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03 15:51최종 업데이트 24.01.03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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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및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지난 연말에 연거푸 승리를 거뒀다. 11월 23일에는 이용수 할머니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들이 항소심에서 승리했고, 12월 21일에는 대법원이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고, 이어 28일에도 대법원은 미쓰비시중공업과 히타치조센이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지금은 이렇게 위안부 및 강제징용 문제가 부각돼 있지만, 강제동원 문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유형은 강제징병이다. 일본군에 병사로 끌려간 피해자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다.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홈페이지의 '강제동원' 코너에 따르면, 노예노동자로 끌려간 한국인은 753만 4429명이다. 위안부는 최소 2만에서 최대 40만이다. 강제징병 피해자는 일본 정부의 공식 통계만으로도 최하 20만 929명이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규모와 관련해 40만 명은커녕 20만 명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강제징병 피해자가 20만 명을 넘는다는 점은 일본 정부도 부인하지 못한다. 강제징병 역시 한국인들의 한과 상처가 많은 부분이다.

군에 입대하는 일에 대해서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저항이 존재한다. 하지만, 일제 징병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동원되는 일이었다. 그것도 한민족을 착취하는 일본의 군대에 동원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의 저항이 격렬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9년 1월 당시 열 번째 신작시집 <절정의 노래>를 출간했던 이기형 시인. ⓒ 연합뉴스

 
강제징병 거부 투쟁 조직했던 이기형

고 조동걸 국민대 교수의 <한국계몽주의와 민족교육운동>은 "1944년 1월 19일과 20일에 끌려간 학병은 4385명이었는데, 당초 학병 적격자를 계산한 인원은 7200여 명이었다"고 말한다. 예정 인원보다 3천 명 적게 동원됐던 것이다. "거의 어떤 형태로든지 기피한 인원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라고 이 책은 추정한다. 일제 징병에 대한 저항이 상당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저항운동을 조직한 인물 중 하나가 지난 2013년에 향년 96세로 별세한 시인 이기형이다. 3·1운동 2년 전인 1917년에 태어난 그는 72세 때인 1989년에 빨치산 활동을 담은 <지리산> 시집으로 필화 사건을 일으킨 시인으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등을 역임한 통일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함경남도 함주 출신은 이기형은 12세 때 야학을 통해 항일운동에 눈을 떴다. 그가 저술한 <여운형 평전>의 저자 소개란은 "1933년 이후 작가 한설야, 사학자 문석준, 독립운동가 여운형, 시인 임화, 작가 이기영 등을 만나 조선 독립과 문학의 역할에 대해 모색"했다고 소개한다. 26세 때인 1938년에는 중학교급인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에 도쿄 니혼대학 예술부에 들어가 27세 때까지 2년간 수학했다.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가 출판사와 서점들에서 이기형의 신간 시집 <지리산>을 압수수색(2.25)한 지 7개월 뒤인 1989년 9월 5일 한국인구보건연구원이 당시 보건사회부에 제출한 업무보고 자료가 있다. 같은 날짜의 <매일경제> 12면 중간에 보도된 이 자료에 따르면, 그해의 한국 남성 평균 수명은 66.9세로 추정됐다. 

그런 시절에 27세도 아닌 72세 나이로 필화 사건을 일으켰다. 이기형은 그만큼 열정이 뜨거웠다. 이 열정은 72세가 아닌 27세 때는 항일투쟁에 발산됐다. 니혼대학에서 돌아온 스물일곱 살의 이기형은 강제징병 저항운동에 참여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0년대에는 일본이 광분하다시피 하다 보니, 국내 항일투쟁이 다소 위축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광수나 홍난파처럼 국내에서 민족주의운동을 하던 사람들의 상당수도 1930년대 후반부터 친일파로 전향해 있었다. 이런 데다가 1940년대에는 한국 대중이 강제징용·위안부·강제징병으로 대거 동원됐기 때문에, 국내 민족운동단체들이 인적 기반을 구축하기가 어려웠다.

그랬던 1940년대에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에 버금가는 세력을 형성한 조직이 조선민족해방협동당(협동당·협동단)이다. 변은진 가천대 연구교수는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70권에 실린 '해방 전 조선민족해방협동당의 결성과 비밀결사운동'에서 "협동당은 해방 직전 결사로서는 널리 알려져 있는 조선건국동맹 다음으로 큰 조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라며 "관련자는 최소한 200~300명이나 되며, 검거된 인원만 1945년 초에 120명에 달했다고 한다"라고 기술한다.

학병들의 저항운동을 다룬 특집인 1970년 8월 11일 자 <조선일보> 좌상단 기사는 "이 비밀 항일단체는 1944년 8월에 포천에 1백 20명, 금강산에 1백 명의 군사(그들은 단원을 그렇게 불렀다)를 확보하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독립운동가 김종백을 중심으로 1943년 6월 도쿄에서 결성된 협동당은 학도지원병 입대를 거부하는 청년·학생들의 가세로 조직을 확충했다. 이듬해에는 국내로 거점을 옮겨 경기도 포천 국망봉과 서울 계동에 근거지를 만들고 지방별로 연락책을 두었다. 이때의 지방 담당자 중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로 1987년 6월항쟁을 이끈 계훈제도 포함돼 있었다.

