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19 13:24최종 업데이트 24.03.02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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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7일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열린 '이승만·트루먼 대통령 동상 제막식'에서 시민들이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9월 11일 시작된 이승만기념관 건립 모금 활동이 3개월을 넘었다.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의 9월 19일 자 보도자료에 따르면 9월 18일까지 모금된 금액은 34억 원 정도이고, 11월 30일 자 언론보도에 따르면 11월 29일까지 걷힌 액수는 67억 원 남짓이다. "잠정적으로 500억 원 정도 모금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발언이 모금 개시 당시 대통령실 관계자의 이름으로 보도된 바 있다.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은 윤석열 정권을 위시한 보수진영이 한국 사회를 재조직할 목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혼탁'해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국부 이승만'의 이념과 사상으로 정화시키겠다는 목표하에 진행되는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극우세력이 포함된 범보수 진영의 조급증이 표출되고 있다. 윤석열 정권을 포함한 기념관 추진 세력은 '국부 이승만'을 띄우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준비를 건너뛴 채 모금 활동부터 벌이고 있는 것이다.

'국부'가 될 자격이 없는 이승만
 

이승만 ⓒ 위키미디어 공용

 
일단 이승만이 국부라는 점에 대해 우리 사회에선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보수진영이 주로 한국전쟁 수행과 한미동맹 체결 등을 이승만의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국부나 건국시조는 국가나 정부수립 과정에서 탄생한다. 이 과정에서 잉태된 영웅적 혹은 초인적 이미지가 국가 유지에 오래도록 기여한다. 그런데 한국전쟁과 한미동맹은 정부수립 이후의 일이다. 대한민국 국부 이미지와 직접 연결되는 사건들은 아니다.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의 법통을 19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두고 있다. 1948년 정부 수립은 3·1운동과 임시정부를 계승한 일이라는 것이 우리 헌법의 정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부가 되려면, 3·1운동이나 임시정부 수립 혹은 1945년 일제 패망이나 1948년 정부수립 과정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특출한 업적을 남겼어야 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 그는 손병희·이승훈·한용운 등이 포함된 민족대표 33인 명단에 들어가지 않았다. 3·1운동 일주일 전인 그해 2월 25일 그는 일본을 대신해 국제연맹이 한국을 통치해달라는 위임청원서를 작성해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과 파리평화회의(파리강화회의)에 제출했다. 이 일로 인해 단재 신채호로부터 "이완용이나 송병준보다 더 큰 역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수립도 주도하지 못했다. 자기중심적인 캐릭터로 유명한 그가 이 일을 주도했다면, 임정 청사는 상하이가 아니라 하와이에 마련됐을 것이다. 그가 초대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된 것은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운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나라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과분하게 주어진 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1925년 3월 18일 탄핵당했다.
 
이승만이 일제 패망을 이끈 주역이 아니라는 점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는 그 뒤의 대한민국정부 수립 과정에서도 자기 능력과 자기 조직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정부수립 때 대통령이 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자력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인류가 생각하는 국부나 건국 시조들은 상당 부분은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태조 이성계는 자신이 보유한 사병부대와 자신이 일으킨 위화도회군을 기초로 조선왕조를 창업했다. 태조 왕건은 가문이 보유한 영향력과 자신이 참여한 통일전쟁을 기초로 고려왕조 창업에 대한 지지 세력을 확보했다.
 
한국 역사에 나타난 그 이전의 건국 시조들은 물론이고 튀르키예의 무스타파 케말이나 미국의 조지 워싱턴 같은 근현대의 외국 국부들도 상당 부분은 자기 힘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 점에서 이승만은 현저한 결격 사유를 갖고 있다.
 
해방 직전의 젊은 지식인들은 이승만을 잘 몰랐다. 일반 대중은 더욱 몰랐다. 이 점은 해방 직전에 미국 전략사무국(OSS)과 미군 방첩대(CIC) 등이 한국 실정을 조사할 목적으로 파악한 내용이다.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의 <우남 이승만 연구>는 OSS 문건을 포함한 당시의 미국 측 자료를 이렇게 정리한다.
 
"학병으로 중국 전선에 끌려 나갔다가 1945년 초 일본군을 탈출한 한국 학생들이 OSS 중국 지부에 밝힌 한국 저명인사의 명단을 보면, 송진우·여운형·김성수·유억겸·장덕수·조만식·신석우·이태준·이광수·한용운·한상룡·양주동·최린·유진오·이기영·방응모·이관술·이관구·정인과 등 주로 민족주의 계열의 인물들이 거론되었다."
 
