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라스 맥아더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2차 세계대전이 낳은 전쟁영웅이자 세계사의 운명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 미국의 장군들이다. 두 사람은 한국과도 직-간접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한국전쟁이라는 시대의 격랑 속에서 한 사람은 경질되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고, 한 사람은 미국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랐다. 과연 무엇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았을까.
 
12월 6일 방송된 tvN 역사교양예능 <벌거벗은 세계사> 76회에서는 '전쟁영웅 맥아더 VS 아이젠하워의 엇갈린 운명'편을 다루며 20세기를 풍미했던 두 스타 장군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김봉중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tvN 역사교양예능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역사교양예능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군인이자 전쟁영웅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맥아더와 아이젠하워는 걸어온 길이나 성향이 전혀 달랐다. 맥아더는 미국 육군 장성 출신이었던 아버지 아서 맥아더 주니어의 아들로 군인 명문가의 '금수저' 출신이었다. 맥아더 본인 또한 출중한 외모와 체격에다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만점에 가까운 성적으로 수석졸업할 정도로 공부도 잘했던 만능 '엄친아'였다.
 
임관 이후에도 순탄한 속도로 진급 코스를 밟던 맥아더는, 1차 세계대전(1914~1918)을 계기로 전쟁 영웅으로 부상하며 본격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전쟁 초기에 참전을 주저하던 미국은 '치머만 전보사건(독일이 멕시코에 미국 침공제안)'을 계기로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만 당시 주 단위로 병력을 관리하던 미국으로서는, 전쟁에 어떤 주의 병력을 파견할 것인가가 민감한 문제였다. 당시 전쟁부 소령이었던 맥아더는 장관에게 각 주에서 차출된 혼합 사단을 창설하자는 해법을 제안했다. 각기 다른 주에서 선정된 부대들이 모인 모습이 미국 전체 대륙을 가로지는 무지개 같다고 해서 '레인보우 사단'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이들은 1차대전에 참전한 최초의 미국 육군 사단으로 이름을 남기게 됐다.
 
맥아더는 소령에서 대령으로 2계급 특진하며 레인보우 사단의 수석참모로 임명되었다. 1918년 레인보우 사단을 이끌고 프랑스로 진격한 맥아더는 병사들과 함께 최전선에 뛰어들어 활약하며 명성을 높였다. 그해 6월, 1차대전이 막을 내리면서 맥아더는 전공을 인정받아 불과 38세의 나이에 준장으로 진급했다. 참전 약 1년 만에 소령에서 일약 모든 군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장군'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 맥아더가 본격적으로 미군 권력의 핵심부로 편입된 계기다.
 
한편으로 맥아더는 평생에 걸쳐 '이미지 메이킹'과 '쇼맨십'에 누구보다 능했던 인물로도 유명하다. 1차 대전 당시 전장에서도 지팡이에 롱부츠와 머플러, 철모 대신 가벼운 전투모를 착용하며 모델 뺨치는 맥아더의 폼생폼사 패션은 큰 화제가 됐다. 또한 맥아더는 마치 옛날 유럽의 군주들처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3인칭 화법을 즐겨 사용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누구보다 자기애가 강하고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맥아더의 과시욕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맥아더는 39세에 육군사학관교 교장에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44세에는 소장, 이어 50세에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어 중장을 건너뛰고 4성 장군인 대장에 도달하기까지, 진급할 때마다 미군의 각종 '최연소' 기록을 줄줄이 갈아치웠다.
 
승승장구하던 맥아더에게도 위기가 찾아온 순간이 있었다. 1930년대 전 세계를 덮친 경제대공황으로 미국 정부는 1차대전 참전용사들에게 지급하기로 약속하고 미뤄놨던 막대한 피해보상금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몰린다. 경제난의 여파로 극빈층으로 전락해버린 참전용사들은 밀린 보상금을 지급하라며 시위를 벌이니 이들은 '보너스 군대'로 불렸다.
 
당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이었던 맥아더에게 시위 해산을 지시했다. 맥아더는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하고 참전용사들에게 무력을 사용한 강경진압을 지시했다. 맥아더의 가혹한 진압에는 그 배후에 대공황을 틈 타 미국에서 세력을 확산해나가던 공산주의 세력이 있다는 경계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훗날 조사 결과 시위대는 공산주의와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졌고 후임 루스벨트 대통령은 당선 이후 보너스 군대에게 일자리를 제안하며 겨우 상황을 무마시켰다. 이 사건으로 맥아더는 전쟁영웅에서 일약 '최악의 장군'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맥아더의 갈등은 '군 예산 삭감' 문제로 다시 불거졌다. 맥아더는 백악관으로 루스벨트를 직접 찾아가 항의하며 "우리가 다음 전쟁에서 패전하여 죽어갈 미국 청년이 마지막으로 저주할 이름은 맥아더가 아니라 루스벨트일 것"이라고 독설을 내뱉은 일화는 유명하다. 맥아더는 참모총장직을 내걸고 반대의사를 굽히지 않았고 루스벨트는 결국 예산삭감을 보류하게 된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맥아더의 호전성을 다시 한번 확인한 루스벨트는 "맥아더는 위험한 인물"이라는 인식이 굳어진다.
 
