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438년, 고구려 영토인 요동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북연의 황제였던 풍홍이 고구려 장수에게 참수당한 것.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장수왕 26년에는 "왕이 풍홍을 남쪽으로 보내고 싶지않아 장수 손수와 고구 등을 보내 풍홍을 북풍에서 죽이고 아울러 그의 자손 10여 명도 죽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역대 중국 왕조의 황제를 통틀어 한반도의 국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풍홍이 유일무이했을만큼 초유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바로 고구려의 제왕 장수왕이 있었다.
 
4일 방송된 KBS 1TV <역사저널 그날> 387회에서는 '고대 동아시아 외교전쟁' 시리즈 1편으로 '고구려 장수왕, 중국 황제를 참수하다' 편을 다뤘다.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대왕과 함께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다. 왕호에 걸맞게 재위기간만 무려 79년 2개월에 이른다. 하지만 한민족 최대의 정복군주로 불렸던 아버지의 화려한 업적에 상대적으로 가린데다 고대사 기록의 부족으로 인하여 그 업적이 충분히 조명받지못하여, 긴 재위기간에 비하여 드라마틱한 활약이 없는 '노잼' 군주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장수왕의 업적이야말로 오히려 광개토대왕에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동서양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으나 정작 그가 사망한 이후에는 후계자들의 한계로 인하여 제국이 분열되는 결말을 초래했다. 하지만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사후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장수왕 치세에 더욱 번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중심에는 장수왕의 탁월한 '외교적 역량'이 있었다는 게 학자들의 분석이다.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전쟁을 통한 '정복' 분야에 특화된 군주였다면, 장수왕은 80년에 이르는 치세동안 단 한번도 중국과의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무력보다는 외교를 통하여 대외관계를 안정화시킨 장수왕의 능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장수왕 치세의 중국은 당시 5호 16국 시대의 혼란기였다. 여러 민족과 국가가 난립하던 화북은 신흥 강국 북위에 의하여 하나씩 통일되어가고 있었고, 남쪽은 한족이 세운 유송(고려시대의 송나라와 구분하는 명칭)이 건국되어 남북조 시대라고도 불린다.

북연은 한때 요서와 화북일대를 차지한 강국이었던 전연과 후연을 계승한 국가였다. 광개토대왕 시기에 고구려와 후연은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던 라이벌 국가였다. 북연은 말기에 이르러 화북통일을 노리던 북위의 기세에 밀려 세력이 점점 약해졌다.

장수왕은 435년 북연 황제 풍홍, 436년에는 북위 황제로부터 각각 은밀한 외교 문서를 전달받는다. 전자는 전쟁에서 밀린 북연의 황제 일가가 고구려로 망명하여 후일을 도모하려고 하니 받아달라(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23년)는 요청이었다.

후연 시절과 달리 북연과 고구려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북연의 존재가 북위라는 강국의 위협을 막아주는 완충지대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러시아와 서방세력 사이에서 완충지대를 하고 있었고,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이 러시아 침공의 명분이 된 것과 비슷하다.
 
반면 북위가 보내온 문서는 북연 토벌 계획을 알리고 있었다. 군사를 일으키지만 목표는 오직 북연이고, 고구려를 침공할 계획은 없으니 경계하지 말라고 안심하라는 메시지였다. 이는 한편으로 고구려로 하여금 북연의 편에 서지 말라는 협박성 경고장이기도 했다.

 장수왕은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예고한 대로 북위는 전쟁을 일으켰고 파죽지세에 밀린 북연은 수도 화룡성만을 남겨놓고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인다. 그런데 북위군보다 한발 앞서 장수왕이 보낸 고구려군이 나타나 먼저 수도를 접수한다.

고구려군은 화룡성의 재화를 약탈한 뒤, 북연 황제 풍홍과 백성들을 모두 데리고 성을 비우고 고구려 땅 요동으로 철수했다. 삼국사기에는 기병을 거느리고 후미에서 방진을 이루며 회군하는 고구려군의 위풍당당한 행렬이 앞뒤로 80여 리가 이어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북위군은 갑자기 나타난 고구려군에 당황하여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이 장면은 고구려 역사의 명장면이자, 국제관계에서 무력과 외교의 양면 전략을 능수능란하게 오간 장수왕식 외교의 극치로 꼽힌다. 재화와 사람은 고구려가 취하고 영토는 북위에게 넘겨준 것이다.
 
