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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가장 동쪽에 있는 종점, 지평역. 1일 편도 5~6회만 다녀서, 승강장이 매우 한산하다. 역 주변 일대도 가을 추수가 끝난 논과 아기자기한 집들로 이뤄져서 매우 고요한 분위기다. 원래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지평현이라는 독립된 행정구역이었는데, 현 단위인 것을 보면, 조선시대에도 작은 규모의 고을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한반도 전쟁 통사에서 지평역 일대는 굵직굵직한 전투들로 가득하다. 고려시대 때는 야별초가 몽골군을 몰아냈던 전적이 있고, 구한말에는 지역 유림들이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개화파 내각의 단발령에 반발해 의병을 일으켜 제천 등지에서 활약했으며, 6.25 전쟁 때는 국군과 UN지원군의 일원인 미군, 프랑스군이 중국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큰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조용한 마을이지만, 크나큰 전쟁의 역사를 겪은 양평군 지평면으로 가보자.

오늘날 평온한 분위기의 지평면과 지평향교

지평면 중심부는 지평역에서 남동쪽으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차로 오는 경우 서울이나 수도권 북부에서는 6번 국도를 타고 금곡교차로에서 내려와 용문면 광탄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70번 지방도를 따라 내려와 지평면사무소로 향하면 된다.

경기남부, 강원남부, 호남, 영남에서는 광주원주고속도로 동여주 나들목에서 좌회전하여 주암1리 교차로에서 왼쪽으로 꺾어 345번 지방도를 따라가자. 그리고 341번 지방도 지평의병로를 따라가면 나온다.      

나는 지평면의 옛 흔적을 보기 위해 지평향교로 먼저 가봤다. 향교가 설립된 건 영조 49년인 1773년. 조선 후기에 건립되었는데, 앞에는 강학공간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로 기숙사 기능을 한 동재, 서재가 있고, 뒤에는 제향 공간인 명륜당이 있는 전학후묘의 기본 구조다. 
 
강학공간인 지평향교 명륜당
 강학공간인 지평향교 명륜당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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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에 들어간 지평향교 대성전.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봉안했다.
 보수에 들어간 지평향교 대성전.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봉안했다.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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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향교가 있다는 것은 조선시대에 독립된 현이나 군이었다는 증거인데, 아니나 다를까 이는 '양평'의 유래와도 연관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양근군과 지평현이 독립된 지역으로 있었는데, 대한제국 말기에 통합되어 오늘날 지명이 된 것이다. 향교가 있으면 근방에 옛 관아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오늘날 지평교회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향교를 보고 다시 지평면으로 내려가면, 수많은 비석들과 중간에 거북등을 타고 우뚝 솟은 기념비가 있다. 뒤에 있는 수많은 비석들은 지평 현감들과 경기도 관찰사를 기린 선정비들이다. 보통 선정비에는 지방 수장들의 공덕을 기리는 글로 가득한데, 실제로 현 주민들을 다스렸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언제 어떤 현감이 부임을 했는지를 알 수 있어, 지역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중요한 자료다.
 
을미의병기념비와 수많은 비석들. 기념비 뒤로 역대 지평현감들과 경기도 관찰사들의 선정비가 있다.
 을미의병기념비와 수많은 비석들. 기념비 뒤로 역대 지평현감들과 경기도 관찰사들의 선정비가 있다.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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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큰 비석에는 '을미의병기념비(乙未義兵記念碑)'라고 적혀 있다.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시행하자 전국 유림들이 이에 통분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지평면도 이에 예외는 아니었다.     

을미의병기념비 옆에는 태극기, UN기와 한국전쟁 참전국들의 깃발이 있다. 중앙에는 두 개의 커다란 전승 추모비가 있는데, 프랑스군과 미국군을 추모하고 있다. 지평리가 을미의병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에서도 주요 전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 두 사건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는 곳이 바로 옆에 있는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이다. 
 
지평리전투 유엔군 참전 충혼비. 왼편에 있는 프랑스군 충혼비가 눈에 띈다.
 지평리전투 유엔군 참전 충혼비. 왼편에 있는 프랑스군 충혼비가 눈에 띈다.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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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지평의병 

기념관을 들어가면 1층 왼편에는 구한말 지평의병에 대한 설명이, 오른편에는 한국전쟁 때 UN군이 활약했던 지평리 전투에 대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지평면에는 또 다른 전쟁의 역사가 있는데, 고려사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辛亥 夜別抄與砥平縣人, 夜擊蒙兵, 殺獲甚多, 取馬驢來獻."
(신해(1235년 음력 10월 22일) 야별초(夜別抄)가 지평현(砥平縣) 사람들과 함께 몽고군을 밤에 공격하였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수가 매우 많았으며 말과 나귀를 노획하여 돌아와 (조정에) 바쳤다.)


오늘날 중앙선과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것처럼 지평현은 원주를 거쳐 영남으로 내려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라 예로부터 군사전략지임을 보여준다. 이는 660년과 716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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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왼편으로 가서 660년 후에 일어났던 지평의병에 대한 내용을 보았다. 일제의 을미사변과 을미개혁으로 인한 1차 단발령에 반발해 의병을 일으킨 주역은 안종응, 안승우 부자와 이춘영 그리고 이춘영의 설득으로 지평현 400명의 관군을 의병으로 이끈 김백선이다.

