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01 15:24최종 업데이트 23.10.01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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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북한 초대 내각 사진. 앞줄 왼쪽 네 번째가 김일성이다. ⓒ 자료사진

 
해방 직후의 급격한 인구이동에서 나타난 특징 중 하나는 친일파들의 대거 남하다. 일본제국주의에 부역한 반민족행위자들이 38도선 이북에서 이남으로 남하하는 현상이 있었다. 미군정이 남한 진보진영을 견제할 목적으로 이북 출신 극우세력을 끌어들이고 후원했기 때문에, 남쪽을 향하는 친일파들의 발걸음은 한층 가벼웠다.

그런데 이런 흐름에 역행하는 사례들도 있었다. 북에서 내려오는 친일파들의 틈을 비집고 북으로 올라가는 소수의 친일파다.


1946년 7월에 월북한 무용가 최승희는 이남에서 친일 행적이 논란이 되자, 이를 피해 북으로 달아난 사례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최승희 편은 그가 중국에서 1946년 5월 귀국한 일을 설명한 직후 "일제강점기 행적 등이 문제가 되어 정착하지 못하고 7월 20일 남편 안막, 큰오빠 최승일과 함께 월북했다"고 기술한다. 그 뒤 김일성의 지원 하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열고 활발하게 활동했다.

최승희처럼 친일파인데도 월북해 북한 사회의 중심적 인물로 활약한 인물들은 더 있다.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참의를 지낸 장헌근도 그런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일제의 녹봉 받아먹던 장헌근의 36년
 

조선총독부 청사 전경. 1926년 경복궁 내에 준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의 모습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5권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서 친일파로 규정된 장헌근은 임오군란 1년 전인 1881년 6월 28일 출생했다. 태어난 곳은 서울이다.

그의 프로필에서 눈에 띄는 것은 10대 시절부터 경력이 꽤 다채롭다는 점이다. 이곳저곳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한 것이 이목을 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6세 때인 1897년에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양잠을 배우고, 이듬해 사가현에서 직물 실습을 배웠다. 1894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막강해진 뒤에 일본 곳곳에서 기술도 배우고 공부도 했던 것이다.

그의 직업은 그 뒤 한층 다채로워졌다. 24세 때인 1905년에는 대한제국의 육군유년학교 교관이 되고, 1906년 이후에는 사립 청풍학교 교사와 합성중학교 강사를 지냈다. 1907년에는 육군무관학교 교관이 됐고, 1908년에는 보성중학교 강사가 됐다.

국권 침탈 7개월 전인 1910년 1월에는 <만한잡지> 편집인이 됐고, 그해 4월에는 경시청 소속의 경찰이 됐다.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되어 다양한 영역을 경험했던 것이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해에 경찰이 된 그는 그 뒤로도 계속 경찰 일을 했다. 그러다가 3·1운동 3년 뒤인 1922년, 군수로 변신했다. 위 보고서에 따르면, 그해 8월 12일 강원도 통천군수에 임명됐다.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에서 태어나 훗날 현대그룹을 창업하게 될 정주영이 일곱 살이었을 때다.

그 뒤 강릉군수·고성군수·원주군수 등을 거친 그는 54세 때인 1935년에 부지사급인 함경북도 참여관으로 승진했다. 3년 뒤에는 지금의 국회의원과 위상이 비슷한 중추원 참의에 올랐다. 참의직은 1945년 해방 때까지 계속 유지됐다.

일제 침략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중추원 참의가 된 그는 식민지 한국의 인적·물적 자원과 정신력을 전쟁에 동원하는 각종 관변단체에 가담했다. 함경북도 지원병후원회장, 유림들을 포섭하기 위한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흥아보국단 함경북도 위원, 조선임전보국단 함북 이사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10년 국권침탈 시점부터 1945년 일제 패망 시점까지 일본의 녹봉을 받았다. 일제 36년 내내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친일재산을 축적했던 것이다. 그것에 대한 고마움은 그의 글에 반영됐다.

