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03 10:24최종 업데이트 24.03.03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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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편집자말]
- 2편 <'내가 귀한 우리 아들 죽였다' 아내마저 떠나버리고>(https://omn.kr/27l52)에서 이어집니다. 

최우혁의 큰 형 최종순은 1957년생, 내일모레면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다. 그는 지금 차가운 겨울 거리에 서 있다. 매주 서울 충무로에 있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앞에서 강제징집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동지들과 시위를 벌인다. 동생 최우혁의 죽음에 보안사, 지금의 '군사안보지원사령부'가 져야 할 책임을 분명하게 밝혀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거의 열 살 차이가 나는 막내를 잃은 지 40여 년 가까이 되지만 그의 가슴에 우혁이는 여전히 살아있다. 동생이 사고를 당한 날 아침, 그가 광화문에 있는 회사에서 막 업무를 시작할 때였다. "우혁이가 병원에 입원했는데 군에서 형들도 있어야 한다니 빨리 와라"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그는 동두천으로 내달렸다. 형들까지 오라고 했으면 상태가 심각할 것 같아 가는 내내 마음이 타들어갔다. 뛰어 들어간 창고 한 편에 동생은 싸늘하게 누워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2주 전 면회에서 봤던 귀여운 동생, 엄마·아빠에게 다정다감했던 녀석의 미소를 볼 수 없게 되었다니.
 
최종순은 슬픔에 겨워할 새가 없었다. 7327부대장과 헌병대장은 아버지에게 부검을 압박했고, 우혁이의 시신을 내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어린 동생을 두 번 죽일 수 없기에 부검을 반대했다. 그들 손에서 진실이 밝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 손에 동생을 묻게 할 수 없기에 이틀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동생 인휴하고 의정부와 동두천 일대 공원묘지를 뒤지고 다녔다.
 

1987년 9월 서울대에서 열린 최우혁 학생장 최우혁이 운경공원묘지에 묻힌 후 별도로 서울대에서 학생장이 열렸다.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아버지 최봉규 ⓒ 최우혁기념사업회제공

 
결국 군의 압박을 못 이겨 동생을 운경묘지에 묻었다. 군인들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받으며 하관을 하고 동생의 관에 흙을 부었다. 그는 눈물을 훔치며 하늘을 향해 종주먹을 날렸다. 무심히 지나가는 구름 떼, 무덤 위를 맴도는 노고지리에 욕지기를 내뱉었다. 무너지는 어머니를 일으키고 흐느끼는 아버지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운경묘지를 떠나올 때 시간이 지나면 세월이 흐르면 동생이 남긴 아픔은 무뎌질 줄 알았다.
 
아니었다. 우혁이의 죽음은 뾰족검이 되어 다시 가족을 파고들었다. 어머니가 사라진 날, 집안은 뒤집혔다. 시신은 그날 마포경찰서에서 바로 인양했으나 신원 확인이 늦어져 2주 만에 연락을 받았다. 그사이 최종순은 아내와 함께 유인물을 만들어 버스 정거장마다 지하철역마다 부치고 다녔다. 회사에 출근하면 대표의 배려를 받아 회사 차량을 빌려 서울 외곽의 시흥, 거여동, 김포 어디든 달려가고 서울 시내 모든 영안실과 응급실을 뒤졌다. 동생의 무덤 앞을 떠나오며 함께 묻고 싶었던 아픔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더 크게 돌아왔다.

아버지의 싸움 이어받은 아들  
     

그는 아버지 최봉규에 이어 40여년째 동생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고 있다. ⓒ 민병래

 

이제 그는 아버지 최봉규가 2016년 숨진 후 남긴 미완의 싸움을 이어받았다.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기는 1기가 내린 '진실규명 불가능'을 폐기하고 한 걸음 나아간 조사 결과를 내왔다.
 
2002년 10월 의문사진사규명위원회 1기는 2년 기한의 활동을 종료하며 "보안사가 학생운동경력이 있는 최우혁을 관찰 대상자로 정하여 관찰 또는 관리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라면서도 "최우혁에 대한 구체적인 관찰의 방법 및 정도에 대해서는 확인이 어렵다"라고 했다. 그 이유는 "당시 보안부대장 등 관계자들이 최우혁이 관찰대상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보안사의 후신인 현 기무사는 당시 보안부대에서 생산한 정보사범색인·동향보고서·사건보고서 등 자료를 제공하지 않았고 당시 보안사 관계자들이 최우혁에 대한 관찰지시와 보고 여부도 진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참고인으로 나온 220보안대원은 운동권 출신 병사를 '산비둘기'로 부르며 '산비둘기의 동향·관리지침·통보'같은 문서를 만들었다고 인정했지만 최우혁의 관리에 대해선 "기억나지 않는다, 내 담당이 아니었다"라며 진술을 거부했다. 강제수사권이 없는 의문사진상규명위는 결국 조사를 멈추고 '진실규명 불능'이라고 보고서를 냈다.
 
