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배우 마동석의 출연으로 화제가 됐던 마블 스튜디오의 집단 히어로 영화 <이터널스>는 작년 11월에 개봉해 세계적으로 4억2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여전히 코로나19로 고통 받는 나라가 적지 않았던 시기임을 고려하면 분명 괜찮은 흥행성적이었지만 제작비가 2억 달러에 달했기 때문에 <이터널스>는 결코 '가성비'가 좋은 영화라고 할 수는 없었다.

2015년 <베테랑>으로 1340만 관객을 모았던 류승완 감독의 차기작이었던 <군함도>도 마찬가지(영화관입장권 통합 전산망 기준). <군함도>는 조선인들을 강제징용해 노동착취를 하며 '지옥섬'으로 불리던 군함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 황정민과 소지섭, 송중기, 이정현 등 호화캐스팅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250억 원이 넘는 제작비가 투입된 <군함도>는 <베테랑>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650만 관객에 그치며 아쉬운 성적을 기록했다.

이렇게 영화에서는 <이터널스>나 <군함도>처럼 높은 흥행성적을 올렸어도 그만큼 많은 제작비가 투입되면서 기대만큼 높은 수익을 올리지 못하는 영화들이 있다. 반대로 절대적인 흥행수치는 아주 높지 않아도 제작비가 적게 들면서 의외로 쏠쏠한 수익을 올리는 영화들도 있다. 지난 2001년 400만 달러의 적은 제작비로 만들어 제작비의 11배가 넘는 수익을 올렸던 할리 베리 주연의 영화 <몬스터 볼>이 대표적이다.
 
 <몬스터 볼>은 400만 달러의 제작비로 4500만 달러가 넘는 쏠쏠한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몬스터 볼>은 400만 달러의 제작비로 4500만 달러가 넘는 쏠쏠한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 시네마 서비스

 
아카데미 유일무이 흑인 여우주연상 수상자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할리 베리는 이미 10대 시절부터 뛰어난 미모로 유명했다. 17세였던 1985년 '틴 올-아메리칸'이라는 미인대회에서 우승한 베리는 1986년 미스 USA에서 2등, 미스월드 대회에서 6위를 차지했고 곧바로 모델로 데뷔하며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다. TV 드라마를 통해 연기를 시작한 베리는 1991년 스파이크 리 감독의 <정글 피버>에 출연하며 영화 활동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베리는 '미인대회와 모델 출신의 흑인여성배우도 연기를 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했고 1999년 <도로시 댄드리지>를 통해 미국배우조합상 TV영화 부문 여자연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 베리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 영화는 역시 <엑스맨>이었다. <엑스맨>에서 날씨를 제어하는 능력을 가진 뮤턴트 스톰을 연기한 베리는 총 4편의 <엑스맨> 시리즈에 출연했다.

2001년 존 트레볼타, 휴 잭맨과 함께 도미닉 세나 감독의 <스워드 피쉬>에 출연한 베리는 같은 해 제작비 400만 원이 투입된 마크 포스터 감독의 <몬스터 볼>에 출연했다. 베리는 <몬스터 볼>에서 남편의 사형집행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사형수의 아내 레티시아를 연기했고 <몬스터 볼>을 통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아카데미 74년 역사에서 흑인여성배우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은 베리가 역대 최초였다.

<엑스맨>과 <몬스터 볼>을 통해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크게 올라간 베리는 2002년 피어스 브로스넌이 제임스 본드를 연기했던 < 007 어나더 데이 >에서 본드걸 징크스 역을 맡았다. < 007어나더 데이 >는 4억3100만 달러의 성적을 올리며 크게 흥행했지만 베리에게도 '< 007 >시리즈에 본드걸로 출연한 배우들은 이후 작품에서 인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소위 '본드걸의 저주'가 찾아오고 말았다.

베리는 2004년에 출연한 <캣 우먼>이 최악의 평가와 함께 흥행에서도 크게 실패했고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최악의 여우주연상에 선정됐다(하지만 베리는 시상식에 직접 참석해 매우 유쾌한 수상소감을 남겼다). 실제로 베리는 <캣 우먼> 이후 2017년 <킹스맨: 골든서클>, 2019년 <존윅3: 파라벨룸>, 올해 <문폴> 등에 출연하며 50대 중반의 나이에도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사형수 아내와 사형집행관의 힐링 멜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는 할리 베리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는 할리 베리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 시네마 서비스

 
그 동안 사형수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은 국내외에서 종종 제작된 바 있다. 사형수의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든 허구의 이야기든 저마다 기구한 사연이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극적으로 연출하기가 용이하다. 하지만 <몬스터 볼>의 주인공은 사형수가 아닌 사형 선고를 받은 남편 대신 홀로 아들을 키우는 레티시아(할리 베리 분)와 레티시아 남편의 사형을 집행한 교도소 간수 행크(빌리 밥 손튼 분)다.

