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12 05:10최종 업데이트 22.12.12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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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8주째다. 참으로 길고도 길게 수다를 떨었다. 처음 막걸리 한 잔 운운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는 기껏해야 두 달을 넘길 수 있을까 걱정 반, 기대 반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18주라니, 넉 달이 넘는 그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처음 시작은 그냥 눈먼 자의 일상을 가볍게 얘기해 보자는 것이었다. 나도 몰랐던 세상이니까 혹시 남도 궁금하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한 주, 두 주 계속해서 자판을 두드리다 보니 자꾸 하소연하고 싶어졌고 불만을 토로하고 싶어졌다. 말도 많아졌고, 오버도 심했다.


그런데도 너무 많은 분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엄지척을 눌러 주고, 댓글을 적고, 놀랍게도 원고료까지 응원하면서 내 어깨를 다독여 주셨다. 새삼스레 더불어 사는 힘과 여전히 아름다운 세상을 느꼈다.

카톡, 페이스북, 유튜브 등등 여러 SNS가 발달하면서 사람들 간의 소통은 그 어느 때보다 쉽고 편해졌다. 그런데 맘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얼굴을 마주 보며 떠들 수 있는 시간은 그만큼 적어지지 않았나 싶다.

나 같은 장애인들만 그런 게 아니고 직장을 다니는 친구나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마찬가지다. 가족이든 동료든 친구든 사람들 간의 대화는 적어졌고, 동시에 SNS는 짧다 못해 무응답조차 새로운 답변의 한 형태가 돼버렸다.

세상이 이럴진대 내가 자그마치 18주씩이나 주저리주저리 길고도 지루하게 수다를 떨 수 있었다는 게 솔직히 믿기지 않을 정도고, 내 수다를 들어준 분들께 너무도 감사하다.

그런데도 막상 막잔을 들려 하니 또 아쉽다. 더 떠들고 싶고, 좀 더 위로받고 싶고, 좀 더 함께하고픈 욕심이 마음속을 가득 채운다. 여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똑같은 소리를 나만의 감정이라는 쳇바퀴에서 마냥 돌리고픈 마음일 수도 있다. 냉정히 따져보면 굳이 더 할 말이 남아 있을까도 싶다. 그런데도 아쉬움을 못 이긴 채 끝없이 솟아나는 낯부끄러운 이 투정을 어이할까.

지난 18주 동안 나를 제대로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다시금 배어 나온 힘든 기억과 아픔도 있었지만, 고맙고 따뜻했던 것들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시력 잃고 만난 이 세상이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그 세상과 전혀 다른 별개의 세상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18주에 담은 지난 10년. 솔직히 아팠고 힘들었지만 그만큼 희망을 찾았고 응원도 받았다. ⓒ 김승재


언젠가 말했듯이 우리 모두는 70억 분의 1로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그런 70억 분의 1 중 하나일 뿐이다. 받으려고만 해서는 받을 수 없는 것이고, 나만을 고집하면 함께 살 수 없는 것이니까.

아, 벌써 눈치 채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그렇다. 또 오버하고 있다. 그런데 굳이 변명을 좀 하자면 어쩔 수 없다. 불편한데 그리고 고통스러운데 그래서 힘든데 그래도 잘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뇌를 조작해서라도 날 부추기고 격려하고 힘을 돋울 수밖에.

유전자 명령보다는 뇌의 명령을!

우리 인간의 뇌는 그 어떤 생명체의 그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특별하고 대단하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소개한 자살 유전자만 봐도 그렇다. 도킨스의 말대로라면 종족 보존, 즉 자기 복제의 주체는 유전자이고 인간과 같은 개체는 단순한 운반자에 불과하다. 그래서 자식을 낳았다면 유전자 입장에서는 자기 복제란 최고의 목표가 달성된 것이므로 용도를 다한 개체의 유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아마도 그런 걸 '자살 유전자'라고 표현했던 것 같은데 적어도 인간에게는 틀린 말 같다. 

인간의 경우 종족을 번식 아니 유전자를 복제하라는 명령을 뇌가 거부하기도 한다. 자기 취향이나 종교적 이유, 그 밖의 여러 이유로 독신을 고집하고, 결혼한다고 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다. 그리고 자식을 낳고서도 더욱더 건강하고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유전자보다는 뇌의 명령에 따라서 말이다.

내 얕은 지식으로 제멋대로 해석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난 이렇게 이해하고 싶다. 왜냐하면 난 이제 그만 살라는 유전자의 명령보다는 즐겁고 건강하게 살라는 내 뇌의 명령을 따르고 싶으니까.

우리 뇌세포, 뉴런은 태어날 때 이미 대부분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유아기와 청소년기 동안 오감을 통해 수많은 경험을 하면서 거의 1천억 개에 달하는 각각의 뉴런에서 많게는 1만 개의 가지가 뻗어 나와 뉴런과 뉴런 사이에 시냅스라는 독특한 연결 구조를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각각의 뉴런에서 방출된 신경전달물질이 거의 100조 개에 달하는 이 시냅스를 통해 전달되면서 놀랄 만한 우리 뇌의 네트워크가 완성된다고 한다.

이상 한나 크리츨로우라는 신경학자가 쓴 <운명의 과학>에 소개된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더더욱 흥미로운 것들도 있다. 우리 뇌는 효율적으로 동작하기 위해 필요 없다고 판단되는 시냅스는 과감히 가지치기 해버리고, 경험과 지식을 통해 필요하다고 판단된 시냅스는 더욱 강화한다.