최봉규와 최종순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 연장을 요구했다. 재조사를 부르짖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동지들과 다시 팻말을 들었고 국회 앞으로 청와대로 행진에 나섰다. 이런 노력 덕분에 의문사진사규명위원회 2기가 출발하였고 최우혁의 죽음은 재조사에 올랐다.
 
마침내 2기 진상규명위는 '진상규명 불가능'이라는 1기 조사위의 결론을 폐기했다. "최우혁을 담당했던 220보안부대가 우혁이가 사망하던 1987년에도 녹화사업과 유사한 공작을 벌였고 (최우혁이) 60여단 파견보안반에 자주 불려갔으며, 최우혁에 관한 보안사의 카드가 존재한 것으로 미루어 군 생활에서 심리적 압박감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며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한 사망이고 민주화 운동 관련자라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보안사의 누가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 밝히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위원이, 경복궁 민속박물관 맞은 편에 있던 기무사를 방문했을 때, 겨우 쪽문으로 출입이 허용되었다. 담당 장교는 권총을 찬 채로 조사위원들을 맞으며 "윤석양 이병 사건 때 모두 없앴다. 우리 모가지가 날아가게 생겼는데 기록을 남겨뒀겠냐"며 "제출할 자료가 없다"고 맞섰다.

윤석양 이병의 폭로 이후 보안사는 겉으로는 대국민 사과를 하고 민간인 사찰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내부 교육에서는 "윤석양 이병 때문에 보안사 힘이 엄청 약해졌다, 그는 배신자다"라며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 기무사가 강제조사의 권한이 없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어찌 대했을지는 자명하다.
 
결국 의문사위는 반쪽의 진실밖에 밝히지 못했다. 최종순은 바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기가 해결하지 못한 바로 이점을 2020년 12월 10일 재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혀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혁이 죽음에 "보안사의 누가 어떻게 지시를 내리고 실행했는지 밝히고 그 책임을 물어달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최종순은 지금 생계를 위해 일터에 다니면서도 일주일에 며칠씩 시간을 낸다. 매주 월요일은 진실·화해위원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한 달에 한 번 녹화선도공작 의문사대책위 대표로서 진실·화해위원회의 각성을 촉구하는 집회를 연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한 지 벌써 2년이 넘었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는 상태기 때문이다.

또 경찰청·방첩사령부·국정원을 돌아가며 "의문사와 관련한 보안문서를 공개하라"고 시위를 벌인다. 그는 이 싸움은 끝이 없고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싸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최종순은 바위를 깨트리지는 못해도 흔적만은 남기겠다는 각오로 오늘도 겨울 거리에 서 있다.
 
세균학자 프랭크 올슨의 죽음
 
1953년 11월 28일 새벽 2시 30분, 미국 육군의 생물학전 연구원 프랭크 올슨이 뉴욕의 스태틀러호텔 '1018A'호실에서 1층으로 추락해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는 CIA와 긴밀하게 협력하며 연구 작업을 했는데 CIA는 올슨의 유족에게 "떨어졌거나 뛰어내린 자살이다"라고 경위를 설명했다.
 
이 사건은 에롤 모리스(Errol Morris) 감독에 의해 '어느 세균학자의 죽음'이라는 6부작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다. 이 작품에는 아들 에릭 올슨을 비롯해 탐사보도 전문기자 시모아 허시 등 많은 사람의 증언이 나온다. 또 사진, 기록영상, 재연을 통해 사건을 복원하고, 진실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아들 에릭 올슨은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사라진 사건에 갇혀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특히 "떨어졌거나 뛰어내렸다"는 의미를 해독하기 위해 많은 날을 고민한다.
 
사건이 발생한 지, 20여 년이 지난 1975년 록펠러위원회는 CIA의 추악한 활동을 공개하는 놀라운 보고서를 발표한다. 여기에 따르면 CIA가 'MK-울트라' 프로젝트,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LSD라는 마약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실험했고 프랭크 올슨도 그 대상 중의 하나였다.
 
에릭 올슨과 유가족은 1975년 7월 21일 기자회견을 열어 "CIA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모든 정보를 공개할 것, 또 자신의 행위가 불법임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보장할 것, 아울러 경제적인 보상을 할 것" 등을 요구했다.
 
에릭 올슨의 기자회견 후 포드 대통령과 CIA 콜비 국장은 이들 가족을 백악관으로 초청, 사과하고 보상을 약속한다. 가족은 대통령의 성의를 수용하고 75만 달러의 보상금을 받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짓는다. 

그런데 가족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보상금 일부를 가지고 제재소 사업을 하려던 프랭크 올슨의 딸은 남편과 투자처를 방문하는 길에 비행기 사고로 숨지고 만다. 에릭 올슨은 아버지의 죽음에 이어 여동생 가족의 죽음을 접하며 이 사건으로부터 멀어지기를 결심한다.
 
