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겨울에 만나>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겨울에 만나>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01.
누군가의 존재를 모두 지워내는 데는 얼마나의 시간이 필요할까? 아니, 자신에게 남겨진 타인의 흔적을 모두 지워낸다는 게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 나는 조금 회의적이다. 우리가 겨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흔적의 무게를 최대한 털어내는 일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자신에게 남겨진 삶을 다시 걸어가는 것이다. 이따금씩 그 기억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쑥하고 고개를 내미는 것은 역시 우리의 신체 어딘가에 가느다랗게 매달려 있던 그 흔적들이 가벼운 먼지처럼 떠오르며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엇은 잊는다는 것은 지금 당장 떠올리는 기억 속 공간으로부터 잠시 모습을 감추도록 하는 것일 뿐 그 사실이 없었던 때의 기억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영화 <겨울에 만나>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만 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반대로 말하면, 그의 기억 속에 놓인 떠나간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기억을 아직 모두 잊어내지 못한 사람이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도시를 찾는 과정. 이를 통해 죽음이라는 단어의 현재 상태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모습이 영화 전체를 통해 그려진다. 이 작품을 연출한 이승찬 감독은 상실과 관련한 경험을 통해 떠오른 하나의 질문, '이러한 경험을 어떻게 지나야 하는가?'에서 이 영화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완성된 이야기를 단편으로 먼저 제작했고, 이번 작품을 통해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를 완성한 것이다.

혜원(박가영 분)은 1년 전 동생 지원(권다함 분)을 떠나보냈다. 바다에서 누군가를 구하려다 죽었다고 한다. 이만하면 그 기억을 조금은 떨쳐낼 법도 하지만 아직 동생의 기억에서 쉽게 멀어지지 못한다. 그의 유품을 정리하는 일도 미뤄둔 채다. 지원이 다니던 회사에서 물건을 정리해 달라는 연락이 계속해 걸려오지만 그냥 전부 버려달라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그 시간을 유예하기만 한다. 한 가지 다행인 일은 혜원의 곁에 남자 친구 재훈(이한주 분)이 있다는 사실이다. 혜원이 동생의 장례식날을 떠올리며 그가 다니던 직장이 있는 군산으로 향하는 날, 영화는 다시 시작된다.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겨울에 만나>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겨울에 만나>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02.
영화의 중심에는 당연하게도 혜원이 놓여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혜원이라는 인물 자체보다는 혜원이 느끼는 감정에 가깝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난 후라 격정적인 감정을 마주하게 되거나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을 관통하는 경험은 아니지만 기저에 계속해서 흐르고 있던 감정이 흐릿함과 선명함 사이에서 오고 가는 분위기가 영화 전체를 통해 전달된다.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는 생각보다 자신의 많은 부분을 혜원에게 내어준다. 이 영화가 흑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최소한의 배경음을 활용하며 때때로 사운드를 배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정확히 매듭지어지지 않은 듯한 신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채로 하나의 영상을 채우고 있는 것도 모두 그에 해당된다. 나는 이러한 것들이 아직 해소되지 못한 슬픔과 불안을 영화의 구조적인 측면에까지 이끌어내 (영화의) 온몸으로 표현하고자 의도한 것이라 생각한다. 상실 이후 부재하는 존재에 대한 갈피 잃은 마음을 영상 전체를 통해 그려내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과거로 향하고 있는 극의 순서 또한 마찬가지다. 현실의 집으로부터 동생의 장례식장으로, 군산에서 하루 더 묵기 위해 머물게 된 여관에서 동생의 공장으로, 또 커피를 마시는 현재의 장면에서 동생이 자취하는 공간에 갔던 날의 기억으로까지 영화는 많은 부분을 과거 시점으로의 회상적 전환을 통해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마치 군산이라는 도시의 곳곳을 둘러보던 혜원이 동생의 공간에 들어와 밀어두었던 그와의 추억들을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꺼내 보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누군가 함께했던 공간, 누군가 머물렀던 공간, 그런 모든 공간은 그 대상에 대한 기억을 훨씬 더 깊이 불러내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03.
영화가 자신의 전부를 내어 혜원의 마음을 대신 전달하고자 하는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지원이라는 존재가 그녀가 있는 힘껏 끌어안고자 했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동생이라는 혈육의 측면에서 이해되는 부분도 있지만 그것을 벗어난 지점에서 해석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이 영화에서 끌어안고 밀어내는, 관계 사이의 장력은 중요한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굳이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자면 '이해'의 측면에 가깝게 여겨진다. 가령 끌어안고자 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고자 하는 측면이 있고, 밀어내고자 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반대로 이해를 받고자 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혜원과 그의 남자 친구인 재훈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혜원에게 있어 재훈은 밀어내는 존재이고, 재훈은 그런 혜원을 끊임없이 품고자 하는 인물인데, 반대로 말하면 혜원은 재훈에게 이해받고 싶어 하고 재훈은 그런 혜원을 이해하고자 한다. 직전에 언급했던 혜원과 동생 지원 역시 마찬가지. 혜원은 지원을 한없이 보살피고자 했고, 지원은 그런 혜원을 밀어내고자 한다. 문제는 이 관계의 장력 구조가 서로 암묵의 합의, 혹은 일방적인 이해가 가능할 때는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해를 받고 싶지 않아 밀어내는 동생을 알지 못했던 누나와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이해를 구해주기를 바랐던 누나를 알지 못했던 동생. 혜원과 지원의 관계는 그래서 부서지고 만다. 두 사람의 관계가 영원히 끊어질 줄 모르고, 그 관계의 마지막 순간에. 이 영화가 자신의 전부를 혜원에게 내어주는 두 번째 이유다. 떠난 사람은 말이 없다지만, 혼자 남아 그 순간을 영원히 되뇌이게 될 이의 마음은 어떤 표현으로 그려내야 전부를 보여줬다 말할 수 있을까.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겨울에 만나>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겨울에 만나>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04.
군산에서 혜원이 만나게 되는 인물은 세 사람이다.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뒤따라 내려온 재훈과 동생 지원이 생전에 만나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유진(유시형 분), 그리고 이제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지원. 혜원은 비선형적으로 분절된 극의 위치에 따라 세 사람과 개별적으로 만나 시간을 보내고 (과거를 추억하고) 각각의 이야기를 쌓는다. 이들이 서로를 비춰내는 모습은 마치 조각 같은 느낌이다. 서로 이어지지 못하고 흩어져 있는 신(Scene)들이 그렇듯 이들 역시 한 대상의 시간을 나눠 가지고 있는 느낌이랄까. 예를 들어 이제 존재하지 않는 지원의 시간을 누나 혜원과 친구 유진이 따로 간직하고 있는 식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모습은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던 것 같다. 수동이 아닌 자동의 어법으로 하자면, 우리의 시간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눠 맡겨두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니까 영화 속 만남은 한 대상의 시간을 한 곳에 모으는 행위이자, 그 대상의 존재를 더욱 또렷하게 만드는 작업이 된다.

