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02 19:45최종 업데이트 23.12.02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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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 스틸 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 <서울의 봄>은 박정희가 쓰러진 1979년 10·26 사태 직후부터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킨 12·12 쿠데타까지를 다룬다. 영화는 쿠데타 당일에 초점을 맞춰, 반군을 동원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이에 맞선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의 대결을, 황정민(전두광 역)과 정우성(이태신 역) 두 배우의 연기로 묘사한다.

장태완 장군은 전두환에게 맞서 가장 악착같이 저항했다. 전두환 진영에 적지 않은 공포감도 안겨주었다. 장태완은 전두환의 심복이자 자신의 부하인 장세동 수경사 제30경비단장을 지목해 사살 명령을 내렸다. 또 쿠데타 지휘부가 있는 경복궁 인근으로 전차들을 출동시켰다.


<노태우 회고록> 상권은 이를 "장태완 장군의 이성을 잃은 행위"로 표현했다. 회고록에서 노태우는 12·12 상황을 간략히 서술하고 넘어가면서도 장태완 부분만큼은 비교적 길게 서술했다. 예측불허인 장태완으로 인해 적잖이 긴장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상황을 묘사한 1993년 6월 15일 자 <동아일보> '청와대 근위부대' 제13편 역시 "경복궁의 쿠데타 지휘부는 이 전차 구르는 소리에 아연실색했다", "노태우 9사단장은 등골이 오싹했다"고 묘사한다. <서울의 봄>이 전두환 대 장태완 구도를 설정한 것은 이런 상황에 근거했다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전두광과 이태신의 최종 대결을 경복궁 광화문 앞을 무대로 보여준다. 이태신이 전차를 이끌고 전두광을 잡으러 이곳에 출현하고, 전두광 측은 이를 막고자 광화문 서쪽 경복궁 담벼락 앞에 수십 미터의 바리케이드를 설치한다. 하지만 전차들을 진격시킬 수도 없고 쿠데타 본부에 포격할 수도 없음을 알게 된 이태신이 단독으로 바리케이드를 뛰어넘어 전두광에게 다가가다가 체포되는 장면으로 영화 속의 쿠데타는 마무리된다.

너무나 치밀했던 전두환의 작전
 

영화 <서울의 봄>스틸 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장태완 장군이 별세하고 2년 뒤인 2012년에 출간된 <12·12 쿠데타와 나>는 그가 체포되는 순간을 영화와는 전혀 다르게 묘사한다. 그는 쿠데타 직후부터 행방이 묘연했던 노재현 국방부장관의 전화가 걸려온 일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내가 그렇게 찾고 있던 노재현 국방장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라며 "이때 시간이 12월 13일 새벽 3시경"이었다고 한 뒤, "병력들을 철수시키고 상황을 끝내도록 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노재현의 지시에 대해 장태완은 "네 알겠습니다"라며 "그것이 장관님의 명령이시라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승복했다. 그는 "장관님, 제가 복명복창을 하겠습니다. 이 시간부로 상황을 끝내겠습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 뒤 이런 상황이 이어졌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같은 방에 있는 참모차장과 육본 참모부장들을 향해서 12월 13일 03시부로 상황을 끝내겠다고 보고를 했다."

그는 수경사에 모인 정부군 수뇌부에 그렇게 보고한 뒤 직속 부하들을 불러놓고 국방부 장관의 지시를 받았음을 알린 뒤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전 부대 장병들의 건투와 행운을 빕니다"라고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런 뒤 4시 30분에 연행돼 보안사 분실이 있는 서빙고로 끌려갔다.

<서울의 봄>이 전두환에 맞선 장태완을 훌륭하게 묘사한 것은 의미가 있다. 장태완은 칭송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군인이었다. 그날 밤에도 국방부장관의 진압 중지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다. 실제와 동떨어진 영화 속 장면들은 전두환 대 장태완의 구도를 강조하기 위한 픽션에 불과하다.

