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03 11:07최종 업데이트 24.02.03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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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편집자말]
다큐 감독 김지운은 담배를 깊게 들이마셨다. 한 개비에 니코틴이 0.1mg 들어있는 담배다. 촬영 때도 담배를 달고 살지만 편집 작업을 할 때는 더더욱 골초가 된다. 많은 촬영본을 이리저리 들어내고 꿰맞추어 풍성한 나무 한 그루를 빚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노라면 밤을 새우기 일쑤고 손에서 담배가 떠나지 않는다. 그래도 몸은 챙겨야겠기에 얼마 전 가장 약한 놈으로 바꿨다.
 
그는 잇달아 세 개비를 피웠다. 통일부에서 그에게 보내온 공문에 답변을 쓰려고 앉았으나 마음이 안 내켜서다. 2023년 11월 21일 오후 다섯 시 문자가 왔다. 11월 30일에는 '남북관계관리단'에서 이메일로 문서를 보내왔다. 거기엔 "귀하가 (다큐를 찍는다고) 조총련과 조선학교 인사를 접촉했다는 언론보도가 있다. 사실이라면 사전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이다. 12월 5일까지 경위서를 보내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통일부에서 김지운에게 온 공문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사항에 대해 경위서를 내라는 내용이다. ⓒ 김지운제공

 
  
일본 정부는 2010년 4월부터 고교무상교육을 시행하며 공립학교는 수업료를 면제하고 사립학교에는 1인당 연 12만 엔의 취학지원금을 지급했다. 그런데 조선학교만 무상화 대상에서 제외했다. 일본의 문부과학상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은 "교육지원금이 어떻게 쓰일지 모르겠다. 납치 문제가 해결이 안 된 상태에서 조총련 계열 학교를 지원할 수 없다"라는 이유를 내세웠다. 아이들의 교육권 문제에 얼토당토하게 정치 이슈를 들이대 자신들이 벌이는 차별 정책의 핑계로 삼은 것이다.
 
일본의 시민사회는 문부성의 이런 방침에 맞서 차별과 배제를 멈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 각지에서 (이름을 조금씩 달리하지만) '조선학교 고교무상화를 요구하는 연락회의'가 결성되고 전국적인 연대기구도 만들어졌다. 조선학교 재학생과 졸업생도 행동에 나섰다. 2012년 오사카를 시작으로 도쿄, 히로시마, 규슈, 아이치 등 조선학교가 있는 5개 시현에서 "무상화 배제를 취소하라"고 소송을 내고 법정 투쟁에 들어갔다. 일본의 변호사 400여 명은 무료 변론을 하며 이 소송을 지원했다.

한편 조선학교의 학부모는 UN 아동권리위원회에 호소하러 스위스까지 날아갔다. '사회권규약위원회'는 이미 2013년 학부모의 청원을 받아들여 일본 정부에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정책을 시정하라고 권고했고 인권위원회도 여러 차례 같은 의견을 내놨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일본의 사법부도 다르지 않았다. 5개 지역에서 열린 재판에서 오사카의 1심만 제외하곤 모든 1, 2심에서 그리고 일본의 최고재판소까지 정부 손을 들어주었다. 일본 정부의 차별정책은 합법이라고 도장을 찍어준 것이다.
 
김지운이 만든 <차별>은 조선학교학생·재일동포·일본 시민이 벌이는 이런 치열한 투쟁과 연대활동을 영상으로 담았다. 일본 정부의 야만을 고발하고 재일동포와 일본 시민의 뜨거운 우정을 기록했다. 당연히 조선학교 학생이 작품의 주요 출연진이었다. 또 한국과 일본 사회가 조선학교의 존재를 잘 모르기에 체육대회나 졸업식 등 여러 장면을 학교 내에서 촬영했다.
  

규슈조선고급학교의 재일동포 2016년 개교 60주년 기념식의 흥겨운 뒷풀이 장면이다. ⓒ 김지운

  

규슈중고급학교 민족기악 소조 학생의 공연 김지운이 2016년 10월에 촬영했다. ⓒ 김지운

 
그런데 통일부가 이런 창작활동에 대해 격려는 못 할망정 조사를 하겠다니 김지운은 공문을 읽으면서 가슴이 꽉 막히는 느낌이었다. 전쟁의 먹구름이 한반도에 드리워지는 요즘같은 정세에서 교류의 끈 하나라도 붙잡아 평화 분위기로 돌려야 하건만 거꾸로 가는 통일부의 모습에 김지운은 기분이 씁쓸했다.

