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부터 아침을 시작하는 루틴이 생겼다. 지난 12일 가수 박상민의 공연으로 시작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  Crazy for you 상영회'를 유튜브로 보는 일이다. 25년 전 목소리 그대로 SBS <슬램덩크> 오프닝인 '너에게로 가는 길'을 열창하는 박상민, 스크린에 띄운 가사 없이도 떼창을 할 수 있는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이 무기력한 아침에 활기를 불어넣고 현장에 갈 수 없던 아쉬움을 달랜다.

농구장의 애국가, 농구장의 찬송가 '너에게로 가는 길'을 뜯어보자. 첫 문장은 "뜨거운 코트를 가르며 너에게 가고 있어"이다. 화자는 당연히 강백호일 거다. 그럼 노래의 청자이자 강백호가 달려갈 '너'는 누구일까. 채소연을 떠올리기 쉽지만 다음 문장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우리 함께한 맹세"에 "언제까지나 나를 믿고 사랑할 네가 있잖아"라니. 강백호는 소연과 사귀지도 않았고 완결이 될 때까지 그녀에게 직접적인 고백을 하지 않는다.

만화 <슬램덩크>를 여는 문장은 또래 친구들과 쌈박질이나 하고 다니던 강백호에게 소연이 건넨 "농구 좋아하세요"이다. 한눈에 반한 소연에게 잘 보이고 싶은 강백호는 '아주 좋아한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고 농구부까지 입단한다. 이후의 내용은 마음을 둘 데 없던 문제아가 몰입하고 열중할 수 있는 어떤 것. 즉, 농구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너에게로 가는 길'의 '너'의 청자. '너'를 위해 미치는(Crazy for you) 일도 결국 농구일 수밖에 없다. 수많은 명대사가 있지만 <슬램덩크>의 세계를 관통하는 대사도 결국 한 문장으로 수렴한다. 바로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고요"이다.

산왕공고전에서 등 부상을 당한 강백호가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소연이를 붙잡고 하는 이 대사는 공개적인 고백이 아니라 문제아에서 진짜 농구를 사랑하게 된 바스켓맨으로 거듭났다는 성장의 증거다. 원작 팬들의 아쉬움도 이해 가지만 북산과 산왕공고의 대결을 다룬 극장판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이 대사를 지워버린 건 당연한 수순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인공은 사랑할 게 없어 방황하던 강백호가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고 싶지만 벽에 부딪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송태섭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틸컷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틸컷 ⓒ (주)NEW

 
북산의 포인트 가드, 뚫는 남자 송태섭

송태섭의 포지션은 '코트 위의 사령관'으로 불리는 포인트 가드다. 우리 코트에서부터 볼을 운반해 상대 코트에서 득점을 노리는 동료들에게 패스를 뿌려주는 게 포인트 가드의 역할이다. 채치수의 호쾌한 고릴라 덩크, 정대만의 폭발적인 3점슛, 게임을 지배하는 강백호의 리바운드, 서태웅의 화려한 개인 플레이도 송태섭의 안정적인 볼배급이 없다면 이뤄질 수 없다. 산왕공고도 이를 알고 송태섭이 공을 소유했을 때 강한 압박을 걸어 북산의 공격을 원천 저지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도 포지션마다 최고의 멤버가 모인 산왕공고를 상대하는 북산만큼이나 벅찬 상황이다. 원작의 이름값을 해야 한다는 압박은 당연하다. 20권이 넘는 장편의 서사를 2시간으로 압축해야 하는 과제도 있다.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이를 농구적으로 풀어간다. 노마크 찬스의 동료를 발견하고 게임을 풀어가는 재능이 중요한 포인트 가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가 있다.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거나 과거에 발목 잡힌 북산 선수들과 송태섭의 접점을 보여주며 마치 패스를 뿌리듯 멤버들과 손발을 맞춰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포지션의 특징으로 동료들과의 관계를 그리는 스케치를 한다면 원작에서 다뤄지지 않은 송태섭의 과거를 통해 생동감 넘치는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송태섭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는다. 촉망받는 농구선수이자 굳게 믿고 의지하던 형도 뜻밖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형을 떠올리게 하는 농구를 그만두지 않아서일까. 엄마는 송태섭에게 쉽게 정을 주지 못한다. 고향을 떠나온 도시에는 길거리 농구를 할 친구도 없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틸컷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틸컷 ⓒ (주)NEW

 
정대만 패거리에게 집단린치를 당하는 상황에도 당당해 보이는 송태섭이지만 형 대신 농구를 한다는 부담감. 철들지 않아도 되는 또래들과 달리 집의 하나뿐인 남자로 아버지이자 형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 항상 자신보다 키도 크고 실력도 뛰어난 전국구 스타 플레이어들과 계속 맞붙는 상황. 사실 모든 게 벅차다. 이한나를 짝사랑하지만 잘 풀리지 않는 애달픈 마음까지도. 송태섭부터 볼이 차단되니 북산의 득점도 멈추고 결국 점수 차는 결국 20점까지 벌어진다.