전두환에 맞선 장태완을 칭송하는 마음은 12·12 쿠데타에 대해 분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가질 만한 심정이다. 하지만 이 구도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12·12를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 뿐 아니라, 전두환이 의도한 대로 12·12를 바라보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10·26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를 살해한 뒤 군부를 통제할 목적으로 거사 전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식사에 초대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참모총장의 신병이 박정희 피살 현장에 묶이도록 만들었다. 전두환은 정승화가 이로 인해 10·26 현장에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그에게 혐의를 씌우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12·12 당시 전두환은 김재규의 방식을 어느 정도 답습했다. <서울의 봄>에서도 묘사됐듯이,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감을 만찬에 초대해 이들이 쿠데타 시각에 술을 마시고 있도록 유도했다. 김재규가 정승화를 이용한 방식과 똑같지는 않지만, 전두환 역시 정승화·정병주·김진기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 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장태완을 유인하고 이용하는 전두환의 방식은 영화에서 묘사된 것보다 훨씬 치밀했다. 전두환은 장태완이 식사 초대를 거부하지 못하게 일종의 뇌물을 사전에 제공했다. 위 회고록이 나오기 6년 전에 기고한 2006년 5월 16일 자 인터넷판 <시사저널> '12·12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군 육필 수기'에서 장태완은 이렇게 말했다.

"12·12사태 며칠 전 전두환의 비서실장인 허화평 대령이 내 사무실로 자기 사령관의 전갈을 갖고 왔다기에 만났더니, 일금 백만 원짜리 수표 1장과 조그마한 메모지가 들어 있는 봉투를 주었다."

메모지에는 '형님! 얼마 되지 않지만 집의 김장에 보태 쓰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 글에 따르면 봉투를 건넨 허화평은 "저희 사령관님께서 장 사령관님의 취임 환영 파티를 열겠다고 허락되시는 일시를 알아 오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며칠 뒤 수경사 헌병단장인 조흥 대령이 12월 12일 오후 6시 30분에 파티를 연다는 전두환의 전갈을 전했다.

전두환이 국군보안사령관에 취임(3.5)하고 3주 뒤에 보도된 1979년 3월 27일 자 <경향신문> 7면 우중단은 "우동과 짜장면값이 지역에 따라 한 그릇에 2백 원에서 3백 원으로 20%가 또 올랐다"고 보도했다. 전두환이 장태완에게 보낸 '얼마 되지 않는' 김장값 100만 원이 얼마나 거액인지를 알 수 있다. 장태완 집이 아니라 장태완 부대의 김장값이라고 해야 어울릴 만한 금액이다(다만 장태완은 전두환의 육사 동기인 수경사 참모장 김기택에게 백만 원짜리 수표를 맡기며 "병사들의 연말 특식 준비에 쓸 수 있도록 당신이 보관해 두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데서 느낄 수 있듯이, 전두환은 장태완이 식사 초대를 거절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했다. 전두환이 정승화 총장 연행에 대한 재가를 받고자 청와대에 들어감으로써 쿠데타가 개시된 시각은 저녁 6시 30분이고, 서울 한남동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성이 울린 것은 7시 15분이다. 장태완이 만찬장에 있다가 비상 상황을 보고받은 것은 7시 35분이고 수경사령부에 도착한 것은 8시다. 결국 전두환의 '김장값'은 수도 서울을 방위하는 수경사령관의 초기 대응에 지장을 준 셈이다.

전두환 대 장태완의 구도로 12·12를 조명하게 되면, 장태완이 어이없이 당하는 장면들을 계속 접하게 된다. 일례로, 반란군 장군들이 회합을 가진 곳은 다른 데도 아니고 장태완의 관할인 수경사 30단장실이었다.

