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06 11:55최종 업데이트 23.10.06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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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책, 인물, 역사 등 국내외 다양한 사건과 지금의 한국 사회를 비교합니다. [편집자말]

영화 <송가황조>에서 송애령역의 양자경, 송경령역의 장만옥, 송미령역의 오군매. ⓒ 골든 하베스트 컴퍼니


"옛날 중국에 세 자매가 있었다. 한 명은 돈을 사랑했고, 한 명은 권력을 사랑했으며, 한 명은 조국을 사랑했다."

영화는 어린 시절 그네를 타는 세 자매의 화면을 배경으로 한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돈을 사랑한 여인은 당시 중국 최고의 부자 공상희(孔祥熙)와 결혼한 첫째 송애령(宋靄齡), 권력을 사랑한 여인은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蔣介石)의 부인이 된 셋째 송미령(宋美齡), 조국을 사랑한 여인은 현대 중국의 국부로 불리는 손문(孫文)의 부인 둘째 송경령(宋慶齡).


청조 말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에 이르는 격동기의 중국을 무대로 펼쳐지는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들 세 자매의 사랑과 원한, 화합과 투쟁, 결별과 재회의 드라마틱한 운명을 다룬 영화 <송가황조>(宋家皇朝) 이야기다. 1997년 홍콩에서 제작돼 국내에서도 상영된 이 영화는 인기 배우 양자경(애령 역) 장만옥(경령 역) 오군매(미령 역)가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세 자매의 아버지 송가수(宋嘉樹)는 손문의 친구이자 혁명동지로, 세 딸을 모두 미국 조지아주 웨슬리안 대학으로 유학을 보낸다. 총명하고 아름답고 야심을 품은 세 자매는 미국 유학을 거쳐 중국 최고의 재원으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영화는 당대 중국의 영웅들을 남편으로 삼은 세 자매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중국 현대사를 주도적으로 창출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애령은 남편의 사업을 번창하게 만들어 중국 정계에서 요직을 역임하게 한다. 경령은 손문의 유지를 받들어 중국공산당의 편에 서게 되고, 미령은 1943년 말 열린 루스벨트 처칠 장개석의 카이로 회담에 통역 자격으로 참석하는 등 정치적 수완을 발휘한다.

이 글의 주제가 사실 영화 이야기는 아니다. <송가황조>의 세 자매와도 인연이 얽히는 또 다른 현대사의 주역 장학량(張學良)을 소환하기 위해 길게 돌아왔다. 장학량은 누구인가. 중국 동북지방, 즉 만주의 군벌인 장작림(張作霖)의 장남으로, 요즘 말로 금수저로 태어난 미남자였다.

1928년 장작림이 죽자 그 뒤를 이은 장학량은 만주라는 드넓은 땅의 젊은 군벌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열세에 몰리게 되자 국민당의 실권자 장개석 휘하로 들어간다. 장개석은 장학량을 동북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해 홍군(공산당 군)과의 국공내전에 나서도록 한다.

장학량은 아버지 장작림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한 데다가 고향인 만주를 일본군에게 빼앗긴 터여서 반일감정이 높았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대장정을 거쳐 연안을 근거지로 동북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장학량은 홍군과의 소모전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12·12사변으로도 불리는 서안사변
 

장학량과 장개석 ⓒ 위키미디어 공용

 
1936년 10월 장개석은 동북군의 홍군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직접 서안(西安)을 방문한다. 그러나 장학량을 비롯한 동북군 장교들은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과 항전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장개석은 동북군의 요구를 듣지 않았고, 장개석과 장학량의 사이는 더욱 멀어져 갔다.

같은 해 12월 7일 장개석이 다시 서안으로 왔다. 동북군 지휘관들은 항일전을 거듭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12월 11일 밤 장학량의 동북군과 양호성(楊虎城) 장군이 이끄는 서북군은 합동 사단장 회의를 소집하고 장개석을 체포하기로 결의한다.

운명의 12월 12일 새벽, 동북군과 서북군은 서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국민당군 참모부와 장개석의 친위부대인 남의사 요원들을 구금했다. 장개석은 새벽 3시 장학량의 부하들이 숙소를 급습하자 잠옷 바람으로 도망쳤으나 야산에서 발견, 체포됐다. 12·12사변으로도 불리는 서안사변이 발발한 것이다.

거사에 성공한 직후 장학량 측은 ▲ 장개석의 남경(南京)정부를 개편하고 모든 정파를 참여시켜 구국의 공동책임을 분담케 할 것 ▲ 내전을 전면적으로 즉각 중지하고 무력 항일정책을 채택할 것 등 8개 항의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장개석이 구금되자 중국 정국이 급박하게 전개됐다. 주은래(周恩來)를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서안으로 와서 장개석 장학량을 만났고, 남경정부 대표단도 도착해 막후 협상에 나섰다. 송미령은 자신이 가야 남편을 구해올 수 있다며 역시 서안으로 달려왔다.

영화 <송가황조>에서는 장개석 석방을 둘러싼 긴박한 협상 내막은 자세히 다루지 않고 넘어갔으나 장학량과 송미령이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두 사람은 평생 서로에게 호감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찍이 상해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훗날 장학량의 가택연금 시에도 많은 편지를 주고받는 등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진다.

