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레"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영화 <세이레> 포스터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서는 순우리말 '세이레', 한자로 풀어쓰면 '삼칠일', 즉 아이가 태어난 지 스무하루가 되는 동안, 또는 그 날을 정의한다. 의례상으로는 그저 산술적 개념에 불과하지만 민속신앙에선 여기에 '금기'의 의미가 추가된다. 중요한 일이 발생한 날로부터 7일을 세 번 지낼 때까지 금기(禁忌)를 지키며 특별한 의미를 두어 대응하는 기간으로 엄중함을 부여한다.
 
일설에 의하면 민속신앙 중에서도 가장 앞선 내용인 단군신화 중에 호랑이와 곰이 인간이 되기 위해 금욕을 지켜야 했던 기간에서 이 금기는 출발한다고 전한다. 점점 살이 붙고 정교해진 내용에 따르면 갓 태어난 아이가 온전한 사람이 되기까지 세이레 동안에는 금줄을 치고 부정한 기운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된다. 영화 <세이레>에서 상갓집을 다녀와 죽은 자의 기운을 갓난아기에게 옮기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설정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세이레>는 2020년에 발표했던 감독의 동명 단편을 확장해놓은 형태다. 기본 설정은 변함이 없지만 늘어난 분량만큼 이야기는 풍부해졌고 다양한 기법의 공포 묘사가 추가되었다.

금기가 무너진 틈으로 밀려드는 불길한 징후들

우진은 아내 해미와의 사이에서 최근에 아들인 이수를 봤다. 장모와 아내는 '세이레', 아기가 태어난 후 첫 3×7=21일째까지는 액과 부정을 멀리해야 한다며 집 곳곳을 마치 요새처럼 금기해야할 것들로부터 액막이해둔 상태다. 현관에는 금줄이 쳐져 있고 바로 맞은편 아내의 임신 중인 친언니와도 접촉을 삼가는 중이다. 사위들은 유난이라고 자조하면서도 충실히 이를 따른다. 하지만 해미는 좀 더 진지하게 금기를 받아들이려 한다.
 
그렇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이수 육아에 온 가족이 매달려 신경을 쓰는 상황에서 우진은 한 통의 부고문자를 받는다. 대학 동창인 세영 본인의 상 소식이다. 해미는 세이레까지는 상갓집에 가는 게 아니라며 만류해보지만 우진은 잠깐만 들렀다 오겠다며 그저 대학 동창 일이라고만 밝힌 뒤 끝내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장례식장에 다녀온 이후로 우진은 꿈인지 실제인지 모호한 기이한 환상과 악몽을 거듭 겪는다. 그리고 가족의 주변에선 석연찮은 일들이 속속 발생한다. 그런 불길한 기운과 함께 우진이 해미에게 감춰두고 있던 비밀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수는 우진이 상갓집에 다녀온 이후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고 해미는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이게 다 누굴 위한 건데? 왜 우리들의 소중한 첫 아이를 위해 그 정도도 양보하지 못하느냐며 해미는 거세게 우진에게 항의하고 부부 사이는 냉랭해진다. 분명히 남편이 상갓집에서 부정한 것들을 업어왔다며 해미는 우진이 보기엔 터무니없는 대책을 이행하라 종용하며 방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그렇게 부부관계가 악화되는 와중에도 우진은 기어코 장례식장에 계속 발길을 옮긴다. 과연 우진과 죽은 세영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인물들을 벼랑으로 몰아가는 죄의식의 근원
 
"세이레"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세이레> 스틸 이미지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공포물의 전형적인 공식 몇 가지를 영화는 충실하게 따른다. 우진의 주변을 맴도는 죽은 세영의 존재감은 이승을 온전히 떠나기에는 풀고 가야할 원한이 맺힌 캐릭터의 전형처럼 다가온다. 그런 한의 서림에서 촉발되는 고전 공포문학의 그림자가 자연스럽게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장악한다. <세이레>의 어두운 기운은 근래 공포영화들에서 두드러진 즉자적인 호러 특수효과로 관객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것과는 거리감을 유지한다. 그 대신 주인공의 죄의식을 집요하게 후벼내고 파헤치는 심리 스릴러 방식으로 극중 인물들을 몰아붙인다. 손쉬운 시청각 효과 대신에 스멀스멀 축축한 습기에 젖는 서늘한 느낌으로 관객들의 호기심을 붙들고 잘근잘근 조이는 식이다.
 