딸에게 걸려온 전화
 
"아빠 괜찮아?"
 
김지운이 마음을 추스리고 통일부에 보내는 답변 첫 문장을 시작했을 때 딸이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뮤지컬 공부를 하는 녀석은 휴학을 하고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중이다. 스물아홉에 결혼해서 얻은 딸, 카메라만 챙길 줄 알았지 딸아이의 성장에 마음을 쏟지 못했던 게 못내 미안하다. 아빠가 혹 잘못될까 근심이 깊은지 녀석의 목소리는 사뭇 침울했다.
 
김지운은 딸과 통화를 마치고 다시 담배 한 대를 물었다. 어스름 해넘이가 밤바다로 떠나기 아쉬운지 창문에 꼬리를 드리운다. 제 몸을 달군 난로는 오늘따라 불빛이 파리하다. 김지운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이스크라(불꽃)가 문제였을까?
 
김지운은 동아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97학번으로 입학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였으면 92학번 언저리겠지만 군대를 다녀와 늦깎이로 들어간 탓이다. 그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재학 시절 활동하던 과 동아리 '영상미학연구회'를 사회에서도 이어가려고 '이스크라'를 만들었다. 취직 준비도 하면서 동문끼리 작품 활동도 하고 당시 막 시작된 방송사 외주제작프로그램도 받아보자는 취지였다. 기자가 되려 했던 그는 언론 고시에 여러 차례 도전했지만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당시는 나이 제한까지 있던 터라, 졸업 이태가 된 후부터는 응시 자체를 할 수 없었다.
 
김지운은 기자의 꿈을 접고 이스크라를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부산을 대표하는 독립프로덕션으로 만들고 싶었다. 시내 한 편에 사무실을 냈고 방송사에서 아름아름 일을 받았다. 맛집 탐방이나 부산의 숨은 명소, 일상생활의 소소한 얘기를 담는 작업물이었다. 촬영과 편집은 물론 기획과 섭외에 대본까지 직접 해결했다. 그렇게 10여 년 안팎이 지나니 갈증이 커졌다. 밥은 근근이 먹지만 내 작품은 아니었다. 기획은 말할 것도 없고 소소한 자막까지 방송사의 승인을 받아야 하니 작품을 하면 할수록 허기를 느꼈다.
 
목마름이 심해질 무렵, 방송사의 횡포(?)가 시작되었다. 이스크라가 자체 제작한 다큐물을 방영할 때는 전파 사용료를 내라고 했다.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청구서'였다. PD·카메라감독·작가까지 나름 체계를 갖추다 보니 어느새 직원은 열 명이 훌쩍 넘어 어깨도 무거웠던 터 김지운은 결단을 내렸다. 방송사만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는 프로덕션 체제를 끝내고 다큐 작업에 전념하기로 했다. 사무실의 크기도 줄였다.  
 
그렇게 방향을 바꾼 후 김지운은 2015년에 첫 장편 <항로- 제주, 조선, 오사카>를 선보였다. 조선적을 지닌 재일동포 연출가 김철의가 한국 입국이 거부되는 현실을 다룬 작품이었다. 그가 재일조선인의 삶을 첫 작품으로 택한 것은 외할아버지가 재일 1세이고 어머니가 1945년 10월 오사카에서 태어나 갓난쟁이로 고향에 돌아온 가족사가 영향을 미쳤다.

2009년부터 시민단체의 요청으로 재일동포 교류사업에 대한 영상작업을 하며 조선학교를 방문한 것도 큰 자극이 되었다. 그때부터 어렴풋하게나마 '한민족의 유랑사'를 자신의 작품 세계로 취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두 번째 작품이 <우토로>였고 <차별>이 세 번째 작품이다. 그는 이스크라를 세우면서 마음먹은 대로 십여 년 넘게 다큐 영화를 만들어온 것이다.
  