군대를 일으켰지만 전쟁은 하지 않았기에 북연 정복을 막지 말라는 북연의 요구를 어기지않았고, 동시에 자신들을 살려달라는 북위의 요구도 들어준 셈이 됐다. 또한 고구려 최정예군의 강력한 위세를 북위와 북연에게 동시에 보여줌으로서 중국 왕조에게 고구려를 쉽게 넘보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남기며 국제적인 존재감까지 드러냈다.

성공적인 임무 수행을 위하여 중요한 것은 많은 지식이나 정보보다도, 리더의 정확한 판단력에 있다. 화룡성 입성과 철수 작전은 그 과정에서 한발만 삐끗해도 자칫하면 북연과 북위를 모두 적으로 돌릴 수 있고, 언제든 전면적인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었던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장수왕은 이러한 수많은 변수 속에서도 매번 치밀한 계획과 정확한 판단력으로 충돌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어찌보면 위험한 도박이지만 그만큼 전쟁까지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외교적으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편으로 고구려로 이주하게된 북연의 주민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도 새로운 문제로 떠올랐다. 예나 지금이나 난민 관리 문제는 국제정치의 난제 중 하나다. 북연은 한족 국가은 아니었지만 중화문명을 수용하여 융성했던 국가였고, 장수왕은 북연 이주민들의 요동지역에 정착시켜 이들의 문화적-사회적 역량을 적극 활용했다.

작전은 성공했지만 북위와의 외교적 문제가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분노한 북위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풍홍을 압송할 것을 요구했다. 장수왕은 "마땅히 풍홍과 함께 위나라 임금의 가르침을 받들겠다"는 모호한 내용의 답서를 보냈다. 겉보기에는 마치 북위에 복종하고 장수왕이 풍홍과 함께 북위로 집적 가겠다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도 장수왕의 절묘한 외교적 수사가 돋보인다. '가르침을 받들겠다.'는 진짜 의미는 "위나라와 싸울 의지가 없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풍홍과 함께'라는 단서를 붙인 것은 곧 "풍홍을 보내지 않겠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겉으로 북연 황제의 마음을 달래며 예의를 다 갖추는 듯 하면서 동시에 확실한 거절의사도 밝힌 것이다. 오늘날도 외교언어의 상징으로 꼽히는 NCND(Neither confirm not deny,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음)의 정석에 가까운 표현이다.
 
최근의 한중관계에서도 의미심장한 외교적 수사가 등장한 사례가 있다.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이 NATO 회의에 참석하여 "중국을 통한 호황의 시대는 끝나간다"며 대안시장을 중요성을 강조하자, 곧바로 중국은 외교부 성명을 통하여 한중경제의 연관성을 강조하며 고사성어를 통하여 "내 속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다"는 우회적인 표현으로 반박한바 있다.

흔히 외교관의 언어에는 'NO'라는 단어가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국제외교에는 선악이나 정답이 없고 이후로도 계속 관계를 이어가야 하는 만큼 사사건건 모든 것을 명확하게 정리하고 결론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래한 개념이 바로 '전략성 모호성'이다. 빙빙 돌려말하는 완곡어법이 답답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모호한 외교적 언어를 통하여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관련된 국가 모두 정치적 운신의 폭이 넓어지는 효과가 있는 것.

이러한 장수왕의 승부수에도 치밀한 계산이 뒷받침 되어 있었다. 장수왕은 북위가 강성하기는 하지만 아직 고구려와 전면전을 벌이기는 부담스러운 상황임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한편 장수왕의 또다른 과제는 고구려로 망명한 이후의 풍홍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것이었다. 장수왕은 요동에 있던 풍홍에게 사신을 보내 "용성왕 풍군이 이곳까지 와서 노숙을 하느라 군사와 말이 고달프겠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26년)라는 편지를 전한다.
 