예산은 지켰지만 참모총장 연임이 불투명해지며 권력을 잃을 위기에 놓인 맥아더에게, 또다른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다.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앞둔 필리핀 정부에서 맥아더에게 군대 육성을 제안한 것. 참모총장직에서 내려온 맥아더는 미군 소장직은 유지하면서 필리핀의 군사고문을 겸직하게 된다. 이때 맥아더가 필리핀에서 함께할 측근으로 선택된 인물로 바로 아이젠하워였다.
 
 tvN 역사교양예능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역사교양예능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맥아더의 육사 11년 후배였던 아이젠하워는 '대기만성'의 대표주자로 꼽힌다. 아이젠하워는 전형적인 흙수저 이민자 출신이었고, 참전 경험이 없어서 임관한 지 15년째 만년 소령에 머물러 있었을 만큼 모든 면에서 맥아더와는 상극의 인생을 걸어온 인물이었다. 맥아더는 참모총장 시절 아이젠하워가 군대 양성 방안에 관하여 작성한 보고서를 눈여겨보고 그를 신임하게 되었고, 함께 필리핀까지 가게 된다.
 
초기에 맥아더-아이젠하워는 공식-비공식 석상을 가리지 않고 늘 함께하며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전혀 달랐던 두 사람의 성향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악화되기 시작한다. 아이젠하워는 독단적인 맥아더의 성향 때문에 매번 그 뒤처리에 진땀을 빼야 했다고.
 
맥아더는 필리핀 정부로부터 육군 원수직을 정식으로 제안받고 미군 현역 장성직을 포기하려고 했다. 심지어 맥아더는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하여 독단적으로 사치스러운 군사 퍼레이드를 추진했으나 이를 알게된 필리핀 대통령이 강하게 질타하자, 이를 아이젠하워에게 덮어 씌우며 양측간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맥아더에게 실망한 아이젠하워는 결별을 선택했다.
 
1939년 발발한 2차대전은 아이젠하워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아이젠하워는 야전부대 훈련과 조직관리, 전시대비 모의 훈련 등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대장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된다.
 
특히 아이젠하워가 총괄하고 영국 정보부가 계획한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2차대전 서유럽 전선의 판도를 결정한 최대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아이젠하워는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보여준 탁월한 리더십을 인정받아 가장 주목받는 전쟁영웅으로 급부상했다. 아이젠하워는 영국의 몽고메리, 미국의 조지 패튼 등 하나같이 기라성같고 개성도 강한 장군들을 효과적으로 조율하고 지휘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보좌관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첫째, 아이젠하워는 항상 잘 듣고 핵심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둘째는 그는 절대적으로 공평했다. 편견을 갖고 있더라도 최종결정이 그것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마음이 메마른 우둔한 영국군 장교들과 비교하면 그는 보석처럼 빛나는 지혜와 포용력을 지녔다"며 아이젠하워의 리더십을 극찬하고 있다. 아이젠하워는 1944년 12월, 마침내 5성 장군인 원수로 진급한다.
 
한편 필리핀에 남았던 맥아더도 2차대전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못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이 개전하면서 1942년 필리핀도 일본에게 점령당했다. 맥아더는 급박하게 호주로 탈출했다. 맥아더는 필리핀을 떠나면서 "나는 반드시 돌아갈 것입니다.(I shall return)"라고 선언하며 강한 수복 의지를 드러냈고, 몇 년 후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켰다.
 
맥아더는 미 극동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태평양 전쟁을 총괄하게 됐다. 미군 수뇌부의 본래 전략은 대만을 통하여 최단루트로 일본 본토를 공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이에 반대하며 미국령이던 필리핀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명분으로 내세워 "필리핀 수복은 미국의 명예와 위신이 달린 문제"라고 주장했다. 루스벨트는 필리핀과 극동전문가인 맥아더의 주장을 수용했다.
 