이뿐 아니라 수경사 본부 병력의 대부분도 쿠데타에 가담했다. 위 육필 수기에 따르면, 10시 50분경 수경사 내에서 장태완을 지지하는 장교는 전체 450명 중에서 60여 명이었다. "3백 90명은 대부분 반란군에 가담"했다고 장태완은 회고했다. <서울의 봄>에서 이태신은 전두광을 잡겠다며 전차 4대만 이끌고 경복궁 앞으로 진격했다. 4대밖에 동원하지 못한 것은 "32대는 반란군에 가담"했기 때문이라고 육필 수기는 알려준다.

훌륭한 군인 장태완... 그러나 한계는 있었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 컷. 극중에서 정상호 육군참모총장(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모티브가 된 인물) 을 맡은 이성민 배우.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장태완은 전두환에게 용감히 맞서기는 했지만, 쿠데타 이전부터 전두환에게 옭아매어져 있었다. 전두환은 장태완의 병력과 공간과 탱크를 쿠데타에 활용했다. 전두환이 장태완을 농락했다고도 평할 수 있다. 이랬기 때문에, 실제 역사에서 전두환 대 장태완 구도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장태완이 전두환에게 휘말려 든 장면들만 연이어 부각될 수 있다.

장태완이 훌륭한 군인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를 전두환과 대비시켜 선악 구도를 만드는 것은 영화 제목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민주화 대 군부독재라는 상황을 거시적으로 반영하는 <서울의 봄>이라는 제목을 사용했다면, 영화의 선악 구도도 이에 맞출 필요가 있다. 박정희 체제를 떠받치던 군부의 일원인 정승화나 장태완을 전두환의 반대편에 두는 것은 당시의 정국 구도와 어울리지 않는다.

정승화가 전두환의 쿠데타를 막고 정국을 주도했다면, 1980년 정세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 5·18 광주 학살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일어났더라도 양상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승화 역시 박 정권을 떠받치던 군부 수뇌부의 일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정승화가 전두환에게 이기고 지고는 상황의 본질을 비껴가는 것이다. 정승화와 전두환의 대결은 최고지도자를 잃은 박정희 군부 내의 주도권 다툼이었다. 박 정권 내부의 다툼을 <서울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다루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정승화의 정세 인식이 전두환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는 점은 정승화의 회고록에도 나타난다. 그는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에서 "나는 김대중 씨에 대해 이전부터 약간의 의혹을 갖고 있었다"라며 김대중을 공산주의 선동가로 바라보는 인식을 드러냈다. 그런 뒤 1979년 11월 26일 계엄사령관 자격으로 언론사 사장들을 초대해 "김대중은 곤란하다"고 발언한 일을 소개한다.

회고록에서 정승화는 자신이 지휘하는 계엄사가 재야 지도자 함석헌을 체포한 사실도 언급했다. 이런 데서 나타나듯이 재야와 야당에 대한 정승화의 인식은 박정희나 전두환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의 적으로 묘사된 군인들이 1980년을 주도했다 해도 그들이 전두환과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는 힘들었다.

12·12 쿠데타 당일, 장태완 사령관은 반군 쪽에 넘어간 황영시 1군단장과 통화하면서 회유를 시도하던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위 육필 수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아니, 형님마저도 이러시기요? 정승화 장군님의 총장 취임 운동을 쫄자인 저한테까지 부탁하던 형님이! 이제 그분이 참모총장이 되셨으니 최선을 다해 모셔야지요."

이 통화에서 나타나듯이 장태완은 정승화 라인의 일원이었다. 정승화가 전두환을 물리치고 상황을 주도했다면, 장태완 역시 정승화의 정세 인식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정승화·장태완 등과 전두환의 관계를 선과 악의 구도로 그리는 것은 실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다.

10·26 사태 직후의 군부는 자기들끼리는 주도권 경쟁을 했지만, 민주진영에 대해서는 공동 노선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끼리의 경쟁관계를 <서울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묘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 제목을 택할 경우에는 전두환의 라이벌을 군부 밖에서 찾는 게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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