좋아야 한다. 곰팡이 하얗게 핀 3년 된 고기를 올리면 안 된다. 그런데 지금 이 불판은 방금 출고된 꽃등심 한우도 탄다는 게 문제다. 그러니 불판을 바꿔야 한다.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탄 고기를 먹고, 병은 더 깊어질 것이다."(<지금, 한국에서 하나님 나라를 배우다>, 구교형, 대장간, 2024년, 191쪽)


그렇다면 정치개혁을 늦출 수 없을 만큼 한국 정치를 병들게 한 근본적인 문제는 도대체 무엇인가? 놀랍게도 한국 정치 문제의 본질을 정치인들 자신이 명확하게 정의했다. 2022년 2월 27일 민주당은 의원총회에서 172명 의원 전원 이름으로 '국민통합 정치개혁' 결의문을 채택했다. '적대적 공생, 거대양당 기득권 정치, 진영정치, 소모적 대결 정치, 승자독식 정치, 내로남불 정치.'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 정치인들은 그동안 언론과 여론에서 한국 정치의 고질병으로 지적한 증상들을 부인하지 않고 사실임을 인정하고,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앞장서 고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대선 패배 후 민주당은 다시 미적거렸고, 승리한 국민의 힘이나 윤석열 대통령도 정치개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총선을 한 달여 앞둔 지금 선거법마저 퇴행하여 위성정당은 어김없이 재등장하고, 늘려도 모자랄 비례대표 의석을 한 석 더 줄여 46석에 맞췄다. 역시 정치 기득권에 기댄 거대양당의 찰떡궁합이다.

국가와 사회, 국민의 뜻에 합당한 정당과 후보자를 잘 뽑으면 될 일이지, 정치개혁에 왜 그토록 목소리를 높이느냐 의아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지금 한국 정치는 어떤 정당, 누가 집권하고 다수당이 되어도 한국 사회 중요 현안과 과제를 무엇 하나 제대로 풀어내거나, 진전시킬 수 없는 구조적 고질병에 걸려 있다. 왜 그런가? 하나씩 살펴보자.

제왕적 대통령제가 한국 정치에 미치는 영향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주형환 부위원장·최슬기 상임위원 위촉장 및 박상욱 과학기술수석비서관 임명장 수여식에 참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인들은 세계의 다양한 정치형태 가운데 오직 대통령제만 한국에 맞는다고 믿는 심각한 편집증에 빠져 있다. 물론 70여 년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4.19혁명 뒤 민주당 집권 2년 정도만 빼면 줄곧 대통령제를 고수해 익숙한 탓도 있고, 격동기가 많았던 현대사에 안정적 지도력을 기대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본래 대통령제는 미국에서 처음 시작되어, 행정부 수반에 국가원수 자격까지 부여하며, 임기를 가진 군주와 같은 거의 절대권을 주는 통합의 리더십이다. 그러나 한국 대통령들은 국가와 국민통합은커녕, 자기 당 안에서조차 대표성 논란을 일으키며 자질 시비에 휘말려왔다.

그런데도 일단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 리스크로 늘 골치가 아파도 여당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1인 권력을 휘두르며 정국을 주도할 수 있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만 해도 집권 초부터 2년 가깝도록 30%대의 지지율을 기록하면서도 가족의 비리 의혹과 관련된 것을 포함해 국회를 통과한 법안에 거듭 거부권을 행사하고, 정국을 주도하였다(제왕적 대통령제).

정치적 쟁점이 될 만한 비리와 의혹이 똑같이 발생해도 대통령에 대해선 제대로 된 수사도 하지 않으나, 야당 정치인 관련 건은 오랜 기간 사돈의 팔촌까지 탈탈 털면서 탄압을 일삼고 있다. 또한 배우자, 점술가, 유튜버 등에 의존하는 정치행태가 되풀이된다는 의혹에도 대통령 권력만은 여전히 제왕이다.

