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28 05:56최종 업데이트 23.07.28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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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치즈마을 입구의 모습 ⓒ 마을만들기전국네트워크


"제2의 임실치즈마을 10곳 만든다... 국비 30억 지원"

행정안전부가 올해 처음 시행하는 '생활권 단위 로컬 브랜딩 활성화 지원사업' 소개 기사엔 이런 제목이 달렸다. 임실치즈마을은 우리나라에서 첫손에 꼽히는 '로컬 브랜드'다. 그런데 임실치즈마을 주민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다.


"2012년 임실치즈마을 로컬 브랜드는 임실군의 일방적 홍보로 치즈테마파크로 오인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임실치즈마을(운영위원회)이 발간한 <임실치즈마을 소식> 8호는 앞선 기사를 소개한 뒤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대표 '로컬 브랜드 마을' 주민들은 정부·지자체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는 것. 대체 무슨 일일까.

'임실치즈마을'은 전라북도 임실군 금성리(화성·중금·금당마을)를 가리킨다. 임실역에서 10여 분 걸으면 닿는 작고 아름다운 시골 마을이다. '임실치즈테마파크'는 이 마을 앞산 너머, 차로 3분 거리에 자리하고 있는 너비 15만㎡(축구장 22개 넓이)에 달하는 공원이다. 임실군이 국비를 지원받아 2011년 말에 조성했다.

먼저 생긴 건 물론 치즈마을이다. 마을에서 진행하던 치즈 만들기 체험 등이 인기를 얻고 찾는 이들이 늘자 몇 년 뒤 임실군이 마을과 멀지 않은 곳에 치즈테마파크를 조성했다. 임실군은 아마도 더 크고 멋진 치즈마을(공원)을 만들어 더 많은 방문객이 찾아오면 임실군 전체에 좋은 일이라 여겼을 터다.

하지만 치즈테마파크가 문을 열자 임실군은 이를 알리는 데 열을 올렸고, 자연스럽게 치즈마을을 찾는 발길은 줄었다. 사정을 알 리 없는 이들은 치즈테마파크를 다녀와서는 치즈마을을 다녀왔다고 믿었다. 마을에 찾아와 임실치즈마을이 어디냐고 묻는 이들도 갈수록 늘었다. 마을 주민에겐 이 모든 게 상처로 남았다.

임실치즈마을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임실치즈협동조합을 함께 준비한 임실 청년들 ⓒ 지정환

 
임실치즈마을의 뿌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벨기에에서 온 푸른 눈의 고 지정환(디디에 세스테벤스) 신부가 부안성당을 거쳐 1964년 임실성당에 부임한 게 시작이었다. 부안에서 바다를 메워 가난한 농민들에게 무려 100만㎡에 달하는 땅을 나눠주기도 했던 지 신부는 임실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너른 평야가 펼쳐진 전북의 다른 지역과 달리 임실은 지대가 높아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는 풀이 무성한 산에서 산양을 키워 산양유를 팔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팔 곳이 마땅치 않아 버려지는 일이 잦아지자 치즈를 떠올렸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끝에 지 신부는 마침내 치즈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유럽 목장을 무작정 돌아다니며 매달린 끝에 어느 이탈리아 장인으로부터 비법 노트를 건네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치즈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가 만든 치즈는 서울 조선호텔과 명동 피자가게 등으로 팔려나갔다.

그가 처음 치즈를 만든 곳은 임실치즈마을(금성리)에서 4km 정도 떨어진 성가리다. 지금도 이곳엔 그가 치즈를 숙성하려고 임실 청년들과 함께 팠다는 굴이 남아있다. 하지만 더 이상 이 마을에선 치즈를 만들지 않는다. 그가 만든 치즈공방은 산양협동조합이 되었고, 다시 임실치즈신용협동조합을 거쳐 지금은 임실치즈농협으로 성장했다. 그러니까 그의 유산은 치즈마을이 아니라 치즈 그 자체인 셈이다.

지정환 신부와 임실치즈마을의 연결고리는 종교다. 임실역전교회(현 임실제일교회)에 부임한 젊은 목사 심상봉은 지 신부의 영향을 받아 현실 문제에 눈을 뜨게 된다. 지 신부가 그랬듯 심 목사도 금성리(임실치즈마을)의 젊은 청년들과 함께 공동체를 꾸리고 농촌의 여러 문제를 극복하고자 평생을 바치게 된다.

