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16 12:13최종 업데이트 23.01.16 12:13
  • 본문듣기

기억에도 없던 엽서가 1년 만에 나에게 도착했다. ⓒ 신필규


며칠 전 생각지도 못한 엽서를 받았다. 발신인은 바로 나였다. 2022년 1월의 나. 작년 1월 강원도 동해시로 잠시 휴가를 다녀왔다. 동해시에서는 추억을 담은 엽서를 적어 우체통에 넣으면 1년 후에 우편으로 전달해주는 '행복 우체통'이라는 관광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었고 묵호등대를 보러 간 날 그 우체통을 발견했다.

휴가지가 주는 감상에 젖어서인지 평소라면 쓰지 않을 엽서를 썼고 우체통에 넣었다. 그리고 잊었다. 인상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찰나였다. 휴가가 끝나고 나는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고 떠올리지 않는 일은 기억의 저편으로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러니 엽서를 받았을 때 얼마나 놀랐을까. 작년의 나는 이런 메시지를 적었다.


"너는 포기하지 않기로 했고 막상 살아보니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았어, 아마 지금도 그럴 거야."

엽서를 읽고 나니 당시의 마음이 기억났다. 2020년은 힘든 시기였다. 개인적인 사고로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기 시작했다. 마음의 상처는 단기간에 치유될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상을 살면서도 한편으로는 회복을 위한 끊임없는 분투를 해야만 했다. 이어진 2021년에도 나아졌다 무너졌다 잠시 안정을 찾는 일은 계속 반복되었다.

2022년 새해를 마주한 나는 솔직히 지쳐있었다. 묵호등대에 가기 전 들른 식당에서 낮술을 마셨는데 사장님이 왜 자꾸 내 테이블을 서성이며 말을 걸었는지 알 것 같았다(표정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남길 수 있는 덕담은 포기하지 않기로 한 건 잘한 일이고 아마 2022년에는 더 나아질 것이란 말뿐이었다.
   
버틸 수 있게 해주었던 춤

사람은 간사한 구석이 있다. 작년 한 해 나는 원하던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아팠던 기억과는 멀어질 수 있었다. 그 시기는 빠른 속도로 아득해졌다. 엽서를 받고 나서야 당시의 내가 많이 힘들었다는 걸 깨달을 만큼. 요즘은 병원에 가서도 일상적인 고민을 더 많이 늘어놓는다.

힘든 시기가 다시 떠오르니 어떻게 버텼는지도 생각하게 되었다. 우선은 사람들이 있었다. 고마운 사람들. 세심하게 나를 보살피며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래서 허튼 생각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려준 사람들. 주 3일 아침마다 가던 수영도 도움이 되었다. 고요한 물속에서 숨이 차오를 때까지 발차기를 하면 거기에는 물과 나밖에 없었다. 서러움도 노여움도 사라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다소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춤이었다.

힘들었던 시기에 춤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내키는 대로였다면 사실은 없을 일이었다.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와중에 신청했던 수업의 시작일이 다가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와중에 춤이라니 수강을 취소하고 싶었다. 하지만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나를 지켜보는 친구들과 동료들의 걱정은 이미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이들 중 한 사람이 함께 수업을 들을 예정이기도 했다.

내가 수업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친구는 또 얼마나 걱정할지 마음이 쓰였다. 누구도 만나지 않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마음을 억누르고 망원동에 있는 연습실의 문을 열었다. 춤과 그리고 춤을 추는 사람들과의 본격적인 첫 만남이었다.

마음을 회복하는 과정
 

자료사진 ⓒ 픽사베이


이렇게나 마음이 우울하고 아픈데 흥겨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게 과연 괜찮을지 의심했다. 마음은 우는 데 몸은 감정과 반대로 움직이다 더 우울해지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그건 춤에 대한 다소 단순한 생각이었다. 춤을 추는 행위는 그보다는 조금 더 복잡했다.

모든 노래에는 전하려는 메시지와 정서가 있다. 춤은 이를 몸으로 표현하는 행위다. 가령 당당함과 자신감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가슴을 활짝 펴고 날카로운 보폭으로 걷거나 혹은 손으로 왕관을 만들어 머리에 씌우기도 한다. 환희와 즐거움은 빠른 발걸음과 손으로 북을 재빨리 두드리는 안무로 완성된다. 해방감을 보여주기 위해 팔을 공중으로 던지거나 여유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고개를 살짝 까닥하는 동작을 취하기도 한다. 

표현하는 것과 단순히 동작을 따라 하는 건 다른 일이다. 춤은 명백히 전자다. 노래와 안무가 가진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를 먼저 수용하는 일이 필요하다. 수용해야만 그걸 표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더 이상 내 것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을 느껴보고 태도를 표현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가령 강한 수치심과 모멸감으로 시름하는 사람은 자신감과 당당함이란 무엇인지 아득할 때가 있다. 우울함으로 가라앉은 사람은 행복한 마음이 멀게만 느껴진다. 스스로가 비참하고 더럽혀졌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여전히 아름다운 사람임을 상상할 수 없다. 춤을 배우는 것은 멜로디와 동작, 거기에 녹아든 정서를 표현하는 것을 통해 평소라면 느끼지 못했을 마음과 태도를 다시금 수용하고 익숙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즐겁고 행복하게 이겨낼 수 있다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았던 건 아니다. 예상과는 다르게 춤을 추니 기분이 나아졌고 그냥 몸을 움직이니 마음이 힘든 것도 잠시 잊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춤을 배우고 다양한 노래와 안무가 가진 각기 다른 정서들을 표현해보면서 깨달았다. 춤을 추는 건 다시금 충만하고 건강한 여러 가지의 감정에 익숙해지는 연습임을, 부정적인 감정으로 침잠한 몸과 마음을 환기시키는 일임을 말이다.

내게 춤추기는 상처 입고 쓰러진 마음을 재활하는 과정이었다. 다시금 익숙한 고통과 기억, 이들이 내게 주는 수치심과 모멸이 다가오면 운동화를 신고 연습실로 가서 이에 맞설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곤 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건 마음을 지키는 투쟁과도 같다.

세상에는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처지가 비슷해도 조건에 따라 누군가는 더 힘겹게 삶을 버틸지도 모른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충격과 고통에 완전히 압도된 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혹은 그냥 이 세상 자체가 너무 끔찍해서 슬픔에 잠긴 사람도 있겠다. 이런 처지에 놓이면 세상의 아름답고 행복한 감정들이 사치는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소화시키지도 못할 기름진 음식처럼 여겨진다.

나도 마찬가지로 그랬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하건대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신은 그런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자격과 능력이 있다. 그래야만 마음을 더 잘 회복하거나 건강하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이는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이며 놀랍게도 그 후에는 원하는 목표를 위해 분투해볼 수도 있다.

끔찍한 경험, 일상 속의 억압 혹은 부조리한 세상 등 마주한 것이 무엇이든 내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잘 맞설 수 있다. 나에게는 춤이 이걸 가능하게 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책 <젠더와 민족>에서 읽었던 춤에 대한 멋진 문장을 인용하고자 한다.
 
'정의대로라면 우리가 하기 위해 착수한 일들을 결코 완수할 수 없겠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투쟁의 와중에도 어떻게 즐겁게 지낼 것인가! 하는 문제를 포함하여, 우리의 삶을 어떻게 지탱하고 가끔은 축하도 할 수 있을까이다. 엠마 골드만이 말했듯, "내가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출 수 없다면, 그것은 나의 혁명이 아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