부담감과 책임감에 짓눌리고 존 프레스에 막힌 송태섭에게 이한나는 이렇게 외친다. "뚫어 송태섭!" 작은 키로 스타플레이어들과 대결해 끝내 북산을 전국대회로 진출시킨 포인트 가드. 계속 차여도 고백을 멈추지 않는 사랑꾼. '형 대신 살아남은 게 나라서 죄송하다'는 말 대신 '농구를 할 수 있게 허락해 줘서 고맙다'라고 엄마에게 편지를 남긴 사람. 에둘러 피해 가는 대신 자신을 믿고 장벽들을 하나하나 정면 돌파해 왔던 온 송태섭은 기어이 존 프레스를 뚫고 동료들에게 패스를 연결한다.

상대적으로 속도감을 표현하기 어려운 만화책이란 장르의 특성 탓에 활약이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모션캡처와 3D를 활용한 이번 작품에서 송태섭의 장기인 스피드를 살리는 연출적 특징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한층 더 몰입감 있게 만든다. 이한나와 송태섭의 첫 만남, 트레이드 마크인 피어싱 귀걸이를 하게 된 사연을 다룬 외전의 제목은 다. Pierce가 '뚫는다'는 뜻인 건 결코 우연만은 아닐 거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틸컷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틸컷 ⓒ (주)NEW

 
이노우에가 25년 만에 전하는 메시지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또 다른 연출적 특징은 빈번한 플래시백의 사용이다. 경기에 몰입하려면 나오는 플래시백 때문에 영화의 리듬이 깨진다는 비판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존재 자체가 플래시백이다. 처음 <슬램덩크>를 접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다수 관객은 <슬램덩크>와 함께 성장했다. 묵음 처리된 대사를 따라 하는 건 일도 아니다. 많은 관객은 다음에 어떤 선수가 패스를 받을지, 어떻게 골을 넣을지, 벤치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알지만 그러면서도 조마조마해하며 북산을 응원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감동은 단순히 애니메이션화된 적 없는 산왕공고전을 그려낸 게 아니다. 인생의 어떤 고비마다 <슬램덩크>에서 사용된 명언들에 자신을 덧입힌 기억과 경험이 플래시백처럼 함께 재생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감상평의 대다수는 <슬램덩크>를 처음 읽었던 당시의 상황과 그에 담긴 추억을 함께 써 내려간다. 그리고 이 고백은 대체로 영화에 대한 평가보다 더 길다.

강백호의 일본 이름은 벚꽃과 꽃이 지는 거리라는 뜻이 '사쿠라기 하나미치'다. 4개월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온몸을 불태워 농구 풋내기에서 바스켓맨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는 만개한 벚꽃 같은 화려함과 꽃이 진 거리 같은 서정이 공존한다. 모두가 지나온 학창 시절의 뜨거움과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처럼. 그러나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다. 이노우에 작가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연재할 때 나는 20대였기 때문에 고등학생의 관점에서 더 잘 그릴 수 있었고, 그것밖에 몰랐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시야가 넓어졌고 그리고 싶은 범위도 넓어졌다(...) 원작에서 그린 가치관은 굉장히 심플한 것이지만, 지금의 나 자신이 관련된 이상, 원작을 그리고 난 후에 알게 된 것 '가치관은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가 있어도 그 사람 나름의 답이 있다면 괜찮다'라는 관점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송태섭의 일본 이름은 궁궐의 용감한 사나이라는 뜻의 '미야기 료타'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하지만 그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현재의 자신보다 커다란 벽과 부딪혀온 송태섭을 성장시킨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뚫고자 하는 마음이었던 것처럼.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송태섭의 서사가 강조된 이유도, 그깟 공놀이에 다시 열광하고 감동하는 까닭도. 25년간 각자의 가치관으로 벽을 뚫으며 어느덧 어른이 된 우리의 세월이 담겨있어서 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영화 이노우에 다케히코 더 퍼스트 슬램덩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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