특히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이웃을 섬기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건강한 먹을거리를 생산해 이웃과 도시민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점을 늘 강조했다. 그 자신이 농사를 지으며 친환경 농법을 실천하기도 했다. 

심 목사의 가르침을 받은 청년들을 주축으로 마을에선 1980년대 중반 무렵부터 20여 년 가까이 여러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흩어지기를 되풀이한다. 임실치즈마을 운영위원회 이진하 위원장도 공동체 활동을 이끌었던 청년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1986년 몇몇 이웃들, 청년들과 함께 예수가족원을 시작으로, 바른농사실천농민회, 예가원 영농조합법인 등의 공동체 실험을 이어갔다. 많을 땐 13가정 24명이 참여하기도 했다.

이들은 공동체의 이름으로 토양분석센터, 한국농업경영연구소, 쌀경영연구소, 퇴비공장 등을 세워 운영하는 등 건강한 먹을거리를 기반으로 단단한 공동체를 만들려 애썼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오래 가지 못했다. 공동체에 대한 열망만으로 버티기엔 현실의 벽이 생각보다 높았다.

"심상봉 목사님의 가르침을 따라 공동체 사상과 친환경 농업의 가치를 배운 저와 송기봉 부부, 조점익이 먼저 공동체 생활에 나섰어요. 단단한 공동체를 꾸리고 이를 기반으로 공동생산과 분배를 통해 농업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시도였죠. 화학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는 유기농법으로 농산물을 생산함으로써 도시 소비자들에게 건강한 먹을거리를 공급한다는 목표도 세웠어요. 도시민들을 마을로 불러 생산 과정을 몸소 체험하도록 했는데, 이때부터 마을에선 체험 프로그램을 시작한 셈이죠."

마침 1980년대 들어 전라북도가 '복지농촌건설사업'을 벌였는데, 금성리(화성마을)가 시범마을로 뽑혔다. 임실군도 낙농업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화성마을에 처음으로 젖소 50마리가 들어왔다. 이 위원장도 이때부터 농사를 지으면서 젖소를 함께 길렀다.

금성리, 임실치즈마을로 거듭나다
 

임실치즈마을 풍경 ⓒ 임실치즈마을

 
마을에서 치즈를 만든 건 그로부터 십수 년이 더 지나서다. 처음 치즈를 만든 이는 김상철 전 숲골유가공 대표로, 두 번에 걸쳐 스위스로 낙농과 유가공 연수를 다녀온 뒤 이 마을에서 치즈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원래 이진하 위원장이 가기로 한 연수였다. 

"한국과 스위스의 교회협의회가 해마다 1명의 한국 청년을 뽑아 스위스 베른으로 낙농 연수를 보냈는데, 1994년에 김상철이 가게 됐어요. 원래는 제가 가기로 해서 몇 달에 걸쳐 아내랑도 준비를 다 해놓은 상태였는데, 심상봉 목사님이 더 젊은 사람을 보내는 게 맞겠다고 해서 기꺼이 양보했어요. 공동체의 경험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김상철 전 대표는 1994년 3월부터 1년간 스위스 베른주 알베르그라에서 낙농 연수를 받고 돌아와 젖소 7마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터지는 바람에 사료값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마침 스위스교회협의회 관계자가 마을을 찾았고, 그때 심상봉 목사가 '김상철 형제가 스위스의 앞선 목장형 유가공을 배울 수 있게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다.

이 간절한 부탁을 스위스교회협의회가 받아들이면서 김 전 대표는 1999년 다시 스위스 유가공 전문학교로 연수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낙농가로서는 처음으로 치즈와 요구르트의 생산·판매 허가를 얻어 2000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목장형 유가공 공방'인 한스유가공연구소(현 숲골유가공)를 설립한다. 목장형 유가공이란 직접 젖소를 기르고 우유를 짜서 치즈를 비롯한 유가공 제품을 생산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스유가공연구소의 뒤를 이어 2004년까지 마을엔 모두 여섯 곳의 목장형 유가공 공방이 새로 자리를 잡았다. 30여 년 전 지정환 신부가 임실에 뿌린 씨앗이 또 다른 싹을 틔운 셈이다.