맥아더가 이끄는 미군은 1944년 10월 레이테섬 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며 2년 7개월만에 본인의 약속처럼 필리핀에 귀환하다는 데 성공했다. 맥아더와 세르히오 오스메냐 필리핀 대통령이 바닷물을 걸어가며 섬에 상륙하는 유명한 장면은, 일부러 기자들을 모아놓고 연출된 사진으로 여전한 맥아더의 쇼맨십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오늘까지 맥아더의 트레이드 마크로 유명해진 옥수수 담배 파이프도 이때부터 등장했다. 실제로 맥아더는 평소에는 원래 고급 파이프를 사용했으나 사진 촬영을 위하여 임시적으로 준비했던 값싼 옥수수 파이프가 더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이후 서민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자주 활용했다. 필리핀 국민들은 드라마틱하게 귀환한 맥아더를 열광적으로 환영했고 레이테섬에는 지금도 맥아더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맥아더는 1944년 12월 미 육군 최고 원수로 승진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맥아더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자격으로 도쿄 요코하마에 정박한 USS미주리호에서 일본 정부 사절단을 맞이하여 항복문서 조인식을 주도한다. 길었던 2차대전의 종지부를 찍는 역사적인 순간의 주인공이 된 것.
 
맥아더는 2차대전 이후에는 연합군 총사령부(GHQ)의 사령관으로 일본에 주둔하게 된다. 맥아더는 일본 국민에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하여 일본 천황 히로히토와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천황을 신처럼 생각하던 일본 국민들 앞에서 잔뜩 경직된 모습의 히로히토와 달리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짝다리까지 짚고 포즈를 취한 맥아더의 모습은 큰 충격을 줬다. 일본에게 다시 천황의 신성성을 내세워 전쟁을 벌일 생각을 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가 담긴 연출이었다.
 
일부 일본인은 분노하기보다는 오히려 맥아더를 높은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숭배까지 하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미군정 기간동안 일본인이 맥아더에게 보낸 펜레터만 44만여 통에 이른다. 맥아더는 일본 군인의 전역, 무기 폐기 등을 이끌며 일본이 군국주의 국가에서 벗어나는 각종 개혁을 이끌며 점령군 사령관이었음에도 일본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전쟁 영웅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맥아더와 아이젠하워의 운명을 바꾼 최후의 전역은, 바로 6·25 한국전쟁이었다. 맥아더는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며 한국전쟁을 진두지휘하게 됐다. 당시 전세는 대한민국에 극도로 불리했고 방어선이 낙동강까지 밀린 상황에서 맥아더는 전세를 뒤집기 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한다.
 
참모진은 성공확률이 지극히 낮다며 반대했지만 맥아더는 자신의 계획을 밀어붙인다. 까다로운 지형으로 적이 방심한 사이에 허를 찔러야 한다는 것, 서울로 들어가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이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밀어붙인 이유였다.
 
9월 15일 월미도 점령을 시작으로 치열한 교전 끝에 인천상륙작전은 대성공으로 끝났고, 그로부터 13일 후에는 서울을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 작전은 한국전쟁의 판세를 뒤집은 결정적인 전투로 꼽하며 '아이젠하워에게 노르망디가 있었다면, 맥아더에게는 인천상륙작전이 있다'고 할 만큼 전략가 맥아더의 진면목을 보여준 전투로 꼽힌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후 중국의 개입으로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1951년 4월 11일에는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열고 맥아더를 전격 해임한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트루먼은 "자유진영의 안전과 제 3차 세계대전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제시하며 "전쟁 제한에 동의하지 않은 맥아더 장군을 해임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반공주의자였던 맥아더는 공산주의 말살을 위해서는 중국과의 전면전도 불사해야한다는 강경파였고 핵무기 사용까지 제안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또다시 제 3차대전의 발발을 우려한 트루먼은 고심 끝에 통제불가능한 맥아더를 해임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맥아더는 미국 의회에서 열린 퇴임 연설에서 노래 가사를 인용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맥아더의 연설이 끝나자 의원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맥아더가 한국전쟁의 방향을 바꿨다면,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을 종결시킨 인물이었다. 당시 전역하고 정치에 입문하여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된 아이젠하워는 선거 기간동안 한국전쟁 종결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전쟁이 아직 진행중이던 1952년 11월, 34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당선인 자격으로 한국에 방문했다. 1953년 판문점에서 체결된 휴전 협정을 통하여 3년에 걸친 한국전쟁은 막을 내리고 한반도는 기나긴 휴전 기간에 돌입하며 지금까지 분단국가로 남아있다.
 
당시 국제정세에서는 휴전이 최선의 해결책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다만 아이젠하워의 선택은 철저히 미국의 상황이 우선시된 결정이었음도 분명하다.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는 이후로 우리들에게 남겨진 숙제가 됐다.
 
신념과 카리스마로 무장한 맥아더, 소통과 화합의 아이젠하워는, 두 전쟁 영웅은 성격도 리더십도 전혀 달랐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려운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우리 안의 영웅을 드러나게 만든다"는 밥 라일리의 격언은 두 사람의 인생을 잘 요약하며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한 리더십의 가치를 돌아보게 만든다.
벌거벗은세계사 맥아더 아이젠하워 2차대전 한국전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