레티시아가 일하는 식당에서 직원과 손님으로 스치듯 마주쳤던 두 사람은 레티시아의 아들이 뺑소니 사고를 당했을 때 행크가 그들을 도와 주면서 본격적으로 인연이 시작된다. 행크는 레티시아의 아들을 병원으로 옮기지만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린 아들은 그대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비슷한 시기 행크 역시 아들 소니(히스 레저 분)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자식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다는 같은 아픔을 공유하며 조금씩 가까워진다.

사실 영화에서 레티시아와 행크의 사이를 가로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미국사회에 만연한 인종차별이었다. 레티시아는 결혼예물로 추측되는 반지를 팔아 행크에게 선물할 모자를 구입해 행크의 집에 방문하지만 흑인을 매우 싫어하는 행크의 아버지에게 커다란 수모를 당한다. 그리고 이에 분노한 행크는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요양병원으로 보낸다. 결국 행크는 레티시아 때문에 부자 간의 연마저 끊으려 한 셈이다.

할리 베리가 비장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듯한 포스터를 보면 <몬스터 볼>은 마치 <친절한 금자씨> 같은 느낌의 복수극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몬스터 볼>은 외로움에 사무친 두 남녀의 힐링 멜로물에 가깝다. 물론 영화 후반부에 남편의 사형 집행관이 행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레티시아가 큰 충격에 빠지는 장면이 나오지만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행크를 미워하기엔 레티시아는 이미 행크에게 너무 깊이 빠져 있었다.

<몬스터 볼>을 연출한 마크 포스터 감독은 2004년 조니 뎁과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네버랜드를 찾아서>를 만들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 비교적 작은 영화들을 만들었던 포스터 감독은 2008년 2억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다니엘 크레이그의 두 번째 007 영화 <퀸텀 오브 솔러스>를 연출했다. 포스터 감독은 2011년 제라드 버틀러 주연의 <머신건 프리처>에 이어 2013년에는 브래드 피트 주연의 좀비영화 <월드 워Z> 를 연출하기도 했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 남긴 고 히스 레저
 
 20대 초·중반 시절의 고 히스 레저는 <몬스터 볼>에서 신참내기 교도소 간수를 실감나게 연기했다.

20대 초·중반 시절의 고 히스 레저는 <몬스터 볼>에서 신참내기 교도소 간수를 실감나게 연기했다. ⓒ 시네마 서비스

 
안젤리나 졸리의 두 번째 남편으로 유명한 빌리 밥 손튼은 1980년대 후반부터 연기활동을 시작해 최근까지 이렇다 할 공백 없이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사실 NASA의 트루먼 국장을 연기했던 <아마겟돈> 정도를 제외하면 대단한 흥행작에 출연한 적은 없다. 하지만 밥 쏜튼은 1999년 <심플 플랜>으로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2015년에는 <파고> 드라마판으로 골든글로브 TV 미니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다.

<몬스터 볼>에서는 자신이 집행한 사형수의 아내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교도소의 베테랑 간수 행크 그로토스키를 연기했다. <몬스터 볼>은 다소 복잡한 감성의 멜로영화지만 밥 손튼은 연기 경험이 많은 배우답게 행크의 복잡한 감정변화를 관객들에게 잘 전달했다. 특히 행크의 방에 있던 남편의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은 레티시아에게 조용히 아이스크림을 먹여주는 절제된 연기는 상당히 인상적이다.

행크에게는 자신을 따라 교도소 간수가 됐지만 언제나 프로답게 일을 처리하는 자신과 달리 간수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언제나 실수만 저지르는 아들 소니가 있다. 나약한 아들이 못마땅했던 행크는 아들이 큰 실수를 저지르자 손찌검과 함께 모진 말을 하며 분노를 드러냈다. 하지만 소니는 집을 나가라는 행크에게 총을 겨누면서 화를 내다가 "전 아버지를 언제나 사랑했어요"라는 유언을 남긴 채 가슴에 총을 쏘며 죽음을 선택했다.

행크의 아들을 연기하며 관객들에게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겼던 배우는 다름 아닌 만 28세의 나이에 <다크나이트>라는 명작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천재 배우 고 히스 레저였다. <몬스터 볼>은 히스 레저가 <기사 윌리엄>으로 주연신고식을 치르며 막 얼굴을 알리기 시작할 무렵에 출연한 영화였다. 비록 분량은 짧았지만 히스 레저는 <몬스터 볼>에서도 자신의 진가를 알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연기를 선보였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몬스터 볼 마크 포스터 감독 할리 베리 빌리 밥 손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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