농촌녹색체험마을, 치즈에 눈을 뜨다
 

임실의 목장형 유가공 공방 소개 페이지 ⓒ 이플유가공

 
한스유가공연구소가 문을 열고 3년 뒤인 2003년 금성리는 '녹색농촌체험마을'에 선정되었다. 도시민의 농촌 관광을 활성화해 농촌의 소득을 늘리려는 사업이었다. 이 사업에 이진하·조영익 위원장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느티마을'을 내세워 선정되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주요 체험 소재는 치즈가 아니라 친환경 농업이었다. 다른 체험 마을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유가공 공방을 견학하고 치즈를 곁들인 식사를 하는 것 정도였다.

마을에서 본격적으로 치즈 만들기 체험을 시작한 건 다시 몇 년이 지난 2005년 무렵이었다. 당시 김상철 한스유가공연구소 대표는 직접 짜낸 신선한 원유로 유제품을 만든다는 것을 알리려고 도시의 생활협동조합 소비자들을 공방으로 불러 치즈를 만들어 볼 수 있게 했다.

이 프로그램이 입소문을 타면서 공방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첫해인 2005년에 한 달 체험객이 1000명까지 느는가 싶더니 이듬해엔 한 해 동안 1만 명이 넘게 다녀갔다. 금성리는 이내 농촌 마을만들기 사업의 대표 성공 사례로 떠올랐다. 언론 보도도 쏟아졌다.

"마을을 찾는 사람이 늘면서 숲골유가공이 감당할 수 없게 됐어요. 체험객들도 마을에서 다른 먹을거리와 즐길거리를 찾기 시작했죠. 그래서 녹색농촌체험마을에 선정되면서 지어놓은 유기농체험관에서 식사를 팔기 시작했고, 마을 어르신들이 경운기로 방문객들을 실어 나르는 경운기 체험도 도입했어요. 마을주민이 다양하게 참여할 수 있는 더 큰 사업이 된 거죠.

2007년 10월부터는 치즈 체험을 마을이 맡기로 했어요. 그렇게 하는 게 더 낫겠다는 합의가 이뤄진 거죠. 제가 김상철 대표에게 제안했고, 김 대표가 조건 없이 받아들였어요. 서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서로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은 거죠."
 
 

임실치즈마을 치즈 만들기 체험 ⓒ 임실치즈마을

 
권봉관이 쓴 논문 <국가 주도 '마을만들기' 사업에 따른 농촌의 변화와 농민의 대응 - 전북 임실군 '치즈마을'의 경우>는 "그(김상철)가 확실한 수익이 보장될 것으로 예상되는 치즈 체험의 운영권을 치즈마을로 이양한 데는, 그동안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농민이 잘사는 농촌이라는 지향점을 공유하던 공동체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또 이런 과정을 거쳐 마을의 치즈 체험은 누구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공동자산이 되었다고도 했다. 

그 뒤로 임실치즈마을을 찾는 이들은 꾸준히 늘어 2010년엔 5만 명을 넘어서게 된다. 농림수산식품부가 주관한 '제1회 대한민국농어촌 마을대상(마을가꾸기 분야)'과 '제4회 대한민국 행복마을만들기 콘테스트(체험·소득분야)'에서도 모두 대통령상을 받았다. 