겉보기에는 위로를 하는 것 같지만, 북연의 황제였던 풍홍을 일부러 한낮 지역의 왕으로 낮춰부르며 서열을 분명히 정한 것이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망명정부인 풍홍의 북연 세력이 훗날 요동을 점거하고 황제로 군림할 수 있는 위협을 사전에 방지하고, 북위와의 관계 악화를 경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분노한 풍홍은 남쪽의 유송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을 받아줄 것을 청하는 또다른 외교적 승부수를 던진다. 삼국사기에는 "풍홍이 망명한 이후에도 고구려를 업신여겨 정형과 상벌을 자기 나라에서 하듯이 하였다"고 기록하며 고구려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송은 풍홍의 제안을 받아들여 군대를 파병하고 고구려에 풍홍을 인계할 것을 요구한다. 장수왕은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풍홍을 송으로 보내면 북위를 자극하게 되고, 보내지않으면 송과의 충돌을 피할수 없는 상황. 풍홍은 이미 송나라 군대를 만나기 위하여 가족과 백성을 이끌고 남하하고 있는 중이었다.
 
장수왕의 최종 선택은 풍홍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장수왕의 명을 받은 고구려 군대는 풍홍을 사로잡고 일가족을 모두 참수했다. 나라를 잃고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망국 군주의 비참한 결말이었다. 장수왕의 선택이 비정해보이기는 했지만 고구려 입장에서는 망명 이후에도 계속해서 자국내에서 문제를 일으키는데다 외교적 위기를 초래한 풍홍을 결코 용납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풍홍 사건은 중국 왕조의 황제에 굴욕적인 최후를 선사한 유례없는 역사적 장면을 남겼다.
 
풍홍이 죽은 후에도 사건의 여파는 끝나지않았다. 뒤늦게 도착한 송나라 군대는 풍홍이 죽은데 분노하여 고구려군을 습격하여 장수를 살해한다. 보고를 받은 장수왕은 대군을 파견하고 송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장수를 사로잡았다. 여기서 장수왕은 또 한번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외국의 군대가 자국 내에서 문제를 일으킨 상황에서 보복하면 전쟁 위기가 되고, 참고 넘어가면 자국의 위신에 문제가 생긴다.
 
"The ball is in your court." 외교에서 많이 쓰이는 말로 "결정은 너에게 달렸다"는 의미다. 장수왕이 내린 해법은 문제의 결론을 송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장수왕은 사로 잡은 송의 장수를 송황제에게 돌려보낸다. 송군의 고구려군 살해를 황제의 명령없이 장수의 독단적으로 내린 행동으로 규정한 것. 송 황제가 처벌하지 않으면 고구려와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것이고, 스스로 처벌하면 사건을 그 정도선에서 마무리지을 수 있다. 송과의 국제갈등을 최소화하며 선택의 부담을 고스란히 송나라에게 넘긴 장수의 또다른 절묘한 외교적 한수였다.

송나라도 내심 난처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송도 북위와의 관계가 있었기에 고구려와 대놓고 척을 지기는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송은 결국 장수를 감옥에 가뒀으나 사태가 가라앉고 나서 풀어줬다. 고구려도 송도 더 이상 서로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외교적 합의를 이룬 것이다. 장수왕은 언제든 전쟁으로 번질수도 있는 고대의 국제정치에서 냉정하고 실리적인 균형외교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았다.

한민족의 역사에서 외교의 상징으로 불리우는 인물은 고려 시대에 협상으로로 거란과의 전쟁을 끝내고 영토까지 확보한 서희를 꼽을수 있다. 하지만 장수왕 역시 서희 못지않은 외교의 달인이었다. 장수왕은 이후로도 상황에 따라서 때로는 유송과, 때로는 북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거리 외교'로 중국 왕조와의 군사적 충돌 없이도 안정된 대외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이러한 장수왕의 노력으로 인하여 고구려와 중국은 약 200여 년간 평화로운 관계가 이어질 수 있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반도는 어느 한 쪽을 일방적인 적으로 돌리지않는 '다자외교'가 중요한 환경에 놓여있다. 강성한 힘과 유연한 협상력을 겸비한 과거의 고구려처럼 어느 한편에 서기보다 최대한 많은 외교적 수단이 확보하는게 중요하다는 게 장수왕이 오늘날의 한국에게 남기는 값진 교훈이 아닐까.
장수왕 풍홍 역사저널 균형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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