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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03년, 대학교 1학년 때 일이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유독 잘해준 선배가 있었다. 밥 사주고 술 사줘서 마음을 열었더니, 어느 날 내 손을 잡아끌며 허름한 동아리 방으로 데려왔다. 지금 시국이 이런데 무슨 학점 관리냐며, 우리는 전공 책이 아니라 이런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던져준 한 권의 책이 있었으니 구해근 선생의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이었다.

졸린 눈을 참아가며 꾸역꾸역 읽었던 이 책의 가치를 그때는 몰랐다. <한국 노동 계급의 형성>이 한국의 노동계급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운동을 펼쳤으며 어떻게 주체적으로 성장했는지를 다룬 한국 사회의 기념비적인 저작이라는 걸 깨닫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지나 자발적으로 이 책을 읽고 나서였다. 이 생각은 2022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좋은 책이란 게 그렇다. 세월의 흐름에 바래지지 않는다. 구해근이라는 이름은 내게도 깊이 남았다.

그렇게 20년이 지나 구해근 선생이 돌아왔다. 그동안 한국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과 변화에 주목해 온 선생의 이번 주제는 '중산층'이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한국 중간계급의 분열과 불안을 분석하고 진단한다. 그러고 보면 그때 그 시절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함께 읽었던 내 선배 대부분은 이제 '꽤 부유한 중산층'이 됐다. 자식 교육을 위해선 강남에 살아야 하고, 더 좋은 차, 더 넓은 평수의 집에 목을 멘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노동과 투쟁과 계급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주식과, 부동산과 코인 정보를 나눈다. 여전히 불안하고, 치열한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이런 사회를 과연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제는 '어떻게 하면 더 풍족하게 살 수 있는가'가 아니라 '왜 이렇게 됐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봐야 할 때는 아닐까? 어쩌면 지금 선생이 다루고 있는 건 한 시절 밤을 세어가며,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읽었던 이들의 오늘인지도 모르겠다. 관련해 지난 11월 24일 <특권 중산층>의 저자 구해근 교수를 만났다.

불평등 구조
 
구해근 교수.
 구해근 교수.
ⓒ 구해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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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출간한 이후 무려 20년 만에 신간을 출간했습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2017년에 정년 퇴직을 했고요. 믿지 못할 수 있겠지만 쭉 책을 만들면서 지냈습니다(웃음). 제가 사실 책을 쉽게 쓰지 못하는 타입입니다. 나름대로는 공을 많이 들이는 편이고, 충분하다고 생각할 때 내보냅니다.

이번 책 역시 찾아봐야 할 자료도 많았고, 그에 대한 분석이나 이런저런 공부에도 꽤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쓰는 데 10년이 걸렸고, 이번 책은 5년 정도 준비했습니다. <특권 중산층>은 처음엔 영어로 나왔습니다. 원래는 서구의 사회과학자들을 비롯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었어요. 이걸 단순히 한국어로 바꿔서 내자니 좀 마뜩잖더라고요. 그래서 거의 새로 쓰다시피 했습니다.

책을 쓰면서 목표가 있다면 사회과학적으로 의미 있으면서도, 독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론적으로는 우수하지만 독자가 읽기 힘들거나, 혹은 독자들에게는 센세이션을 일으키지만 학문적으로는 빈약한 책은 쓰고 싶지 않습니다. 그 두 가지 목표를 충족시키려다 보니 책 한 권 세상에 내보내기가 쉽지 않네요."

- 책 한권이 '뚝딱' 만들어져 나오는 시대에 한편으로 참 대단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나온 이번 책은 생각하신 목표를 다 이뤘다고 판단하시는지요?

"그건 학계와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웃음)."

- 그동안 쓰신 논문과 책을 통해 짐작해보면 선생님의 관심사가 영세 자영업자(1974년)에서 노동자 계급(2002년)으로, 그리고 이제 중산층(2022년)으로 이어져 온 것 같다는 생각인데 이유가 있을까요?

"이제와 돌아보면 초점은 한국 사회의 변화에 맞춰져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197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 인구 상당수가 농촌에서 도시로 와서 정착하기 위해 노력하던 때였습니다. 그때 자영업자 비중이 상당히 컸어요.

그 사람들이 도시에서 공무원을 한다거나 대기업에 들어가는 경우는 흔치 않았지만 영세사업이나 자영업을 통해 성공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자영업이 신분 상승을 도모할 수 있는 사회였다는 거예요. 저는 그것이 서구사회와는 다른 한국이나 개발도상국의 중요한 현상이라고 파악했습니다.