이기면 다 얻고, 지면 다 잃는다. 그러니 정치는 전쟁이 되고, 집권과 승리만이 목표가 된다. 그래서 선거에 져도 패배를 인정하기보다는 불복하고, 임기 중 퇴진 가능성을 늘 저울질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좋은 대통령'이 집권해도 '좋은 정치'는 불가능하다. 왜 그런가? 서로 전쟁이므로 여야 사이에 정치적 조정이나 협력은 거의 기대하기 힘들고, 혹시 중요한 정책과제를 실시했다 해도 정권만 바뀌면 전면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정부에서 어렵사리 만들어 낸 재생에너지 정책이나 남북 평화정책이 윤석열 정부 출범 2년도 지나기 전 어떻게 뒤집혀 버렸는지 너무 잘 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 정권을 넘어서는 대한민국의 중장기적인 정책이나 국정과제를 만들어가기가 원천 불가능하다.

그래서 책임정치라는 면에서는 여당도, 야당도 아무것도 하기 어려운 진흙밭에 빠지게 된다. 더구나 정치가 아닌 전쟁 중이므로 상대당과 협상과 협력은 있을 수 없고, 그런 움직임만 보여도 이적, 내통 혐의를 뒤집어쓴다. 더 심각한 것은 선거 때만이 아니라, 1년 내내 전쟁 중이라는 점이다. 국회의 정책대결은 뒷전이고, 다음 선거의 승리를 위한 전략과 이해타산이 중심이 된다(대결정치, 전쟁정치).

전쟁 중이므로 다른 당이 하는 일은 무조건 잘못이고, 혹시 자기 당에서 같은 일을 범한 일이 있다 해도, 무조건 부인하거나 변명하기 일쑤다. 지긋지긋한 내로남불정치다. 그리고 간혹 이러한 정치행태를 조금이라도 벗어나자며 자성을 촉구하며, 반성의 기미라도 보이면 금세 내부총질 논란에 휩싸인다. 무엇이 문제인가?

내각제로의 전환 고민, 이제 시작해야 한다
 

1989년 당시 민주당 김영삼 총재(오른쪽),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운데), 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여권의 중간평가 조기강행 대책을 논의하기에 앞서 악수하는 모습. ⓒ 연합뉴스


대통령제 자체가 좋거나 나쁜 게 아니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만든 대통령 직선제의 유효기간이 끝난 것뿐이다. 1987년 이후 20여 년 동안 거물급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집단적 책임정치를 이끌어오던 시대가 지나, 이제 전문성, 중량감, 통합성 등 정치역량이 크게 떨어지는 정치인들이 대권에 도전하고 있다. 그들의 역량과 중량에 전혀 맞지 않는 너무 막강하고, 과도한 권력이 주어지면서, 똑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제는 삼김 시대부터 고민해 오던 내각제를 깊이 고민할 때가 되었다. 내각제를 말하면 국민통합과 사회안정이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 대통령제가 작동하는 현실만큼 국민통합과 사회안정에 취약한 정치를 본 적이 있는가? 또, 내각제는 잦은 선거와 연립 구성으로 인해 국정의 연속성이 떨어진다는데, 그것 역시 한국 대통령제에서 가장 잘 보이는 현상이 아닌가?

반대로 내각제의 나라 독일은 정권이 바뀌어도 전임 정부의 좋은 정책은 그대로 이어가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사민당(진보)의 통독 정책, 재생에너지 정책을 기민당과 기민련(보수)이 이어받고, 완성한다. 우리는 묻지마 대통령제 편집증으로 제대로 고민도 해보기 전, 내각제의 이름도 꺼내지 못한다.

그러나 당장 내각제가 아니라 대통령 중심제 아래서도 비슷한 우당끼리의 정당 연합, 정책 연합은 얼마든지 시도할 수 있다. 이는 안정적인 책임정치를 시도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도 자당 승리만을 위해 꼼수로 만든 연합비례정당을 넘어 선거 이후에도 뜻을 모을 수 있는 정당끼리 연합정치, 책임정치를 해 나갈 수 있는 다양한 시도가 시작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양당의 열성 지지자들은 현실성 없는 양비론이라고 비난을 하겠지만, 특정 정당이 아닌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정치개혁을 더는 미룰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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