치즈테마파크 조성과 치즈마을의 쇠퇴
 

임실치즈테마파크의 모습 ⓒ 임실치즈테마파크

 
2012년 임실치즈테마파크가 문을 열면서부터 마을을 찾는 이들은 빠르게 줄었다. 테마파크가 조성된 곳은 성수면 도인리다. 이진하 위원장은 체험장만큼은 그 마을(도인리)에 줘야 한다고 임실군을 설득했다. 주민들이 땅을 빼앗기고 나면 먹고살 일이 막막할까 봐 걱정스러웠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라에서 하는 일을 막을 도리가 없었죠. 새로운 기회가 열리길 기대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테마파크에서는 체험 프로그램은 하지 말고 '지정환 공동체 학교'를 만들어서 사람을 키우자고 제안했어요. 멀리 내다보면서 사람을 키워야 마을도, 지역도 오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봤죠. 결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임실군이 재단법인을 만들어 파크를 운영하다가 지금은 민간에 위탁을 맡겼어요. 기대했던 수익이 나질 않은 거죠. 그러니까 지금은 군이 홍보를 하면 할수록 개인들이 돈을 버는 구조예요. 사람들이 임실을 많이 찾는다고 하지만 정작 마을주민이 어렵게 일군 치즈마을은 잊히고, 수익도 엉뚱한 곳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우리 마을에선 열심히 돈을 벌어 낸 세금으로 임실군이 테마파크 직원에게 더 많은 월급을 준다는 쓴소리도 나와요."


심순섭이 쓴 논문 <내생적 발전 차원의 농촌마을 공동체 지속성 연구 - 임실치즈마을을 사례로>는 "(테마파크는) 치즈마을을 등에 업은 형태로 자리했는데 이는 실제로 알려진 치즈마을의 명성을 테마파크가 이용하는 형국이 되었다"고 꼬집었다. 치즈테마파크 방문객 수는 2014년에 치즈마을을 앞지르더니 그 뒤로는 차이가 걷잡을 수 없이 벌어졌다.

"가만히 돌아보니 우리도 잘못한 게 있어요. 테마파크와 우리 마을이 무엇이 다른지를 더 고민해야 했어요. 달라야 같이 살 수 있는데, 우린 따라가려고만 했어요. 임실군도 상생을 내세우면서 파크의 부족한 부분을 마을에 집어넣으려고 했을 뿐이에요. 가령, 주차장 같은 것들.

우리 마을은 농촌다움을 지켜가면서 주민의 삶을 근간으로 테마파크에서 경험할 수 없는 무언가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했어요. 치즈마을 주민의 삶과 치즈마을만이 가지고 있는 농촌 자원으로 도시민으로 하여금 자연의 순리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었어요. 우리 나름대로는 '도시민과 함께 자연의 순리를 경험하는 학습활동'으로 정의했죠."


임실치즈마을은 앞으로 행안부 로컬 브랜딩 사업에 선정된 팀들을 마을로 불러 교육과 공정여행을 진행할 생각이다. 이 위원장은 그들이 기대하는 것과 실제 교육이 다를 수도 있다고 했다. '6개월 만에 성공하는 로컬 브랜드 만들기' 같은 건 가르치지 않겠단 뜻이다. 

"이름을 멋들어지게 정한다고 브랜드가 되는 건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로컬 브랜드가 되려면 지역민의 삶이 들어가야 해요. 사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따라 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피눈물 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또 30년이 넘는 세월을 한 번에 따라잡으려 해서도 안 돼요. 우리한테는 실패가 없어요. 실수는 늘 존재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쳤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만한 브랜드를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여기까지 오는 데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마을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자는 대명제가 있었을 뿐이죠. 그러니 계획을 잘 세운다고 로컬 브랜드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에요."


어려움을 겪고 있긴 하지만 임실치즈마을의 뿌리는 긴 공동체의 역사만큼이나 깊고 단단하다. 지금까지 쌓아온 마을의 자산도 30억 원에 달한다. 운영위원회는 마을은행의 역할을 맡아 사업을 하려는 주민에게 사업비를 지원해 주기도 하고 마을 청소년들에게 장학금도 준다.

대학 입학 장학금을 받은 33명 가운데 11명이 대학을 졸업하고 마을로 돌아왔다. 이들을 비롯해 마을로 돌아온 운영위원회 회원들의 자녀는 모두 23명에 달하고, 이 가운데 10명은 결혼해 13명의 아이를 낳았다. 마을을 지켜갈 다음 세대 50여 명이 마을에 살고 있는 셈이다. 이진하 위원장은 곧 마을에 있는 '지정환 공동체 학교'를 법인화하고 대학과 손을 맞잡고 마을과 지역을 지킬 젊은 인재를 길러내는 일에 더 힘을 쏟을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로컬 브랜드'가 주목받는 시대, '로컬'과 '브랜드' 둘 모두를 살릴 길을 찾아야 할 때다. '브랜드'를 얻으려다 '로컬'(마을)을 잃는 건 어쩌면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일일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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