<친일인명사전>에 인용된 1942년 제23회 중추원 회의 자문 사항에 따르면, 그는 일제가 한국에서 실시하는 강제징병에 감격을 표시했다. "정말로 송구스럽고 감격적이며, 멀리 동방에 머리 숙여 절하고 단지 눈물을 흘릴 뿐"이라며 한국 청년들을 은근히 추동했다.

4년 전에 쓴 1938년 1월 23일 자 <경성일보>에서는 지원병 제도의 실시를 격찬했다. "반도 통치에서 획기적 선정(善政)", "나도 군인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는 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런 그가 지원병제를 넘어 징병제로까지 확대되자 '송구스럽다'며 황송해 했던 것이다.

북한 고위직 된 장헌근... 어째서 '친일청산론' 폄하 근거가 되나
 

김광동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2월 7일 오후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에서 열린 51차 전체위원회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 연합뉴스

 
그랬던 친일파가 해방 뒤 월북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사법부장이 됐다고 알려져 있다. 한때 북한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사례는 남한 극우 세력의 선전에 이용되고 있다. '북한은 친일청산을 했는데 남한은 전혀 안 돼 있다'는 우리 사회의 오랜 불만을 논박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지난 9월 5일에 일본 학자들이 참여한 합동 심포지엄에서 "친일파가 되어 다행이다"라고 발언한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 각종 극우적 발언으로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이 장헌근 사례를 활용하고 있다

두 사람은 <시대정신> 2013년 봄호에 실린 '북한 친일청산론의 허구와 진실'에서 "북한이 했다고 선전하는 친일청산이란 (것은) 친일청산이 아니라 소비에트 공산혁명에 반대하는 반공 혹은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과 청산이었을 뿐"이라고 한 뒤 중추원 참의 장헌근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사법부장이 됐다고 기술했다.

이들이 북한의 친일청산을 깎아내리는 것은 당연한 말이 되겠지만 북한을 폄하하기 위함이 아니라 남한의 친일청산론을 깎아내리기 위함이다. 이들은 북한의 친일청산을 저평가한 뒤 남한의 친일청산이 성공적이었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북한보다 상대적으로 친일청산에 보다 적극적이고 철저했으며 또한 합리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게 공동 저자들의 주장이다.

반민족행위자처벌법 제정을 제안한 김웅진 의원은 1948년 9월 9일 국회에서 북한의 친일청산 실적을 가리켜 "38 이북은 엄연하게 처단되었다"라고 발언했다. 북한의 친일청산이 상당히 강도 있게 진행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말은 어느 정도는 부풀려진 것이다. 최승희와 더불어 장헌근 같은 친일파의 사례는 북한의 친일청산에도 문제점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런 사례가 북한의 친일청산이 남한보다 불철저했음을 증명하는 자료가 될 수는 없다. 북한 친일청산에 구멍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남한의 경우에는 그런 구멍 자체를 운운할 여지가 별로 없다. 친일청산이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극우세력은 장헌근 사례를 내세워 남한 내의 친일청산론을 억누르려 하지만, 이 사례는 친일청산론을 억압하는 용도보다는 친일청산론을 더욱 활성화시키는 용도로도 얼마든지 활용될 수 있다. 즉, 장헌근의 예는 남북한 전체에서 친일청산이 보다 확실히 이루어질 필요성을 증명하는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한편,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친일파인 데다가 서울 출신인 장헌근이 어떻게 이북까지 가서 고위직을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이유를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기록은 없지만, 그의 일제강점기 행적을 추적하면 어느 정도의 추정은 가능하다.

장헌근은 오랫동안 군수를 지내다가 함경북도 참여관이 됐다. 그런 뒤 중추원 참의로 올라섰다. 만약 함북 참여관 시절에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면 이런 승진이 힘들었을 수도 있다.

그가 함경도 참여관 시절에 현지 기반을 튼튼히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있다. 위의 친일 경력에서도 나타나듯이 참여관을 그만둔 뒤에도 함경북도 사람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이는 함경도 참여관 시절에 그곳에서 영향력을 구축해 놓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월북한 지 얼마 안 돼 북한 고위직에 오른 데는 친일 행위 때 쌓아놓은 기반이 밑바탕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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