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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압사 참사가 발생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나간다. 2014년 세월호에 이어 전 국민을 또 비탄에 빠뜨렸다. 뜻밖의 사고가 언제 어디에서 일어날지 불안하다. 이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국가 기능은 잘 작동하고 있는지 부쩍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마침 이런 시대 흐름을 읽는 데에 2018년에 출간된 조한혜정 교수의 <선망국의 시간>이 좋은 참고가 된다. 불안의 원인을 파악하고 해법을 탐색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 교수는 평생 시대를 탐구하며 실천적 담론을 생산해 온 70대 노학자이다. 1980년대에는 '또 하나의 문화'로 여성주의적 공론의 장을 열었으며, 1990년대에는 '하자센터'를 설립하여 대안교육의 장에 참여했다. 2000년대에는 서울시에서 지역 공동체 활성화에 함께 했다. <선망국의 시간>은 2015년~2018년까지 그가 각종 강연과 지면에서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펼친 제언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선망국의 시간>, 조한혜정 저
  <선망국의 시간>, 조한혜정 저
ⓒ 사이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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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저자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아닌 선망국(先亡國), 즉 먼저 망하는 나라가 되어간다고 진단한다. 압축성장과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성공적으로 선진국에 진입한 듯 보였으나, 저출산 고령화, 계급 양극화, 시대착오적 교육제도, 높은 주거비와 고용불안 등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급속히 망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무엇보다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국가의 역할과 금권을 숭상하는 세태에 주목한다. 토건사업으로 이익 챙기기 급급했던 이명박 정권과, 무능과 불통의 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오로지 경제적 이익에만 골몰하는 사회분위기가 심화되었다고 한다.
 
"… 글로벌 시장이 주도하는 세계 체제에 깊숙이 편입한 한국은 '자산가치의 극대화'라는 지상명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생부터 노인까지 펀드에 가입하고 부동산 투자로 수입을 올리는 일에 골몰하는 인구가 급증했습니다. 자신의 몸까지도 자산 가치화함으로 유치원 때부터 몸값 높이기 경쟁이 시작되고 세계 어느 나라보다 주저 없이 얼굴과 몸을 뜯어고치는 성형왕국이 만들어졌습니다."(14쪽)

이런 분위기 속에서 2009년 용산 참사와 2014년 세월호는 국민을 보호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국가 권력의 민낯을 생생히 드러내었다. 이는 광장의 촛불로 이어졌고 국민은 급기야 대통령을 갈아치우는 사건을 만들어 내었다. 책에 따르면, 한 번의 투표로 국민의 운명을 맡아 국정을 운영하는 대의제가 더 이상 안전하고 신뢰할 수 없는 제도라는 것을 시민들이 서서히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221쪽) 

이 같은 저자의 시대 진단은 오늘날 다시 모이기 시작한 광장의 촛불에게도 유효해 보인다. 새 정부 출범 후 6개월도 안 돼 이태원 참사를 겪은 시민들이 든 촛불의 의미를 짐작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세대간, 성별간, 지역간 적대감과 우울감이 팽배한 사회의 공기도 고찰한다. 이는 사회 문제들을 풀어낼 공론의 장을 갖지 못해온 데서 기인하는데, 특히 '공공재'로서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교육과 돌봄을 주목한다. 즉, 독박 육아에 지치고 불안한 엄마들은 자녀의 주체성을 과도하게 침해하고 있고, 시대에 뒤떨어진 학교 교육은 시대 문제를 풀어낼 인재를 키우지 못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청년세대는 정규직은 고사하고 집값과 결혼과 육아비용을 감당치 못해 각자도생으로 생존하기 급급하다. 이는 내면의 위기로 이어져 많은 이들이 우울증, 조울증, 섭식 장애, 피해망상과 과대망상, 주의산만증, 대인기피증, 공황장애와 면역결핍장애를 앓고 있다고 지적한다.

결국 문제들은 산적한데 이를 논의할 장은 없고, 국민의 삶과는 동떨어진 채 중앙집권적 국가권력만이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고 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또한 전 지구적으로 제기되는 생물의 종 다양성의 위기 문제, 기후변화와 환경오염도 해결이 시급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국가시스템은 잘 작동하지 않고 있다. 

저자는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론'을 상기시키며 이런 현상이 자본주의 체제가 붕괴하는 징후이고, 근대국가가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저자는 이제 우리가 국가와 시장단위가 아닌 지역과 마을 단위에서 일상의 전환을 이뤄가는 시스템을 구성해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98쪽) 

그리고 이런 시도를 자발적으로 시작한 사람들을 소개한다. 영국 남서부 인구 20만의 소도시 토트네스가 그 예이다. 이 도시 주민들은 2006년부터 기후변화와 석유자원의 고갈에 대응해 지역공동체를 활성화시키는 전환마을을 시작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이 토트네스를 모델로 삼은 시도들이 이어졌는데, 에즈원 커뮤니티 같은 새로운 모델도 등장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적은 돈을 가지고 협력해서 재미있게 사는 청년들이 등장했다고 하니 반갑다. 인천시 검암동에 '우동사', 용산의 '빈집'과 '빈고', 제주도의 '재주도 좋아'가 그런 곳들이다. 
 
"어울림을 통해 새로운 생각이 나고 열정이 생기고 창의성이 샘솟는다. 좀비가 되지 않고 생기 있는 사람이 된다... 그 공간에서 놀며 그간 익숙해졌던 독점적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몸을 바꾸어낼 수 있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수시로 장터가 열리고 상호부조의 활동들이 일어나고 잔치가 벌어지는 곳이다. 재난 상황이 닥쳐도 질서가 유지되고 자급자족이 가능한 동네다."(230쪽)

저자는 또한 이런 새로운 시도들이 확산되기 위해서는 당장 먹고살기에 급급하지 않도록 사회적으로 최소한의 뒷받침이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북유럽 국민들이 소득세를 높여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내었듯, 우리도 소득격차를 줄이고 합리적 증세로 제도를 마련하자고 한다. 기본소득과 청년배당 또는 시민배당이 그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생존의 걱정을 던 청년과 시민들이 어울려 하고 싶은 일을 작당하고 탐색하는 가운데 이 위험사회를 해결해 나갈 일상의 정치, 삶의 정치를 구현해 낼 수 있다고 예견한다. 개인부터 시작해 글로벌까지 연결되는 새로운 '정치적 실천의 장'을 열어가기를 희망한다. 

강연과 칼럼에서 이미 발표한 말과 글들을 묶어놓다 보니 주장이나 설명이 앞 뒤로 중복되는 면이 있다. 또한 큰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지만 지난 이슈들에 대한 몇몇 꼭지는 현 시점에서 거리감이 있는 점이 아쉽다. 우리나라에 '우동사'나 '재주도 좋아'같은 공동체가 결성되게 된 직접적 계기나 배경이 궁금한 점도 남는다. 

그러나 비관과 우울이 팽배한 이 시대를 고민하는 이라면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먹고 살 걱정은 좀 덜어내고 좋은 사람들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인간적으로 살고 싶은 이들에게도 권한다. 문화인류학자의 관점으로 저자가 읽어내는 시대 흐름과 제안들이 의미 깊게 읽힐 뿐 아니라 독자를 동감하게 만드는 힘이 있으니 말이다.

선망국의 시간 - 당신은 지금 어떤 시간을 살아가고 있나요?

조한혜정 지음, 사이행성(2018)


태그:#시대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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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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