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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이라는 표현 하에 경쟁과 입시몰입교육을 지양하고, 자치와 상생을 위한 교육을 하며, 학생들이 현재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곳에서 여러 존재들과 좌충우돌하며 교육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전하고자 합니다.[기자말]
2022학년도의 창작뮤지컬인 <43의 언덕 너머에는>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발표회(12월 29일)까지 얼마 남지 않은 현재, 12곡 중 두 곡의 일부분만 빼면 모든 악곡의 오케스트라와 밴드 반주까지(물론 가상악기를 이용했지만) 완성되었다. 아이들의 목소리까지 녹음하여 편집하려면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마지노선 전까지는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점에서 나의 마음을 옥죄는 일이 일어났다. 올해뿐 아니라 해마다 반복되는 상황이고, 일반계 고등학교였던 전임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로 거듭되었던 그 문제는 다름 아닌 '평가'이다. 쉽게 인식하면 '시험'에 불과하지만 그에 대한 고민은 쉽지 않다. 가장 흔한 논쟁은 절대평가와 상대평가에 관한 것이니 그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평가는 교육과정의 전반에 걸쳐있는 일종의 기준이기에 교수-학습의 과정뿐 아니라 수업 구성에 원초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교육부 인가 학교(학력 인정)의 경우는 국가 수준의 평가 기준을 따라서 각 과목의 평가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러므로 어찌 보면 교육부에서 제시하는 평가 기준은 단위 학교나 교사 개인이 교과를 재구성할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물론 동일한 기준이 있기에 학생들의 평가가 중구난방 되지 않고, 수치화되고 서열화되어 상급 학교의 진학에 타당도와 신뢰도 있는 자료를 제시해 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학교 현장의 고민이 발생한다.

'우리가 학생을 평가하는 목표는 실질적으로 대학 입시에 반영될 자료를 생성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가?'

개별화 평가 계발과 실패

오늘의 이야기는 실패에 관한 부끄러운 고백이다. 2월, 제주 4.3 사건에 관한 뮤지컬을 창작하여 공연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약 4개의 과목이 '프로젝트 융합 수업'을 꾸렸다. 가정 시간에는 의상을 만들고 한국사 시간에는 배경지식을 배웠다. 통합기행을 역사 공부 및 비극적 장소 탐방 여행(Dark tour) 겸하여 제주도로 다녀왔다. 콘텐츠 시간에는 현재 6명의 학생이 '미디어파사드(Media Façade)' 작업을 열심히 하고 있다.
 
학생들이 자신이 입을 뮤지컬 의상을 직접 만들고 있다.
▲ 의상 만들기 학생들이 자신이 입을 뮤지컬 의상을 직접 만들고 있다.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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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교과를 담당하는 본인은 여기에 더하여 평가를 혁신적으로 개선하고 싶었다. 한 반에 15명 이하, 전체 학년에 40여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학교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므로 개별화 평가를 계발하여 실행하고 싶었다.

뮤지컬은 예술계통 과목이면서 대안교과로 분류되어있기 때문에 절대평가를 실시한다. 지필고사는 치르지 않으며 100퍼센트 수행평가로 이루어진다. 100점은 각각 개인과제(40), 협력(20), 공연역할(20), 수필(20)으로 세분화하였다.

개인과제의 부분을 개별화 평가로 시행할 계획을 세웠다. 학생들마다 개인적인 목표 세 가지를 세우도록 했다. 당연히 뮤지컬 분야 및 뮤지컬 공연과 관련되어야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측면을 다루어도 좋다고 했다. 예를 들면 '연말 뮤지컬에서의 역할을 위해 7kg 감량' 등 말이다. 

처음부터 난항에 부딪혔다. 생각보다 많은 학생이 목표를 스스로 세우지 못했다. 하지만 오히려 도전 정신이 생겼다. 학생들이 개인 목표를 세우지 못하는 현상 자체가 문제 상황이라고 생각했고, 개별 상담을 통해 그것부터 해결해주고자 하는 의욕이 솟구쳤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었다. 자아효능감의 영역까지 건들어야 하는 상담이었기에 개인당 10~20분으로는 택도 없었다. 하물며 15명 전원을 상담한다면, 한 학기가 다 지나갈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상담 대신 전체 아이들에게 다시 한번, 정말 유치하고 말이 되지 않아도 좋으니 딱 세 가지만 정해달라고 주문했다.

'멋진 문구가 필요하려나'라는 고민을 덜어내니 아이들은 조금 더 힘을 내었다. 대부분 대인관계에 관한 목표를 적었고 그 다음으로는 춤이나 음악적 능력 향상에 대한 것을 적었다. 소박한 결과물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아주 값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를 학기 말 수행평가의 결과물로 사용하지는 못했다. 2학기 말이 다가오는 지금 맞닥뜨린 문제와 동일한 벽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대안교과이고 절대평가라지만 어쩔 수 없이 점수로 표현해야 하는 평가의 특성상 지극히 개인적인 수준의 과제를 점수화할 수 없었다.