김지운 감독 그는 10여 년 넘게 재일조선인의 아픔을 기록했다. ⓒ 민병래


강제로 끌고 와 부려먹다가 내쫓을 궁리만 하는 일본
 
어라! 김지운은 손끝에 뜨거움을 느꼈다. 지난 시절을 생각하다 보니 담배가 꽁지까지 타들어 가는지도 몰랐다. 김지운은 서둘러 담배를 비벼끄고 기지개를 크게 켰다. 그는 의자를 당겨 앉고 통일부에 보내는 답신 한두 문장을 꾸물꾸물 써나갔다.
 
답신을 쓰는 잠깐 사이에도 별일 없냐며 문자가 들어온다. 요 며칠 일본에서 안부를 묻는 전화도 많이 걸려 왔다. 아무래도 동포들의 근심이 크다. 통일부가 들이대고 있는 '남북교류협력법'이 낯선 데다가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고통받았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혹시 국정원이 나서서 어떤 올가미를 씌우지 않을까도 걱정하고 있다.
 
일본이 패전했을 때 열도 내 재일조선인은 200만 명이 넘었다. 강제 연행된 동포가 그만큼 많았던 탓이다. 해방 조국은 남북으로 찢겨 만주, 연해주, 사할린, 일본에 있는 동포의 귀환을 돕거나 생활지원정책을 펼 수 없었다. 일본은 패전했는데도 반성이 없었다. 오히려 식민지배의 상징인 재일조선인을 차별하고 박해했다. 패전 직후에는 일본 국적은 인정하나 참정권은 줄 수 없다고 했다가 1947년에는 이마저 빼앗고 외국인으로 등록하라고 내몰았다.
 
해방 조국에서는 아직 통일독립국가가 수립되지 않았으니 재일동포는 국적 표기를 하려야 할 수 없었다. 일본은 이런 상황에서 재일동포가 조선반도 출신이라고 모두 '조선적'이라는 기호를 부여했다. 국적이 아닌 분류 표시를 자기들 마음대로 갖다붙인 것이다.  갑자기 동포의 신분은 불안정해져 영주권조차 없는 난민 신세가 되었다. 보장받은 건 임시거주권뿐 언제 추방이 될지 모르고 일본을 떠나면 재입국이 안될 수도 있으니 현해탄을 건너 고향 땅을 오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강제로 끌고 와 마음껏 부려먹다가 이제는 일본 땅에서 살 길마저 끊어버리는 행태, 일본 정부의 관심은 열도 내에서 식민 수탈의 상징인 재일조선인을 어떻게든 내모는 것뿐이었다.
 
조국이 분단국가가 되고 내전까지 겪으면서 재일동포의 고통은 더 심해졌다. 그런데 박정희는 1965년 일본과 수교하면서 재일동포사회를 남북 체제 경쟁의 장으로 만들었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면 영주권을 부여한다'는 협정을 일본과 맺어 재일조선인 사회는 돌연 갈등과 분열에 처하게 되었다. 재일조선인사회에는 큰 대의가 있었다. 남북 어느 한쪽을 국적으로 택하면 분단을 인정하는 꼴이다. 언제가 통일정부가 들어설 때 해도 늦지 않다는 신념이었다. 박정희는 '협정 영주권'을 흔들며 임시거주권밖에 없는 재일동포사회를 분열시켰다.
 
그뿐인가 조국에서 공부하겠다고 유학 온 재일동포 2세, 3세를 대상으로 '유학생간첩단 사건'을 조작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으로 올가미를 씌웠다. 이들이 법정에 섰을 때 "반공을 국시로 하는 이 나라에서 생존을 허용할 수 없다"라며 사형까지 구형했다. 이들을 일본은 차별하고 착취하고, 조국은 "살아 있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낙인찍었다. 이처럼 식민지에 이어 분단과 독재정권의 고통을 가장 많이 겪은 존재가 바로 재일동포, 재일조선인이었다. 그러하기에 김지운에 대한 조사 소식을 들은 동포 사회의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 2편 <울부짖은 일본인 "왜 이리 조선학교 학생을 괴롭히나">(https://omn.kr/278yl)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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