위 책은 "1945년 한국 진주를 준비 중이던 미 제24사단 정보참모부(G-2)는 15명의 유식한 한인 포로에게 '지하운동을 하고 있는 지도자'를 선정하게 했다. 이들은 여운형·윤치호·이광수·김일성 등을 거론했을 뿐 이승만의 이름은 거명하지 않았다"라며 "미군 CIC 6개 지대가 공동으로 조사해 작성한 <지역연구: 한국>(1945년 8월)은 한국의 3대 인물로 조만식·윤치호·김성수를 꼽았다"라고 설명한다.
 
한국 보수의 조급함... 몇 년이나 버틸까
 

지난 3월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탄생 148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승만은 1925년까지 임시대통령이었는데도 1940년대 초반의 청년 지식인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그간의 독립운동에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제 패망을 전후한 시점에 그는 크게 부각됐다. 여기에는 '미국의 소리' 역할이 컸다.
 
<조선일보> 기자인 역사저술가 이한우의 책 <대한민국을 세운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이승만이 1942년부터 대일 선전전을 위한 미국 단파방송에 투입된 일을 설명하면서 "문제는 이 단파방송이 의외로 국내 독립운동가와 여론지도층에 커다란 영향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라며 "단파방송은 이승만의 명성을 제고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 신비감, 민족해방의 희망과 우상으로 자리 잡게 했다"라고 기술한다.
 
그런데 방송 내용이 훗날 이승만의 지지자들이 될 사람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가짜뉴스도 유포됐다. 정병준 교수의 <우남 이승만 연구>는 이승만보다 22년 뒤인 1897년에 출생해 미국 유학 중에 이승만과 함께 활동하고 귀국 뒤 <동아일보> 기자로 일한 홍익범이 방송 내용을 부풀려 유포시키는 일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우남 이승만 연구>는 "그가 입수한 이승만 중심의 정보는 국내 민족주의자들에게 과장된 형태로 전달되었고, 증폭되어 유포되었다"라며 그 정보 속에 "이승만 일파는 미국 정부의 원조를 받아 동지(同地)에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해 미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한 뒤에 조선독립운동을 하고 있음"이라는 내용도 있다고 소개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군사적 방법으로 독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허위 정보는 미국이 일본을 꺾은 뒤에 이승만의 위상을 높이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미국은 국내 기반이 사실상 전무한 이승만이 해방을 즈음해 유명해지도록 돕는 데만 그치지 않았다. 1945년 10월 16일에는 70세 된 이승만에게 미군 군복을 입히고 더글러스 맥아더의 전용기에 태워 김포공항에 내려놓았다. 꼭두각시를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이승만을 33년 만에 귀국시켰던 것이다.
 
그 뒤 미국은 남한 단독정부론을 성급히 터트리는 이승만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그에게 힘을 실어줬고, 이는 친일·친미 세력인 한국민주당이 이승만을 선택하는 결정적 배경이 됐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된 것은 절반 이상은 미국 덕분이고 나머지는 친일세력 덕분이다.
 
윤석열 정권과 보수진영은 '국부 이승만' 이미지의 확산을 위해 한국전쟁과 한미동맹 부분을 집중 홍보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부 이미지에 결정적으로 필요한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일제 패망,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승만이 독자 기반으로 이룩한 성과를 입증하지는 못하고 있다.
 
건국이나 정부수립 과정의 독자적 역할이 확인되지 않은 인물이 건국 시조나 국부로 추앙된 사례를 찾아내기는 힘들다. 그런 시기에 출중한 업적을 세운 인물을 건국 시조나 국부로 인정하는 데에 인류는 익숙하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 보수처럼 정부수립 이후의 행적에서 그런 단서를 찾아내 대중을 설득하려 하면 성공 가능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승만은 자기 기반으로 이룩한 일도 없고, 한국인 조직(친일파 제외)과 제휴해서 성취한 일도 없다. 잊힌 자신의 존재를 미국 덕분에 어느 정도 알려 나가다가 미국의 배려로 귀국하고 미국의 도움으로 정권을 차지했다. 국부로 인정받는 데 필요한 요건이 전혀 구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승만기념관이나 이승만 동상과 관련된 사업들은 하나 같이 허상의 이미지에 기초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이승만을 국부로 띄우는 것은 윤석열 정권을 포함한 보수세력이 전반적으로 조급증에 빠져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관한 보수진영 내부의 토론과 상호 비판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이런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에 대해서 그들이 주목하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왕건이나 이성계, 무스타파 케말이나 조지 워싱턴을 국부로 띄운 사람들에 비해 지금의 한국 보수는 집단적인 부주의를 범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승만은 허상의 이미지로 12년간을 버티다가 1960년에 하와이로 달아났다. 문제의 메커니즘에 주목하지 않는 지금의 보수세력이 이승만 미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으니, 이 일이 몇 년이나 버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위한 보수진영의 후원금 납부는 허공으로 거품을 날려 보내는 일이나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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