영화는 '세이레'라는 민간전승 속 금기 소재를 가져와 써먹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도 여전히 강렬하게 작동하는 기복신앙 요소를 가족주의에 결합해 극대화시킨다. 이를 통해 '우리 가족'이라는 현실의 혈연+이해관계 공동체를 사수하려는 집착이 효과적으로 전해진다. 외부에서 보면 어처구니없지만 막상 관객 자신이 당사자라면 그냥 넘어가긴 쉽지 않을 (소중한 첫 아이의 안전이라는) 실존적 고뇌가 달려 있다. 그로 인해 벌어지는 갈등과 긴장을 스크린 바깥의 관객들은 숨을 졸여가며 볼 수밖에 없도록 몰아붙인다.
 
그런 타이트한 전개 가운데 영화는 고딕 문학의 심적 공포 기제를 이야기 내내 적극 활용해 관객 각자가 마치 화면 속 주인공 혹은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 심정이 되도록 붙잡아둔다. 우진의 불안감은 통상적인 선을 넘어가버린 채 이미 과잉된 처가 식구들의 무속신앙에 의해 균형감각을 잃고 만다. 여기에 보다 근원적인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다. 본인이 지켜주지 못했던 (혹은 버렸던) 망자에 대한 죄의식이 이미 기울어진 심리상태에 결합되는 바람에 우진은 균형을 잃고 붕괴되어간다. 그 가운데 좌우에서 우진을 옥죄는 죽은 세영과 산 해미의 협공은 그로 하여금 점점 더 극단적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게 만든다. 정작 우진이 겪는 지독한 혼란과 불가사의한 체험은 영화 속 주변인들에겐 보이지도 전해지지도 않는다.
 
긴장과 불안을 조성하는 배우들의 활약상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만 어디 털어놓고 하소연하기엔 이미 자신이 저지른 과오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어 환장할 판인 우진 역은 요즘 각광받는 서현우 배우가 맡았다. 나날이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를 종횡무진 오가면서 광대역 활약을 펼치는 배우가 '초보아빠'이자 '초보남편'이라는 근래 독립영화에서 희귀해진 캐릭터를 도맡아 본인의 과오에서 기인한 죄의식으로 인해 점점 더 쫓기는 주인공을 훌륭히 감당해낸다.
 
우진의 근원적 죄의식을 끓게 만드는 근원이자 관객의 시선에 확 들어오는 시각적 공포의 주역은 역시나 전 방위로 활동범위를 넓혀가는 류아벨 배우가 맡았다. 감독이 효과적으로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해 설정한 구도에 배우의 위력이 결합되면서 우진이 느끼는 혼돈의 감각이 관객에게도 전이되기 시작하면서 영화의 서스펜스는 극점에 도달한다. 여기에 아이에 대한 맹목적 보호 의지를 주체하지 못해 우진을 한층 더 사각지대로 내몰고 마는, 불안의 또 다른 원천이 되어버리는 해미 역할로 심은우 배우가 삼각구도 축의 꼭짓점이 되어준다. 세 인물 모두 과도한 요구를 가진 이는 없지만, 누군가의 욕망은 상대에겐 허용될 수 없는 아귀도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몇몇 조역 캐릭터의 활용도는 조금 아쉬운 면이 있다. 중견 배우 중 독보적인 활약을 근래 선보이고 있는, <정순>으로 올해 로마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부산독립영화제에서 연기상을 수상한 김금순 배우가 등장하지만 배우에게서 속된말로 '뽕'을 뽑는 데에는 이르지 못한다. 역시 독립영화의 '얼굴' 중 일원으로 활약 중인 김우겸 배우 역시 해미의 언니 남편으로 문득 보여주는 서늘한 표정이 꽤 인상적인 기운을 불어넣지만 거기에서 더 쓰이지는 못하는 편이다.
 