협동당은 학병을 거부하고 도피한 청년들을 보호해 줬다. 금강산 은신처에는 약 100명이 수용됐다. 협동당은 산속에서 이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또 포천과 양주 일대의 일본인 회사인 사이토임업과 산코제탄 등에 구성원 200여 명을 위장취업시키기도 했다.

이 단체는 미국 등의 연합국이 송출하는 단파방송을 활용해 일제의 여론 선전전을 교란시켰다. 위 논문은 "단파방송을 청취하여 그 내용을 유포"했다고 설명한다. 일본이 패배하고 있다는 소식을 퍼트리는 데도 관여했던 것이다.

또 김원봉의 의열단이 수행한 운동 방식에도 뛰어들었다. "철원 등 몇 개 경찰서와 형무소의 방화, 열차 전복을 기도하는 등 초기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며 "1945년 초에는 부평 병기공장의 조선인 군속을 포섭하여 폭발물을 입수하고 원산과 인천의 군사요새지 시설을 폭파할 것을 기획"했다고 논문은 말한다. 신백우 같은 휘문중학교 졸업생들은 인천 앞바다에서 폭파 실험을 하기도 했다. 이들의 항일투쟁이 상당히 위협적인 수준으로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이기형은 협동당의 정식 당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질적 방법으로 이 운동에 개입했다. 위 논문에 따르면, 고향인 함흥에서 염윤구·김석훈과 함께 소모임을 만들어 항일투쟁을 모색한 그는 염윤구의 제안에 따라 협동당과 관련을 맺게 됐다.

염윤구와 김석훈은 산으로 들어가고 자신은 후방에 남기로 한 그는 징병 및 학병 거부자들을 조직하는 지하 활동에 참여했다. 그의 집에는 당수 김종백과 학생부책임 김준호가 드나들었다. 그의 거처가 협동당 조직과 대중을 연결하는 매개 기능을 했던 것이다.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그의 독립운동
 

1998년 2월 13일 황석영, 진관, 박노해, 김하기, 박영희씨 등 구속문인들의사면을 촉구하는 `투옥 문인의 밤 행사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주최로 서울 명동성당 가톨릭회관에서 열렸다. 오른쪽 네 번째에 있는 인물이 이기형 시인. ⓒ 연합뉴스

 
이기형은 함흥고보를 졸업한 1938년 가을부터 31세 많은 몽양 여운형과 인연을 맺었다. 이는 사람들이 그를 '몽양의 비서'로 오해하는 원인이 됐다. 이기형은 스승 같은 여운형에게도 협동당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여운형은 '조직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며 거리를 뒀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김원봉 스타일의 독립운동을 벌이는 협동당이 여운형에게는 맞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다.

협동당 활동을 외곽에서 지원한 일로 인해 이기형은 서너 차례 검거됐다. 복역 기간은 1년여가 된다. 협동당 사건으로 그 정도 복역을 했으니, 형식상의 가입 여하에 관계없이 실질적인 조직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

28세 때 맞은 해방 뒤에 이기형은 <동신일보>와 <중외일보>에서 정치부·사회부 기자로 활동했다. 1947년에 여운형이 암살된 뒤 월북해 <민주조선> 사회부 기자로 잠시 활동했다. 집이 함경도에 있었으니 월북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지만, 보수 반공세력이 볼 때는 월북자였다. 그 뒤 한국전쟁 때 남하해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체포돼 다시 남한에서 살게 됐다.

그의 어머니와 아내와 자녀는 북에 있었다. 그는 석방 뒤 남한에서 상점 경영, 학원 강사, 학원 경영, 번역 등을 하며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살았다. 그러다가 1982년에 시집 <망향>을 내면서 사회 무대에 복귀했다. 그런 상태에서 1989년에 72세 나이로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되어 감옥에 들어갔다. 27세 때 학병 거부 투쟁으로 대규모 항일운동에 가담했던 그가 72세 때 대형 필화사건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됐던 것이다.

조동걸의 <한국 계몽주의와 민족교육>은 "함경남도 북청 지방의 학병 해당자 50여 명은 울분을 참지 못하여 술을 마시고 경찰서를 때려 부수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문전의 옥토를 다 팔아먹고 지원병 신세가 웬말이냐' 하며 항거의 노래를 부르며 시위하였다"고 서술한다.

또 "서울에서는 재동파출소를 때려 부수고 항거한 일이 있었다"라며 "이 사건 때문에 중앙학교 5학년 학생 전원이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어 고문과 구박을 받고 나왔다"고 설명한다. 이기형의 학병 거부 투쟁은 이 같은 분노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강제징병 거부 투쟁은 한국의 인적 자원이 일제에 착취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인적 자원을 지키는 운동이었으므로 영토를 지키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이기형은 그런 일에 뛰어들어 투쟁하다가 1년 이상 수감됐다. 그는 현재까지 지정된 독립유공자 1만 7915명과 비교할 때도 유공자 서훈을 받기에 손색이 없다.

그런데도 유공자로 지정되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터부시된 여운형을 보좌한 일, 38선을 넘어 고향에 갔다가 남하해 빨치산이 된 일, 국가보안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일 등은 국가보훈부가 그를 외면하는 이유를 짐작게 만든다. 남북화해와 국가보안법 폐지 등이 관철돼야 이기형과 그의 동지들이 수행한 독립운동이 제대로 된 조명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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