하지만 그의 뇌리에는 아버지가 묵었던 스태틀러호텔 '1018A'호실에서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와 한 방에 투숙한 로버트 레쉬브룩(그는 CIA와 생물학전 연구소의 연락을 담당했다)은 동료가 죽어 아수라장인 상태에서 경찰이 수색을 위해 방에 들어왔을 때 태연히 변기에 앉아있었다. 또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그는 사라졌어요"라고 말했다. 에릭 올슨은 그날 그 방에서 그 시간에 일어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밝혀내고 싶었다
  

다큐멘터리 <어느 세균학자의 죽음> ⓒ 넷플릭스

 
사실 포드 대통령의 사과는 미흡했다. 누구의 책임인지, 어떻게 책임을 물을 것인지가 없었다. 콜비 국장은 아버지 관련 문서를 열람하게 했으나 내용이 조잡하고 앞뒤가 맞지 않아 일관성이 없었다.

하지만 에릭 올슨의 어머니는 남편 프랭크 올슨의 죽음을 그 정도선에서 묻기를 바랐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느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에릭 올슨은 아버지의 죽음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밝혀내기 위해 본격적으로 길을 나선다. 1994년, 아버지 시신을 발굴해 조지 워싱턴대학교 법의학 교수인 제임스 스타스에게 부검을 의뢰한다. 스타스는 "추락 전에 둔기로 머리를 강하게 맞은 흔적이 있는데 이는 살인을 암시하는 명백한 증거일 수 있다"라고 부검 결과를 발표한다.
 
프랭크 올슨은 이때부터 증언과 증거 하나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긴 여정에 나선다. 1997년에는 CIA의 '암살지침'이라는 비밀문서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 지침 안에는 "살해할 때는 23M 이상 높이에서 떨어뜨리고 그 전에 머리에 충격을 가해 기절시키는 게 좋다. 안구 주변을 강타하는 게 효과적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창문으로 밀어버리라는 교본의 내용과 아버지의 죽음은 외양상 완전히 일치했다. 더욱이 아버지 프랭크 올슨의 상부선 시드니 고틀립(Sidney Gottlieb)은 'MK-울트라' 프로젝트를 이끌었고 후에 쿠바의 카스트로와 콩고공화국의 루뭄바 총리 암살계획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에릭 올슨은 아버지가 자살이 아니라 살해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2001년에는 아버지의 죽마고우 노먼 케이어를 다시 만나 결정적 증언을 듣는다. 아버지 프랭크 올슨이 약을 먹이고 포로를 취조하는 CIA의 극비 프로그램, 이른바 '아티초크 프로젝트'를 반대하고 괴로워했다는 얘기였다. 프랭크 올슨은 "미군이 한국전에서 생물학전을 펼쳤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에 화를 내는 사람"이었고 시모아 허시 기자의 말대로 "자신이 안 사실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 (CIA에) 위험한 인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에릭 올슨은 연방지방검사 로버트 모겐소에게 '아버지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가능한지 묻고 국가와 CIA를 상대로 소송에 나선다. 그러나 수사는 "진전이 없고 계속할 근거가 없다"며 어느 순간 중단되고 소송도 기각되고 만다.
 
에릭 올슨은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진 날부터 한평생 아버지 죽음에 드리운 그림자를 밝히기 위해 싸웠다. 다큐를 만드는 작업에 협조하고 직접 출연한 것도 그런 뜻이었다. 올슨은 1994년에 유해를 발굴하고 나서 아버지가 자살이 아니라 타살되었고 그것도 "기관에 의해 공식적 처형을 당한 죽음"임을 알리기 위해 한평생 노력했다. 그는 '어느 세균학자의 죽음' 끝부분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난 이 사건을 놨는데 이 사건이 나를 놔주지 않는다. 아버지를 기억하려다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질문만 하다 자신에 대한 질문을 잊어버렸다. 아버지를 사랑했기에 그를 위한 희생도 무한했다. 사건의 답을 찾으면 되려니 생각했지만 그 여정에서 자신을 잊어버렸다. 씁쓸함만 가득하다.
 
거리에서 헤맨 세월의 의미
 

최우혁의 아버지 최봉규님의 모습 그는 팔순이 넘어서도 거리에 섰다. ⓒ 최우혁기념사업회 제공

 

최우혁의 죽음, 어머니 강연임의 죽음 그리고 최봉규가 눈을 감고, 이제 최종순이 그 길을 이어가고 있다. 이 가족의 노력으로 죽음의 진실은 어느 정도 손에 잡힐 듯하다.

하지만 에릭 올슨의 말처럼 최봉규와 강연임. 최종순으로 이어지는 이들 가족의 삶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 1987년 9월 8일 최우혁이 숨진 날부터 그들은 넓고 거친 바다에 내몰렸다. 겨울 바다는 거칠었고 밤바다는 어둠만 가득했다. 망망대해, 그 어디에도 닻을 내릴 수 없었고, 잠시 머물 만한 포구도 없었다. 최우혁의 죽음 뒤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를 찾기 위해 끝없이 가야만 하고 돌아갈 곳은 없는 항해였다. 
 
최우혁의 죽음으로부터 40여 년 가까이 이 가족이 벌인 싸움, 최봉규와 최종순이 거리에서 헤맨 세월은 언젠가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의미를 찾는다고 그 오랜 시간이 돌아올 수 있을까? 최우혁의 죽음은 애초에 일어나서는 안 될 일 아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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