한편으로는 극 중 인물인 혜원과 재훈, 유진과 지원은 지금 기재된 순서에 따라 땅과 하늘을 잇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 작품에서는 유난히 하강하는 이미지가 많았다. 장례식을 떠올리던 장면에서는 유골함을 들고 있는 혜원의 뒤로 계단을 내려오는 가족들이 있었고, 영화 속에서 수차례 떨어지던 눈의 모습이 또 그랬다. 상실을 무게를 안고 제일 땅 가까이에 놓여 있는 혜원, 그런 혜원이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대하며 딛고 오를 수 있는 재훈, 혜원과 지원 사이에서 누나가 모르는 동생의 모습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유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 닿지 않는 곳에 위치하는 지원. 내게는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이 그렇게도 보인다. 혼자서는 조금도 떨쳐내지 못했던 대상의 존재를, 영화의 처음에서는 재훈의 따뜻한 온기로 또 후반에서는 유진과의 짧은 동행과 해프닝으로 조금은 더 가까운 곳까지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05.
이 영화가 닿고자 하는 곳이 결코 상실의 감정을 모두 잊어내고 털어내는 곳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감정을 더 정확하게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놓여 있는 것에 더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어떤 감정들은 직접 다가가 마주하지 않은 채로는 벗어나지 못하게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혜원의 모든 몸짓은 잊어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더 잘 간직할 수 있게 된다는 뜻에 조금 더 가까울 것이다.

영화 스스로가 인물의 감정을 위해 모든 자리를 내어준 만큼 작품은 어느 자리 하나 빠짐없이 반짝인다. 덕분에 아직 정리되지 못한 채로 경계에 놓여있던 인물의 마음이 잘 표현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위에서 한 번의 흐트러짐도 없이 극을 이끌어가는 혜원 역의 박가영 배우의 존재감 역시 압도적이다. 선과 빛으로만 그려지는 흑백 장면 속에서조차 단단하고 선명하다. 타인의 슬픔을 어쩌면 이리도 잘 옮겨낼 수 있었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낮은 파도 위의 윤슬이 차갑고 시리도록 반짝이는 모습이 그려진다. 아련한 과거의 한 장면인 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마르지 못한 누군가의 슬픔인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의 상실과 그에 대한 기억이 꼭 이 장면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곧 흩어져 사라져 버릴 테지만 언젠가 다시 또 반드시 떠올라 반짝이게 될 윤슬. '겨울에 만나'자는 영화의 말이 매일 슬퍼하지는 않겠다는 말 같기도 하고, 또 영원히 잊지는 않겠다는 말 같기도 해서 오히려 더 좋은 마음이 된다. 모두에게 필요한 온기를 이 영화가 조금 나눠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영화 서울독립영화제 겨울에만나 이승찬 박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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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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