안종응은 화서 이항로의 문인인데, 양근군의 향사였던 이항로는 병인양요 때 서양과의 강화를 반대하고 위정척사를 주장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학자로서는 성리학 주리론 해석에도 능해서 수많은 문인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문인 중 나오는 대표적인 사람은 구한말 의병장이었던 최익현과 유인석을 꼽을 수 있다. 이춘영, 김백선을 중심으로 한 지평의진도 이들과 합류하여 원주, 제천, 충주와 단양 일대에서 활약했으니, 충청도의 을미의병은 이항로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화서학파 유림들이 주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을사늑약으로 인한 외교권 박탈과 대한제국 군대해산 이후에 일어난 1907년 정미의병 때도 지평면은 서울 진공 작전을 위한 주요 전장이었다. 그중 유명한 전투가 삼산리 전투인데, 일제는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용문사, 상원사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때 캐나다 출신 영국 데일리메일 기자가 양근군 일대에서 의병을 만나 사진을 찍었다. 기자의 이름은 프레데릭 아서 메킨지. 외국인이었지만, 오늘날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에 구한말 의병 정신을 담은 유산을 물려준 은인이자 조선의 독립을 외쳤던 사람이었다. 
 
을미년 지평의병의 주역들
 을미년 지평의병의 주역들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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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릭 아서 메킨지가 담은 양평 일대 정미의병들. 구한말 의병하면 바로 떠오르는 사진이다. 살아남은 대다수는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으로 활동했다.
 프레데릭 아서 메킨지가 담은 양평 일대 정미의병들. 구한말 의병하면 바로 떠오르는 사진이다. 살아남은 대다수는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으로 활동했다.
ⓒ 프레데릭 아서 메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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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의병이 일어난 지 44년 후. 지평면은 다시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압록강으로 북진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이후 중국군의 대공세로 다시 남쪽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후 유엔군 일부는 남한강을 방어하기 위해 지평면에 주둔했고, 5만 명이나 되는 중국군은 300여 m 정도 되는 사방의 야산을 거점으로 삼아 유엔군을 포위하고 있었다.

당시 지평에는 미군 제2보병사단 23연대와 프랑스 대대가 진지를 사수하고 있었다. 전장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남쪽에서 올라오는 기갑부대를 합류시키기 위해 리지웨이 장군은 진영 깊숙한 곳에 주된 병력을 두는 종심방어로 지평리를 사수하기로 한다.

전투는 2월 11일부터 13일까지 3일 동안 지속되었는데, 가장 최북단에 위치한 프랑스 대대 진지에서 인해전술로 공격하는 중국군을 총검돌격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상당히 불리한 전황이었지만 1개 소대로 중국군 1개 대대를 격퇴하여 진지를 지켜냈다. 이후 공군 지원과 전차 합류 작전이 가까스로 성공하면서 중국군은 후퇴, 유엔군 반격의 신호탄을 알린다.
 
한국전쟁 당시 지평리 아군 방어선. 방어선 주변 산지에서 중국군 5만명이 유엔군을 포위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지평리 아군 방어선. 방어선 주변 산지에서 중국군 5만명이 유엔군을 포위하고 있었다.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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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 지평리의 전황
 1951년 2월 지평리의 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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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대의 지휘자는 랄프 몽클라르 중령. 제2차 세계대전 때 자유 프랑스군에 가담하여 에리트레아 케렌 전투에 참여하고 수많은 전장에서 활약한 전공을 인정받아 전후 중장으로 진급한 장군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한국전쟁 때 중장에서 중령으로 강등되었을까?      

당시 프랑스 정부는 한국전쟁에 대대급 부대를 파견하려고 했다. 하지만 대대를 지휘하는 요직은 중령이었기 때문에, 몽클라르가 참전을 위해 스스로 계급을 낮춘 것이다. 프랑스 대대는 지평리뿐만 아니라 양평과 원주 일대에서 중국군과 혈투를 벌이며, 영남으로 가는 요충지를 육탄으로 방어하며 활약했다. 몽클라르를 위시한 대대의 공로로 인해 기념관에 프랑스어로 된 전시 안내문이 있고, 그 옆에 추모비가 세워진 것이다(몽클라르는 귀국한 후 다시 중장으로 복귀했다).

한반도가 전화에 휩싸일 때 전쟁터가 된 양평군 지평면(砥平面). 신라시대 때 지은 이름 뜻대로 숫돌처럼 평평한 마을은 고려시대 몽골에 저항한 야별초부터 구한말 일제에 항거한 의병을 거쳐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사투가 있었던 군사요충지였다.

특히 한국전쟁 때는 상당히 참혹한 전투가 일어난 지라 국군, 유엔군 전사자의 유해뿐만 아니라 당시 적군이었던 중국군 유해까지 발굴된다고 한다. 발굴된 외국인 병사 유해와 유품은 옛날 아군 적군 따지지 않고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유엔 참전국 또는 중국에 송환한다.      

오늘날 수도권 전철 중앙산 지평역 일대는 주요 대도시와 달리 상당히 조용하다. 박물관과 참전기념비를 나서니 전쟁영웅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세대부터는 더 이상 전쟁영웅을 만들지 않았으면 한다. 전적비의 아픔을 뒤로하고 평화로운 마을로 영원히 남아야 하니까. 
 
평화로운 지평면 마을. 다시는 전쟁영웅이 나오지 않기를.
 평화로운 지평면 마을. 다시는 전쟁영웅이 나오지 않기를.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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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 동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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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시민기자입니다. 독일에서 통신원 생활하고, 필리핀, 요르단에서 지내다 현재는 부산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행테마 중앙선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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