이후 1980년대 들어와서 산업화를 이루는 사회가 되면서 생산 노동자들이 가장 중요한 계급으로 대두됐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분석하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고요. 최근에 와서 점점 세계화되고 신자유주의화 되는 사회에서 변화하는 사회와 불평등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산층을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 각각의 세 가지 관심사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한다면 결국 한국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불평등 문제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불평등 문제에 천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선 제 가정 배경입니다. 저희 부모님이 바로 영세 자영업자셨고, 교육을 별로 받지 못하신 분들입니다. 그러다 중학교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고,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라면서 불평등에 대해서 민감하게 느껴왔던 것 같아요.

또 하나는 좋은 사회학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학에서는 불평등과 계급의 개념을 중요하게 다루는 만큼 계급 문제를 제대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끊임없이 계급적인 눈으로 사회변화를 봐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사고방식, 삶의 형태, 정치적 의식 등 대부분이 계급과 관련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이런 문제를 분석하고, 연구하고 글을 쓰게 됐습니다."

- <특권 중산층>에 관해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우선 어떤 책인지 직접 소개해주신다면요?

"<특권 중산층>은 중산층, 중간 계층을 다루는 책입니다. 물론 한국 사회를 파악할 때 빈곤층이나 노동자층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빈곤층과 부유층은 좀 단순화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간 이런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았고요.

하지만 중산층에 관한 문제는 굉장히 이질적이고 복합적입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내부적인 분화도 크게 일어났습니다. 중산층 내에서 벌어진 격차나 양극화 또한 중요한 문제인데 이런 지점들에 대해서는 연구도 많이 돼 있지 않고,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려는 측면이 있습니다.

저는 중산층이 한국 사회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특권 중산층>은 중산층을 통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진행되는 불평등 구조의 변화를 분석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권 중산층> 표지 이미지
 <특권 중산층> 표지 이미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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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 내의 불평등을 간과했을 때 놓치는 문제들

- 궁금한 점은 불평등 문제와 중산층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나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생각해보면 저소득층이나 부유층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양극화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위 1% 대 하위 99%' 같은 구호가 익숙하지 중간 계층의 양극화는 생소한 측면이 있죠.

"당연히 양극화 문제에서는 부유층과 빈곤층도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중산층 내에 불평등도 중요하다는 거지, 중산층 내의 불평등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과의 불평등보다 더 중요하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중산층 내의 불평등을 간과했기 때문에 놓치는 문제가 분명히 있습니다. 

우선 중산층의 규모 변화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198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 국민의 대략 75%가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했는데 현대에 와서 40% 정도로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객관적으로 사람들의 직업이나 소득 수준을 보면 아직도 60% 정도를 중산층이라고 볼 수 있는데 말이죠. 왜 이런 인식 변화가 일어났는가가 하나의 초점이 될 수 있을 것 같고요.

또 하나로 한국 중산층의 실제 소득 구조를 보면 그간 상위 10%의 평균 소득이 상위 1%에 속하는 층들만큼 빠르게 증가한 반면 나머지 90%는 정체하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한국 사회에서의 경제적 양극화가 최상위 1%와 하위 99%를 가르는 선이 존재하는 동시에 상위 10%와 하위 90% 사이에도 놓여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신 상류 중간계급', 이번 책에서 '특권 중산층'으로 명명한 계층으로 인해 야기되는 많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 선생님께서는 이런 특권 중산층들의 계급적 특징으로 소비, 주거, 교육 세 분야를 꼽았습니다. 이 인터뷰에서 다 다룰 수는 없을 것 같고, 소비에 대해서만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계급 부유층이 등장하면 일종의 계급 차별화를 꾀하는데 가장 가시적으로 나타는 게 소비입니다. 집, 차, 의류, 핸드백, 구두, 가전제품 등이죠. 갖가지 럭셔리 상품, 혹은 사치품들이 명품이란 이름을 달고 들어옵니다. 미국이나 영국 같은 세계 자본 시장이 점점 축소되면서 한국 처럼 급격히 발달하고 부유한 국가가 된 나라를 집중공략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소비 경쟁을 더욱 부추기죠. 한국은 특히 강남이 중요해졌는데요. 경제적으로 비슷한 층들이 몰려살면서 서로 경쟁하고, 그 수준이 점점 올라갑니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쪼들리면서 모방하는 소비 풍토가 생겨나기도 하고, 가짜 상품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최근까지만 해도 중산층이 동질적이었으니 남에게 밀리는 것을 싫어하는 데다 쫓아가려는 성격이 강하니까 경쟁이 더 치열해지면서 가계가 나빠집니다."

