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27 21:00최종 업데이트 24.02.2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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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2차가해." <오마이뉴스>가 만난 범죄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수사, 재판, 피해 회복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입은 상처, 그리고 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대안을 취재해 네 차례에 걸쳐 보도한다.[편집자말]

바리캉 사건 피해자 부모, 인천 스토킹 살인 피해자 사촌 언니, 서현역 흉기 난동 피해자 고 김혜빈씨 부모, 진주 편의점 숏컷 폭행 피해자가 지난 1월 31일 서울역 인근 카페에서 <오마이뉴스>가 진행한 집담회에 참석해 서로의 팔짱을 낀 채 사진을 찍었다. ⓒ 이정민

 
"범죄 피해 이후 어떤 책임자도, 매뉴얼도 찾아볼 수 없는 국가가 한심스러웠어요. 이런 현실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 서현역 흉기 난동 피해자 고 김혜빈씨 어머니

서현역 흉기 난동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고 김혜빈씨의 어머니는 딸이 당한 피해를 세상에 알리게 된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잔혹 범죄에 대한 사회적 분노가 커졌지만, 피해자가 직접 목소리를 내는 건 여전히 쉽지 않다. 그럼에도 ▲ 바리캉 사건 피해자 부모 ▲인천 스토킹 살인 피해자 사촌 언니 ▲ 서현역 흉기 난동 피해자 고 김혜빈씨 부모 ▲ 진주 편의점 숏컷 폭행 피해자가 한 자리에 모였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1월 31일 서울역 인근 카페에서 '범죄 피해 이후의 이야기'를 주제로 이들과 집담회를 열었다. 2시간 동안 진행된 집담회에서 이들은 "상처가 아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좌절하지 말고 잘 버티자"고 서로를 위로했다.
 

서현역 흉기 난동 피해자 고 김혜빈씨의 부모가 휴대폰 속 딸의 사진을 내보이고 있다. ⓒ 이정민

 
- 범죄 피해 이후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바리캉 사건 피해자 부모 : "지난해 7월 딸아이에게 범죄 피해가 발생하고 반년 만에 징역 7년이라는 1심 선고가 나왔어요. 저희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양형이라서 공판검사에게 항소를 요청했어요. 아직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할 겨를이 없어요. 딸아이에게 불이익이 가지 않도록 오로지 재판만 생각할 뿐이에요."

고 김혜빈씨 부모 : "저희도 똑같아요. 하던 일을 다 멈추고 재판에만 집중하다 보니 일상이랄 게 없는 거죠. (사건 직후) 혜빈이가 병원에 입원하고 한 달간 죽어가는 걸 봤어요. 아직도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겠어요. 아침에 눈 뜨면 혜빈이가 생각나고, 당장 앞둔 공판이 생각나고, 판사와 검사가 생각나고. 하루하루를 그렇게 시작해요."

숏컷 폭행 피해자 : "저는 지난해 11월 폭행을 당하고 청신경이 손상돼서 왼쪽 귀로 통화를 못해요. 힘줄이랑 근육도 많이 다쳤어요. 며칠 전엔 왼손 통증이 재발해서 다시 부목을 착용하고 있어요. 그날 이후로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몸이 떨리는 공황장애와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에게 갑자기 달려들 것 같아서 항상 불안해요."

스토킹 살인 피해자 사촌언니 : "지난 1월 가해자가 징역 25년형을 선고받았어요. 법정 최고형을 목표로 항소심을 준비 중이에요. 몇 달 뒤면 공판이 다 마무리될 텐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예전처럼 밥을 먹을 수 있을까, 편하게 웃을 수 있을까, 여행을 다녀와도 되는 걸까. 이런 것들을 어떻게 스스로 헤쳐 나갈지 고민이에요."
  

진주 편의점 숏컷 폭행 피해자는 지금도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 이정민

 
- 서로의 사건을 뉴스로 접했을 때 어땠나요.

고 김혜빈씨 부모 : "지옥보다 더한 현실을 살아야 하는 범죄 피해자와 가족이 가장 먼저 생각났어요. 감히 위로조차 못하겠더라고요. 바리캉 폭행도, 인천 스토킹 살인도 저희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잖아요. 그런데 하나같이 검찰 구형보다 법원 선고가 낮게 나와서 자괴감이 많이 들었어요."

스토킹 살인 피해자 사촌언니 : "서현역 부모님께 무슨 말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다가가고 싶어도 혹여나 실례가 될까 연락을 따로 못 드렸어요. 흉기 난동 같은 무차별 범죄의 경우 검사의 구형을 믿는 것 말고는 남은 가족이 추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잖아요. 그런 무기력감을 어떻게 이겨내고 계실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죠."

바리캉 사건 피해자 부모 : "똑같은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는구나 싶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대법원 홈페이지 '나의 사건 검색'에 들어가고, 포털사이트에서 여기 계신 분들이 겪었던 사건들의 기사를 찾아보고, 범죄 관련 블로그 글들을 확인하는 게 일상이 됐어요. 휴대폰을 잘 안 보던 제가 이제는 종일 휴대폰을 붙들고 범죄 피해 사건들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어요."

- 언론에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낸 건 어떤 의미였나요.

스토킹 살인 피해자 사촌언니 : "피해 사실을 직접 알리지 않으면 앞으로 있을 수사와 공판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공론화를 결심했어요. 아마 다들 비슷할 거예요. 공론화 후 연락이 닿은 범죄 피해자들과 얘기해 보니, 제가 힘들고 불편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다른 분들도 똑같이 느꼈더라고요. 그때 알았어요. 이건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 모든 범죄 피해자들이 겪는 공통된 문제구나."