뮤지컬 교과는 9등급으로 산출해야 하는 일반교과와 달리 A~E의 성취도만 표시되고 세부적인 점수로 인해 석차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위와 같은 고민이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평가의 결과가 아닌, 기록 작업에서는 0부터 100까지의 점수를 넣어야 한다.

음악과 등의 예능 교과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런 방식의 절대평가를 사용해오고 있다. 수능 과목도 아니기에 교과의 진도에 구애받지 않았고, 학생을 서열화하여 줄 세워야 하는 현실에도 자유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은 불편함은 바로 '숫자'였다. 

아이들의 열심과 웃음을 꼭 점수로 표현해야 할까요

2주 전 학교 방송실에서 밤늦게까지 학생과 함께 악곡 녹음을 했을 때의 일이었다. <수업시간>이라는 제목의 악곡이었다. 1곡부터 8곡까지는 4.3사건 당시의 광경을 그린 노래이고 9곡부터 11곡까지는 현재 학교에서의 이야기가 펼쳐지며, 12곡인 마지막 악곡은 제주인들을 향한 평화의 메시지를 노래한다.

악곡 <수업시간>은 한국사 수업의 상황으로, 그 가사는 아래와 같다.
 
악곡 <수업시간>의 가사
 악곡 <수업시간>의 가사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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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노래는 총 12곡의 뮤지컬 중에서 유일하게 밝고 코믹한 장면이다. 4.3사건을 다루다 보니 악곡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는데, 한 학생이 발랄한 곡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고 제안하면서 해당 악곡이 개연성을 가질 수 있는 조건까지 상상하여 도움을 주었다.

그 학생이 바로 위 악곡의 솔리스트이자 선생님의 역할을 맡은 학생이다. 맨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수업시간> - <43이 생각나요> - <제주여 평화로우라(Finale)>로 이어지는 악곡을 들을 수 있다. 아직 가이드 녹음만 있는 미완성 상태이지만 해당 학생의 청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피곤할 만도 하련만 녹음실은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배꼽을 잡아야만 몸을 가눌 수 있을 만큼 웃어가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학생과 함께 수업 결과물을 만들면서 이토록 재미있을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작은 실수에도 아쉬워하며 거듭해서 녹음을 다시 해 줄 것을 나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이 행복과 웃음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정답은 '교과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이하 세특)'이다. 한 학생이 해당 교과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고 어떤 성장을 했는지 세세하게 적어주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즐겁게 모든 과정에 참여한 학생의 세특을 써주는 작업은 때때로 고단하기도 하지만 신날 때도 많다. 해당 학생에게 교사가 품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마음으로 일종의 편지를 쓰는 느낌이다. 가끔 속을 썩인 학생이지만 그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세특을 쓰다 보면 나의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까지 든다.

그런데도 여전히 불편한 것은 개인의 수행 정도를 수치화해야 하는 시스템을 병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훌륭히 많은 것을 해낸 학생에게 96점을 줄 것인가, 98점을 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순간이야말로 정말 불필요하고 불편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애초에 대단히 불성실했던 학생이 눈부시도록 성장을 한 경우, 그의 성장을 세세하게 적어주는 것이 병행되겠지만 결국 절대평가의 점수가 80점을 넘지 못하면 성취도는 C가 된다. 정말 노력하고 개과천선하여 새사람이 된 학생에게 72점의 점수를 부여할 권리가 과연 나에게 있을까.

더 큰 문제는 세특을 쓰는 작업이 대학 입시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생활기록부의 내용은 한 학생의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총정리가 되어야 하고, 성장의 세밀한 기록이 되어야 한다. 어떠한 것의 방법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하며 아무런 의도가 없는 총체적이며 긍정적인 종합 기록이 되어야 한다.

일반계(인문계) 학교에 담임으로 근무했을 때 해마다 들었던, 상위 20% 정도만 신경 써주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라는 말은 그러한 현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우리 학교는 입시와 경쟁을 지양하고 참 배움을 지향하고 있지만, 평가에서만큼은 그 관성을 벗어나기 힘들다.

꿈을 꾸어보자면 이렇다. 학생의 선발은 대학이 알아서 했으면 좋겠다. 고등학교에서는 학생의 행동이나 교과 세부 능력을 기록할 때, 입학사정관 등에게 보여줄 목적인 아닌 진정으로 한 학생의 변화에 관해 서술할 수 있으면 좋겠다.

절대평가를 하되, 해당 학생의 성취도를 점수화하기보다는 세부적인 변화와 학생이 직접 탐구하여 알게 된 것에 대해 기록하는 방식이기를 바란다. 전체에서 해당 학생의 수준이 얼만큼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냐는 반문을 한다면, 애초에 절대평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답변을 하고 싶다.

