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17 19:07최종 업데이트 22.12.17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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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라는 음료가 조선에 소개된 것은 1852년이었고, 커피가 조선에 들어온 것은 1861년이었다. 프랑스 선교사들과 주변 조선인들이 커피를 마셨다. 1866년까지였다. 이해에 있었던 병인박해로 베르뇌 신부 등 9명의 프랑스 신부들이 순교를 당한 이후 10년 이상 조선 땅에 서양인들은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이 땅에서 커피 향기는 물론 커피 이야기조차 사라졌다.

이 땅에서 다시 커피에 관한 기록이 등장한 것은 개항 이후였다. 일본과의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체결 후 수신사라는 명칭의 외교사절이 일본에 파견되었다. 1876년의 제1차 수신사에 이어 1880년에는 김홍집을 대표로 하는 제2차 수신사가 파견되었다.


김홍집이 주일청국 공사관의 참찬관이었던 황준헌으로부터 미국과의 수교 제안을 받은 것이 이때였다. 일본 방문에서 돌아온 김홍집은 1881년에 일본 문물을 시찰하기 위한 비밀 시찰단을 보냈다. 신사유람단이라고 알려진 62명 시찰단은 3개월간 체류하며 분야별 조사 활동을 벌인 후 귀국하였다.

김홍집 등의 노력으로 1882년 5월 제물포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서양과의 첫 조약이었고 김홍집이 부대신으로 참여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미국의 특명 전권 대사 루시어스 푸트가 조선에 부임하였다. 푸트의 제안에 따라 민영익을 대표로 하는 외교사절단 보빙사가 미국에 파견된 것은 1883년 7월 15일이었다.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고영철, 변수, 현홍택, 최경석 등 11명으로 구성되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바로 그 사람

중간 기착지 일본에서 퍼시벌 로웰이란 인물이 보빙사의 서기관 겸 고문이라는 관직을 받아 합류하게 된다. 미국 여행에는 안내자가 필요하다는 주일 미국 공사의 제안을 조선이 수용한 결과였다.

로웰은 1876년에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후 6년 정도 가업이었던 면직물 공장 경영에 참여했다. 전공이었던 수학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1882년 우연히 듣게 된 일본에 대한 강연에 감명을 받고 이듬해 봄 일본 여행길에 올랐다. 일본 체류 중 보빙사 안내 부탁을 받게 된 것이었다.

1883년 8월 15일 출발하여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향했다. 이 열차 안에서 가우처여자대학 존 가우처 총장을 만난 것이 이듬해 선교사 아펜젤러의 조선 파견으로 이어졌다. 11월까지 3개월 동안 보빙사를 수행한 후 일본으로 귀환한 로웰이 고종의 초청으로 보빙사 일행과 함께 조선에 도착한 것이 12월 크리스마스 직전이었다.

도착 직후인 12월 20일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이 신비한 나라에 대해 공부를 하고 싶다는 의욕을 표현하였다. 조선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열심히 사진을 찍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진, 고종 황제의 사진이 로웰의 작품이다.

로웰은 한양에 머무는 동안 고종의 배려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1935년 퍼시벌 로웰의 한 살 아래 동생으로 1909년부터 1933년까지 하버드대학교 총장을 지냈던 A. 로렌스 로웰(A. Lawrence Lowell)이 펴낸 퍼시벌 로웰 전기(Biography of Percival Lowell)를 보면 한양에 머무는 동안 최상의 대우를 받았다. 자신이 방문했던 고관들의 집보다 좋은 집에서 머물렀고, 고종은 그를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게 보살폈다. 자신이 마치 조선 정부의 친구(a friend of the government)처럼 느낄 정도였다.

로웰은 한양에 머문 지 한달 쯤 지난 1884년 1월 어느 추운 날 경기도 관찰사의 초청으로 서대문 밖 언덕에 있는 관찰사의 별장을 방문하였다. 당시 경기도 관찰사는 김홍집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얼어붙은 강 위를 걸은 후 로웰은 다시 별장으로 올라가 커피를 마셨다. 잠자는 물결(House of the Sleeping Waves)이라는 뜻을 지닌 집에 올라가서 당시 조선의 신상품이었던 후식-커피를 마셨다.

이런 내용은 로웰이 극동 체류를 마치고 귀국한 후 1885년에 하버드대학 출판부에서 자신의 관찰과 경험을 토대로 쓴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 코리아 스케치>(Chosŏn: the Land of Morning Calm: a Sketch of Korea)에 나온다. 프랑스인 베르뇌 신부에 이어 기록으로 남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커피를 마신 외국인이다.