공포 장르의 고전적 구조에 충실한 재현이 돋보이는 영화
 
"세이레"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 <세이레> 스틸 이미지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약간의 아쉬움과 공백이 보이지만 세 주인공이 맞춰내는 호흡은 마치 에드가 앨런 포의 고딕 호러들, 예컨대 <어셔 가의 몰락> 등에서 등장할 것 같은 목을 죄여오는 공포감을 자아내며 단점들을 일정하게 상쇄해준다. 하지만 그런 안정된 구성이 마치 고전 공포영화들을 통해 어디서 본 것처럼 익숙한 '클리세'로 비춰질 수도 있겠다. 특정 장면은 고골의 공포소설 <비이>에서 주인공이 3일간 마녀의 시신 앞에서 겪던 불면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죽었지만 눈을 뜨고 움직이며 자신을 물리친 주인공 신학생을 해치려는 원념에 가득 찬 마녀의 이미지와 <세이레> 속 특정 장면은 퍽 닮은꼴이다.
 
여기에 주인공 우진이 겪는 일련의 상황, 과거의 지우고픈 기억이 끝끝내 죽지 않고 귀환하는 공포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으로 익숙한 <반딧불의 무덤> 원작이 포함된 연작 소설집 중 <죽은 아이를 키운다> 에피소드를 떠올리게도 한다. 세계대전 말 기아의 공포 와중에 동생이 먹을 걸 빼앗고 학대하던 기억에 속박된 채 자신의 사랑하는 아이를 학대해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주인공의 일화가 선보였던 불편한 기운이 본 작품에서도 가득하다.
 
그렇게 잘근잘근 다가오는 공포에 감독은 요즘 유행과는 선을 그은 채로 자신이 지향하는 어두움을 마음껏 펼치는 중이다. 확실하게 선악으로 대비되는 단순한 설정에 기대지 않고 주요 등장인물들 각자의 사연과 입장이 각축을 벌이며 고조되는 필연적 공포감의 조성은 말초적이지 않은 끈적끈적한 기운으로 영화의 밀도를 끌어올린다. 장편 공포영화에서 그런 밸런스 유지는 말처럼 쉽지 않다. 한국 독립영화 중 그리 흔하지 않은 공포 드라마 설정으로 전 세계 40여 군데 공포/판타지 경향 영화제에 진출한 데에는 그만큼 탄탄한 완성도가 기반이 되었을 테다. 장르 공식과 사회적 관습의 단면이 어우러진 한국적 공포영화 도전은 계속되어야 한다.
 
<작품정보>
세이레 Seire
2021|한국|공포/드라마
2022.11.24. 개봉|102분|15세 관람가
감독 박강
주연 서현우(우진 역), 류아벨(세영 역), 심은우(해미 역)
출연 김우겸(상탁 역), 고은민(해선 역), 차미경(장모 역), 이가경(친구 역),
김금순(건강원 여사장 역)
각본 박강
제작 K'ARTS
배급 트윈플러스파트너스㈜
 
2021 26회 부산국제영화제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상
2022 18회 판타스포아 국제판타스틱영화제
2022 4회 해비타트 국제영화제
2022 26회 판타지아 국제영화제
2022 44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2022 18회 취리히 영화제
2022 13회 텔루라이드 호러쇼
2022 14회 울란바토르 국제영화제
2022 17회 파리한국영화제
2022 17회 런던한국영화제
2022 몰린스 호러 영화제
2022 16회 파이브 플레이버스 영화제
세이레 박강 감독 서현우 류아벨 심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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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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