이렇게 평가가 바뀌면 지금보다 훨씬 더 귀찮고 힘든 작업이 될 수 있다. 그런 만큼 학습의 양을 줄이고 질을 높여서, 욱여넣는 식의 공부가 아니라 자신이 뭘 배웠고 어떤 변화를 경험했는지 충분히 반추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대학이나 직장에서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는 분야는 공부의 양과 수준이 매우 높아야 할 수 있다. 그런 꿈을 가진 학생은 그렇게 학습할 수 있도록 해주면 된다. 어떠한 집단에서 소위 말하는 우등생에게 1등급이라는 타이틀을 주기 위해, 대다수가 원하지 않는 공부를 하며 바닥과 중간을 깔아주는 방식의 평가와 학습을 하지 말자는 얘기다.

눈에 띄게 주체적으로 된 아이들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더 하자면, 올해는 아이들의 성장을 잘 관찰하지 못했다. 12개나 되는 곡을 직접 만들다 보니, 아이들과 함께 있는 수업 시간에도 뮤지컬 강사 선생님에게 안무와 연출을 맡겨두고 한 구석에서 오선지에 얼굴을 묻어야 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긍정적인 변화, 특히 에너지의 상승이 많이 느껴졌다. 매우 착하고 순하지만 자신의 의견이나 창의성을 발하지 못했던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이들은 눈에 띄게 생동감이 늘었고 수업이나 다른 교육활동에서 자신의 의견을 내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거울 앞에서 안무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학생들
▲ 안무 연습 중 거울 앞에서 안무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학생들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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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과정으로만 그런 효과를 낸 것은 아니다. 직접 손으로 만들어야 하고, 손수 자료를 제작하여 발표를 해야 하며, 몸으로 부딪쳐 야생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다양한 수업의 결과이다.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를 완성하고자 하는 욕구가 길러진 듯하다.

일례로, 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해 으름장을 놓는 방식이 참 재미있다. 보통 선생님들은 학생에게 수업이나 과제를 독려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곤 하는데, 나는 정반대의 방법을 쓰곤 한다. 아래와 같은 대화가 펼쳐진다.

"너희들 자꾸 이런 식이면 나 뮤지컬 그냥 포기하고 안 만들어버린다."
"아니, 선생님. 그건 아니죠. 한번 시작한 것은 완성해야죠."
"선생님. 빨리 열심히 일하시라구요. 진짜로 이러다가 뮤지컬 완성 못 하겠어요!"


때로는 이런 식의 협박 아닌 협박도 이뤄진다.

"너 자꾸 그렇게 되지도 않는 걸로 투정 부리면 나 오늘 빨리 퇴근할 거야."
"무슨 소리예요. 쌤. 제가 언제 투정을 부렸다고 하세요. 퇴근이라니요. 오늘 이거 다 녹음해야죠."


만약 자신이 완성해야하는 뮤지컬이 어떤 또다른 목표를 위한 수단이고 자신의 수행 능력이 서열화 되어 누군가에게 제공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면 어땠을까. 과연 이 아이들에게 이러한 자발적인 에너지가 생겼을까. 절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청소년의 무기력증이 꼭 이러한 평가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무관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적지 않은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패배자라고 생각하고, 학교에 다닐 의미가 없다고 여긴다.

만약 등급과 점수가 아닌, 선생님의 따뜻한 시선으로 적어주는 서술식 기록이 주된 평가가 된다면 훨씬 더 많은 아이가 자신의 행동 변화를 목격하고 더욱 진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패배를 피하려는 동기보다, 자신의 성장을 알아가는 감동이다. 너무 낭만적인 시각이라고 생각하는가.

맞춤법이 서툰 자녀에게 가정학습을 시키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받아쓰기 시험을 보고 틀린 개수를 공개하며 동기를 부여하는 부모와 자녀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저번보다 이번 편지에서 나아진 점을 칭찬하며 동기를 부여하는 부모가 있다고 할 때 어떤 아이가 자아효능감이 더욱 높아질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어쨌든 올해의 평가를 마무리해야 한다. 작품 제작을 하느라 미뤄둔 동료평가, 자기평가지 작성 등을 할 생각에 숨이 턱 막힌다. 하지만 그 과정을 마쳤을 때, 아이들의 성장이 여러 편의 짧은 글로 표현되었을 때, 그것을 아이들이 직접 보고 자신의 변화를 마주했을 때 나의 마음이 얼마나 벅찰 것인가를 생각하면 용기가 다시 생기곤 한다.

아래는 마지막 무대로 연결되는 세 곡이다.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기에 하나의 파일로 되어있다. 앞부분도 녹음이 약간 완성되지 않았고 마지막 부분은 학생과 나 둘만의 목소리로 가이드 녹음만 해 둔 버전이다(바로 가기).
 

이 곡뿐 아니라 8곡의 녹음을 꾸역꾸역 완성해야 한다. 갈 길이 멀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게슈탈트를 완성하고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아이들이 있기에 나 또한 힘을 내게 된다. 올해의 미진한 평가를 개선하여 내년에는 조금 더 성숙한 평가자로서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결심 또한 해본다.

태그:#대안교육, #미래교육, #창작뮤지컬, #43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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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인 '고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필름카메라를 주력기로 사용하며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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