로웰이 커피를 최신 상품을 의미하는 "latest nouveauté"라고 표현하였다는 것이 흥미롭다. 로웰을 대접하였던 김홍집이나 그의 수행원 누군가가 커피를 그렇게 표현했든지 아니면 1883년 5월 조선에 입국하여 재임 중이던 푸트 공사나 주변 외교관 중에 누군가 로웰에게 커피를 대접하며 그렇게 설명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김홍집이 로웰에게 커피를 후식으로 제공하였다는 것은 김홍집이 접대용으로 커피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김홍집은 이미 1880년 5월부터 3개월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었고, 방문 목적이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도 커피는 서양에서 전해진 새로운 문물이었다. 아니면 보빙사 일행이 귀국하며 실세였던 김홍집에게 커피를 선물하였을 수도 있다.
 

1904년 J.E. 퍼디가 보스턴에서 촬영한 퍼시벌 로웰 ⓒ 위키피디아 퍼블릭 도메인

 

조선에서 커피를 마신 서양인으로 묄렌도르프를 빼놓을 수 없다. 프로이센 출신으로 중국에 입국하여 세관 업무 등을 하던 그는 청나라 실세 리홍장의 눈에 띄었다. 리홍장의 추천으로 묄렌도르프가 조선에 입국한 것은 1882년이었다. 입국 얼마 후 조선 정부로부터 외무협판의 직을 받아 주로 조선의 해관업무, 즉 통상과 무역 업무를 총괄하였다.

1884년 3월 17일 조선 주재 영국 부영사로 임명된 윌리엄 칼스(William R. Carles)가 같은 해 4월 제물포로 입국하였다. 한양에 도착한 칼스 일행은 자신을 안내한 패터슨의 지인인 묄렌도르프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칼스는 박동(수송동) 소재 묄렌도르프의 집에서 "감사하게도 목욕을 하고 따듯한 커피를 마시는 호사를 누렸다." 칼스가 자신의 조선 방문 경험을 담아 출판한 <라이프 인 코리아>(Life in Corea)(1888)에서 기록한 내용이다.

이 기록을 보면 중국에서 10년 이상 체류하였던 묄렌도르프는 조선에 입국하며 커피를 가져와서 마셨고, 이를 접대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묄렌도르프는 1885년까지 조선 정부를 위해 일했다. 그러나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는 그의 태도가 문제가 되어 청나라와 일본의 불만을 샀고, 결국 해임되어 청나라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미국 해군 군의관 조지 우즈(George Woods)는 군함 주니아타호를 타고 1884년 3월 서울에 도착하였고, 3월 28일 일기에서 머물고 있던 정동 미국 공사관에서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을 남겼다.

가배에서 커피로

조선의 신문에 커피 소식이 등장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1883년 10월에 창간된 조선 최초의 근대 신문 <한성순보> 1884년 2월 17일 자에는 '태서의 운수론'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태서는 서양을 의미한다. 서양 여러 나라에서 운수의 발달로 인해 물품과 사람의 왕래와 교류가 왕성하게 되었고, 이것이 부국의 원천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이런 활발한 교류의 사례를 열거하는 가운데 서인도제도의 커피를 소개하고 있다.

<한성순보>에서 커피의 한자 표기는 가배(珈琲)였다. <한성순보>는 3월 27일 자에서 이탈리아가 시칠리섬에 커피나무를 시험 재배하였다는 소식을 전하며 커피를 가배(咖啡)로 표기하였다. 5월 25일 자에서 미국의 수출입 동향을 소개하며 수입품 커피를 언급하였는데 역시 가배(咖啡)로 표기하였다.
 

구한말을 배경으로 하는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극중 주인공 유진초이가 가배를 들고 있다. ⓒ tvN

 
커피는 1852년 <벽위신편>에서 가비(加非)로 표기한 것이 출발이었고, 이어서 1857년 <지구전요>에서는 가비(加非)와 함께 가비(架非)라는 표기가 등장하였다. 이후 다양한 한자 표기를 보이다가 <독립신문>에서 한글로 카피차가 등장하였다. 이후 <대한매일신보> 1909년 7월 18일 자 등에서 '카피'로 표기한 것이 발전하여 현재의 커피로 정착되었다.

이런 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조선의 커피 역사와 관련된 사실은 몇 가지가 있다. 개항과 함께 조선에 커피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은 1880년대 초반이었고, 그 루트는 일본과 중국이었다. 그리고 전달자들은 미국인, 독일인, 영국인 등 서양인들이었다. 여러 가지 한자 표기를 거쳐 영어 발음 'coffee'에 가까운 '카피'라는 표기를 정착시킨 것은 <독립신문>이었다. 중국식 '카페이'나 일본식 '고히', 한자음 '가배'가 아니라 '커피'가 탄생했다. 순한글 <독립신문>은 커피의 명칭 독립에도 이렇게 기여하였다.

(커피히스토리 채널 운영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 푸른역사.
김시현·윤여태(2021).개화기 한국커피역사 이야기. 피아리스.
A. Lawrence Lowell(1935). Biography of Percival Lowell.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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