이런 이유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사람은 더욱 효율적으로 다듬어진 뇌의 네트워크 덕분에 전문적이고 지혜로워질 수 있다. 그런데 같은 이유로 고집불통 꼰대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혜롭다거나 전문적이라는 소리를 들어야지 꼰대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될텐데 방법이 있을까?

내 생각에 꼰대가 되는 이유는 자기가 모르거나 경험하지 못한 것, 즉 새로운 걸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건 뇌의 노화로 인해 뇌세포가 파괴됨으로써 네트워크가 얽혀 버린 게 중요한 원인일 수 있다. 보통 뉴런이 거의 1천억 개에 달한다고 하지만 건강한 사람도 많게는 하루에 100만 개가 죽을 수 있다니까 그럴 만도 하다.

나이는 영원한 불치병인데 그럼 어쩔 도리가 없단 말인가? 설마, 그랬다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책은 신체 활동이 뇌세포, 즉 뉴런을 다시 만들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하고 그 구체적인 방법까지 알려준다.

첫째로는 신체 활동을 활발히 하라는 것인데 한마디로 운동을 하란 얘기다. 운동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억제하고, 엔도르핀이나 세로토닌과 같은 몸에 좋은 호르몬을 촉진해서 천연 항우울제라고도 한다니까 열심히 하고 볼 일이다.

둘째로는 잠을 잘 자라는 건데, 난 이게 좀 어렵다. 베개에 머리만 닿으면 바로 꿈나라라는 사람도 있다는 데 나로서는 그게 정말 꿈같은 얘기다.

셋째로는 식생활을 개선하라는 건데 허구한 날 들은 대로 심혈관에 좋지 않은 기름진 육류나 단 음식을 줄이라는 말이다.

넷째로는 사회 활동을 활발히 하라는 것이다. 가족뿐 아니라 친구나 좋은 사람을 만나서 많이 떠들고 들으라는 것인데 나도 절실히 느낀 점이다.

다섯째로는 공부를 계속하라는 것이다. 난 개인적으로 넷째와 이 다섯째를 강조하고 싶다. 이미 말했듯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우린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고 사귀어야 한다. 그러면 내 삶이 여유롭고 풍족해지는데 거기다가 새로운 뉴런까지 생겨서 또 다른 시냅스를 만들 수도 있단다. 어찌 망설일 수 있으랴.
 

웃는다는 것, 그건 몹시 쉬운 듯 어려운 것 같지만 함께하면 의외로 진짜 쉽다. ⓒ 김승재


마지막 여섯째로는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늙었다고 생각하는 만큼 늙는다는 말도 있는데, 저자는 자기 기억력이 나쁘다고 믿으면 진짜로 기억력이 더 빨리 감퇴한다고 한다. 남이 하면 꼰대의 말이지만 내가 내게 하면 진짜 좋은 말 즉,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바로 그 말인 것 같다.

가만히 되돌아보면 시력을 잃은 충격에서 날 구해준 것도 위 여섯 가지 방법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또 느끼게 된다.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조금 다른 것일 뿐, 결국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시각장애인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을

마지막으로 책을 하나 더 소개하고 싶다. 20년 전쯤이던가. 나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아주 인상 깊게 읽었다. 그때 이미 난 망막색소변성증을 앓고 있었고, 언젠가는 증상이 심해져 나도 시력을 잃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책을 읽으면서 한 명씩 한 명씩 묘사되는 등장인물의 눈먼 모습이 그저 남의 일처럼 느껴졌을 뿐 내 이야기가 될 거란 걸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몇 주 전, 우연히 라디오에서 성우들이 그 책 일부를 읽어주는 걸 들었다. 그대로 몸이 굳어질 정도로 놀랐다. 아니, 솔직히 소름이 끼쳤다. 난 곧장 국립 장애인 도서관에 접속해서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기 시작했다. 다시금 소름이 끼쳤다. 처음 눈이 먼 남자, 안과 의사,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 줄줄이 소개되는 눈먼 자들의 몸짓과 말들, 그건 바로 내 이야기였다.

주제 사라마구가 시력을 잃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중간에 눈이 멀게 된 사람의 행동과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읽고 또 읽어 봤지만, 솔직히 나보다 날 더 잘 표현해 주는 것 같았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스틸 이미 ⓒ 싸이더스

 
다른 작가들도 중도에 실명한 사람 이야기를 했고, 심지어 망막색소변성증 환자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뭔가 거북한 게 있었다. 어떤 때는 나로서는 너무 힘들 것 같은 걸 쉽게 해내면서도, 시력과는 크게 상관없어 보이는 것까지 눈 탓을 하는 설정이 아쉬울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 책은 달랐다. 행동뿐 아니라 말 한마디 그리고 느끼는 감정, 심지어 눈이 먼 후 불현듯 찾아오는 외로움까지 묘사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주접떠는 것 같아 부끄럽기는 하지만, 비장애인이 우리 장애인을 더 많이 알고 그래서 그만큼 이해할 수 있다면, 장애인들이 밖으로 나오기가 훨씬 쉬울 거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혹시 중간에 눈이 먼 사람의 행동과 심정을 좀 더 알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권하면서 막 잔을 내려놓으려 한다.

담담히 시작했지만 가슴 가득 채워진 희망과 따뜻함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해 준 모든 분의 건강을 기원하며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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