장학량은 장개석을 제거할 수 있었으나 결국은 풀어준다. 동북군 장교들은 장개석을 인민재판에 넘기고,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장개석의 실각이나 죽음은 또 다른 내전의 빌미가 되고 결국 일본만 이득을 본다는 게 장학량 등 온건파의 판단이었다. 송미령이 과부가 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장학량이 장개석을 죽이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일인자 야욕 보이지 않고 처벌 자처한 장학량

장개석은 8개 요구사항에 대해 문서로 확인하지 않고 12월 25일 석방돼 남경으로 귀환하게 된다. 장학량과 공산당, 남경정부 사이에 정확하게 어떤 합의가 도출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장개석은 더 이상 내전이 없다는 점을 개인적으로 보장하고, 장학량이 제공한 비행기 편으로 무사히 남경으로 돌아간 것이다.

장학량은 12·12사변이 애국 충정에서 나온 것임을 밝히며 장개석을 따라 남경으로 향한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처벌을 자처한 것이다. 12월 31일 장학량은 군사법정에서 10년 금고형과 5년간의 공민권 박탈을 선고받았으나 다음날로 장개석의 사면을 받는다.

그러나 그 이후 장학량은 사실상 장개석의 포로 신세가 되었고, 장개석 정부는 대만으로 쫓겨갈 때도 그를 데려가 가택연금에 처하는 한편, 서안사건에 대해 발언하는 것도 금지했다. 장학량이 가택연금에서 풀린 것은 그의 나이 93세 때인 1991년이었다. 실로 54년에 달하는 장구한 세월을 연금상태에서 살아간 것이다.

서안사변은 이후 중국의 진로를 크게 바꾸어 놓게 된다. 장개석은 주은래 등 공산당 대표들과 여러 차례 협상하면서 공산당과의 협력관계를 시작했고, 공동으로 항일투쟁을 벌인다는 약속을 했다. 1937년 7월 일본이 노구교 사건을 일으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이루어 일본과의 전쟁에 나섰고 이 관계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지속된다.

장학량의 거사를 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12·12사변과 국공합작을 거치면서 절대적으로 약세였던 홍군이 시간을 벌어 끝내는 국민당을 패퇴시키고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국공산당 진영에서는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하는 경향이 짙다.

반면, 국민당 등 반대편의 시각은 정반대로 다르다. 일본에 만주를 빼앗겨 영향력을 상실하자 궁지에 몰려 장개석을 감금한 것으로 한마디로 역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장학량이 일본 관동군에 저항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심지어 아편중독자였다는 비난마저 나온다. 이처럼 거사의 동기와 행위를 두고 해석이 분분한 게 사실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장학량이 장개석 제거를 통해 일인자로 올라서려는 야욕을 보이지 않고, 스스로 처벌을 자처하였다는 점이다. 적어도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거사한 것은 아니었다. 국공합작이 구국의 길이라는 소신을 관철시키고 그 대가로 자신의 행위에 책임지는 장수다운 기개를 보여준 사례라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군사 반란이 나라 구하려는 행위였다는 장관 후보자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자가 15일 오전 서울 용산구 육군회관에 마련된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며 취재기자의 곤혹스러운 질문에 눈을 감고 있다. ⓒ 유성호


이제 우리 현대사로 눈을 돌려보자. 장학량의 거사로부터 42년이 지난 1979년 12월 12일 저녁의 일이다. 서울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수사하던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을 우두머리로 한 신군부 세력이 10·26 후 계엄사령관을 맡고 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하는 과정에서 유혈 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12·12 사태로 불리다가 나중에 12·12 쿠데타로 거사 성격이 정리된 하극상 사건이었다.

공교롭게도 중국과 한국에서 똑같은 12월 12일, 군인들에 의해 벌어진 하극상 사건이었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장학량과 전두환 사이에는 천양지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의 거사는 장학량과는 달리 대의도 명분도 없는 권력 찬탈극이었을 뿐이다. 이 사건 이후 일사천리로 정권을 장악해나간 점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12·12는 이미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 성격이 정리된 만큼 굳이 자세하게 내막을 열거할 필요는 없겠다. 전두환은 죽어서도 편히 묻힐 곳조차 못 찾고 있고, 자신의 손자에 의해 죄상이 다시 까발려지고 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을 덧붙이겠는가.

그런데, 12·12쿠데타로부터 다시 44년이 지난 2023년 가을 이 땅에서 또다시 12·12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국방부 장관 후보자로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둔 육군 중장 출신 여당 국회의원이 전두환의 12·12를 "나라를 구하려 나선 것"이라고 발언했던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불법적인 군사 반란을 나라를 구하려는 행위였다고 생각하는 장관 후보자에게 국가의 안위를 맡겨도 괜찮을까.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을 항명죄로 처벌하려는 고위 관계자들의 행태는 또 어떤가. 사단장, 사령관, 국방부 장관, 대통령실의 누군가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관련된 부분을 떳떳하게 밝히고 책임지려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대의(大義)나 자기희생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사리분별 능력과 자신의 언행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당당함을 갖춘 장군감이나 장관감이 이 나라에는 없는 것일까. 어쩌다 한국이 이렇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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