고 김혜빈씨 부모 :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어떤 의미가 있었다기보단 의무라고 생각했어요. 혜빈이가 사고를 당하고 일주일이 다 되도록 어떤 책임자도, 매뉴얼도 찾아볼 수 없는 국가가 한심스러웠어요. 이런 현실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국민들도 알아야 해요. 범죄 피해를 당했을 때 피해자와 가족이 어떤 처우를 받는지 알아야 개선점도 찾을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진주 편의점 숏컷 폭행 피해자의 망가진 휴대폰. ⓒ 이정민

 
- 개선됐으면 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스토킹 살인 피해자 사촌언니 : "사건을 수사하는 사람들의 전문성이 필요해요. 피해자가 직접 공론화하거나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수사부터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요. 저희도 보복살인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해 줄 녹취 파일과 판례를 직접 찾으러 다녔어요(검경은 당초 이 사건을 보복살인보다 형량이 가벼운 일반살인으로 수사·기소함 - 기자 주). 그런데 저희와 다르게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피해자들이 많아요. 그분들이 그 상태에만 머물러 있게 해서는 안 돼요."

숏컷 폭행 피해자 : "(깨진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제 사례를 들자면, 가해자가 범죄 당시 제 휴대폰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는데 경찰이 제출한 자료엔 정작 휴대폰이 증거 목록에서 빠져 있었어요. 가해자는 본인이 그런 적이 없다고 주장했고, 저는 비참한 기분을 느끼면서 망가진 휴대폰 사진을 다시 수사기관에 제출해야 했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피해자가 직접 나서야 하는 현실이 바뀌었으면 해요."
  
바리캉 사건 피해자 부모 : "범죄 피해자의 재판 기록 열람이 가능해졌으면 해요. 가해자가 재판부에 반성문을 네 차례 제출했는데, 저희는 열람 신청을 모두 거절당했어요. 도대체 뭘 반성하고 있는 건지 알고 싶다고 해도 피해자에겐 그럴 권한이 없대요. 반면 가해자는 저희가 제출한 자료를 모두 받아볼 수 있었어요. 가해자는 재판의 당사자이지만 피해자는 마치 제3자처럼 여겨지니까, 저희가 낸 재판 기록 열람도 오로지 판사의 재량에 달려 있는 거죠. 피해자의 당연한 권리를 사법 시스템이 도리어 가로막고 있어요."

고 김혜빈씨 부모 : "법원의 양형이 수십 년간 식당 차림표처럼 정해져 있어요. 가해자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가해자가 얼마나 반성하고 있고, 그런 것들을 양형으로 참작하는 거예요. 어떤 검사가 사건을 맡고 어떤 판사가 선고를 내리는지에 따라서도 형량이 달라져요. 그런데 시대가 흐르면서 범죄의 양상은 더 악랄해지고 있잖아요. 사법부가 선고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을 수 있었으면 해요."
  

바리캉 사건 피해자의 아버지가 집담회 중 생각에 잠겨 있다. ⓒ 이정민

 
- 피해자를 향한 비난 또한 문제입니다.

숏컷 폭행 피해자 : "맞을 짓 한 거 아니냐, 피해자가 먼저 잘못한 거 아니냐, 이런 말들 때문에 가족들이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저희 아버지는 주변에서 '왜 딸이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도록 내버려 뒀냐'는 말을 들었대요. 저도 좀 멀쩡하게 살고 싶어요. 남들의 동정도 연민도 싫고 그저 일상을 재정비하고 싶어요."

고 김혜빈씨 부모 : "피해자에게서 범죄의 원인을 찾는 거예요. 꼭 만만한 피해자들한테 그런 말들을 해요. 저희가 가장 싫어하는 말들이에요. 그런 비난을 들을 때마다 죗값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다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차라리 그런 말들을 가해자한테 했으면 좋겠어요."

- 일상으로의 복귀를 바라는 여러 범죄 피해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스토킹 살인 피해자 사촌언니 : "우리는 평생 흉터로 남게 될 상처를 받았잖아요. 상처가 아물려면 시간도 오래 걸릴 거예요. 그때까지 스스로를 이상하다고,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재판에서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와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잘 버티고 견뎌주세요. 이건 제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해요. 허망하게 떠난 가족을 위해서라도 우리 꼭 남은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가요."

숏컷 폭행 피해자 : "외국 드라마를 보면 중독 치료를 받는 이들의 모임이 되게 많이 나와요. 범죄 피해자들도 집 안에 혼자 있지만 말고 다른 피해자들과의 만남이나 모임에 한 번쯤 나와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런 만남이 지속되다 보면 서로에게 큰 힘이 될 거예요. 뿐만 아니라 우리의 한마디 한마디가 모여서 큰 변화를 일궜으면 해요. 같이 많은 것들을 바꿔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

고 김혜빈씨 부모 :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상처를 꼿꼿이 바라보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내 상처가 어떻게 깊어졌고, 누구에 의해 깊어졌고, 아물어가는 과정을 똑바로 쳐다보면서요. 우리를 아프고 비통하게 만든 가해자에게 절대 등 돌리지 말고, 말보다는 같이 행동했으면 좋겠어요. 서로 이끌어주고 가르쳐주면서 잘 견뎌보자고 말하고 싶어요."
 

서로의 손을 깍지 낀 범죄 피해자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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