- 하지만 특권 중산층의 소비 행태는 소스타인 베블런이 1989년에 쓴 <유한계급론>에서 얘기했던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현재 특권 중산층만의 특징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 아닐까요?

"자신의 신분을 아래층과 구별시키려는 욕구나 동기, 행동은 같다고 할 수 있지만 사회적인 환경이 달라졌다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세계화를 통해 세계 시장은 계속 다양해지고, 더욱 고급의 상품들을 공급합니다. 그러면서 예전엔 비지위재였던 게 이제는 지위재가 되지요. 소비가 고도로 발달하면서 자본 측에서 최신의 기술과 과학적인 지식을 통해 고급 상품을 계속 만들면서 새로운 종류의 소비와 새로운 종류의 상품이 신분 차별의 중요한 요인으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몸매나 성형 등이 있습니다. 이제는 잘 관리된 몸매, 예쁜 얼굴이 자신의 지위를 나타낼 수 있는 하나의 소비행위가 됐습니다.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말했던 럭셔리 상품들은 이제 완전히 대중화 되면서, 웬만한 사람들이 다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더 고급인 초 럭셔리 상품이 등장했고, 사람들 사이에선 더 배타적인 걸 추구하는 성격이 사뭇 더 강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문제인가

- 그럼 이런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이게 왜 문제인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진 사람들이 더 좋은 걸 쓰고, 못 가진 사람들은 더 잘살기 위해 노력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 아닌가요?

"저는 한국 사회가 지나치게 경쟁적이고 소모적이며 불안이 만연한 사회라고 봅니다. 아마 이 점에 관해서는 많은 사람이 동의하리라 믿습니다. 한국 사회는 왜 이렇게 됐을까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적 불평등에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 사회, 특히 젊은 층에서는 불평등보다 공정이 더욱 중요한 이슈로 등장했어요. 그러나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지 않고는 진정한 공정을 성취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회적 불평등이 심각한 사회에서는 게임의 룰이 공정하게 지켜진다고 해서 진짜로 공정한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비를 통한 과도한 신분 경쟁과 사교육을 통한 치열한 교육 경쟁은 많은 면에서 부유 중산층이 선도하고 있고 일반 중산층은 그 뒤를 허덕이며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런 경쟁은 전 사회를 소모적으로 만들고 불안한 사회로 만들어 승자와 패자 둘 다 행복할 수 없게 만듭니다."
 
2021년 11월 9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에서 학생들이 오가고 있다.
 2021년 11월 9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에서 학생들이 오가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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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 중산층들이 불안하다는 지점은 알겠는데, 이미 많은 것을 가진 '특권 중산층'은 어떤 불안 요소가 있나요?

"이들의 불안은 교육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위 1%에 해당하는 층들은 별로 불안할 게 없어요. 충분히 계급세습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사업체나 재산을 물려주면 그만이죠.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특권 중산층은 얘기가 다릅니다. 자기 자식들도 같은 위치에 있길 바라죠. 계급세습을 원하는데 이런 만연한 경쟁 사회에서 계급세습을 성취하는 건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자녀들 사교육 투자가 엄청나죠. 그렇다고 해도 100% 결과를 보장할 수 없어요.

한 발만 잘못 디디면 언제든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사회입니다. 정상적인 것만 해서는 안될 것 같으니 비정상적인 걸 추구합니다. 공직자들의 청문회 같은 것만 봐도 자녀 교육에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튀어 나옵니까? 이런 초 경쟁적인 사회에선 최상위 계층을 제외하곤 모두가 불안을 품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마디.

"한국 사회는 지금 일종의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건 이 게임의 룰이 공정해야 한다는 외침이 아니라, 왜 그런 게임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어느 세대보다 힘들고 불안하게 살아가는 요즘의 젊은이들이 이 책을 통해 함께 질문하고, 함께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여, 신 상류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매개로 자신이 속한 계층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합니다. 책 후기에서 솔직히 얘기했지만, 저도 특권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이고 저의 친지들도 대부분 비슷한 위치에 있습니다. 모두 선량하고 어떤 면에서 모범적인 시민이지만 우리가 열심히 추구하는 명예나 자식의 성공모델이 과연 바람직한지, 그리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한번 진지하게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특권 중산층 - 한국 중간계층의 분열과 불안

구해근 (지은이), 창비(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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