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22 05:11최종 업데이트 22.11.22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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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왕 이영민 연희전문에 재학중이던 이영민이 1928년 6월 8일 경성의전과의 경기에서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기록했다. 이틀 뒤 동아일보는 그 사건을 '경성구장 개장이래 초유의 대본루타'라는 제목으로 소개했다. 사진은 그 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 '본루타신기록 이영민군'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 동아일보


'이영민 타격상'으로 야구팬들에게 이름이 익숙한 이영민은 '한국의 베이브 루스'라고 불리는 한국 야구 최초의 스타플레이어다.

그는 중학 시절부터 육상과 축구, 야구에서 동시에 국내 최고의 선수로 이름을 날렸고 1934년에는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 등이 주축이 된 메이저리그 올스타팀의 일본 방문 경기에 일본 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1930년대부터 조선인을 대표하는 야구선수였고 해방 직후 미군 팀과의 대결을 위해 결성된 첫 번째 한국 국가대표팀의 4번 타자이기도 했다. 


그는 한국인 최초로 홈런을 기록한 타자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정식 경기장의 담장을 넘긴 홈런을 친 최초의 한국인 타자'라고 해야 한다. 야구에서 홈런이란 '담장을 넘기는 타구'가 아니라 '타자가 수비수의 실수 없이 홈으로 들어온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며, 한국에서도 야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경기에서 담장이 없거나 너무 멀거나 괴상하게 생긴 경기장의 모양 때문에 외야수들이 당황한 틈에 타자들이 홈까지 내달리는 '인사이드 파크 홈런'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1928년 6월 8일 연희전문과 경성의전의 경기에서 1회 2사 후에 이영민이 날린 1점 홈런은 이전까지의 홈런들과 달랐다. 1925년 10월에 잘 평탄화된 그라운드와 정확한 규격을 가진 한국 최초의 야구장인 경성야구장이 개장했고, 바로 그곳에서 열린 경기에서 적절한 거리에 세워진 담장을 넘겨 야수들의 접근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 뒤 여유롭게 4개의 베이스를 밟은 첫 홈런이었기 때문이다.

홈런왕 이영민을 낳은 경성야구장

기록으로 확인되는 한, 한국에서 처음 야구 경기가 열린 곳은 지금 독립문이 세워진 서대문 앞 모화관 터다. 그다음은 동대문운동장이 세워졌다가 헐린 뒤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자리하고 있는 동대문 앞 훈련원 연병장이다.

그곳에서 1890년대 후반부터 미국인과 영국인들이, 1900년대 중반부터는 한국인들이 야구 경기를 벌이기 시작했다. 지방에서는 제물포고등학교가 운동장으로 쓰고 있는 인천의 웃터골이나 구덕야구장이 지어지고 다시 헐린 부산의 대신동에서 야구 경기가 성행했다.

1920년 전국체전의 기원이 되는 전조선야구대회가 창설된 이후에는 배재고보 운동장이 잠시 한국 야구의 중심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첫 대회 이후에도 1922년부터 1925년까지 치러진 3~6회 대회가 모두 정동에 있던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1910년대 말까지는 서울만 해도 배재를 비롯해 경신, 보성, 중앙, 휘문 등의 학교에 야구부가 있었는데, 그 학교들이 단순한 친선경기가 아닌 우승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다투며 기록을 축적해가는 정식 경기를 치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전조선야구대회의 의미는 매우 컸다.

하지만 1925년 훈련원 터에 경성야구장이 지어진 뒤로는 대부분의 중요 경기들이 그곳에서 치러지게 됐다. 전조선야구대회로 시작해 종합경기대회로 확대되면서 이름도 바뀐 '조선체육대회'는 1926년 제7회 대회부터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경성운동장으로 주경기장을 옮겼다.

1921년부터 시작되어 주로 경성중학 운동장에서 치러지던 일본 전국중등학교우승야구대회(오늘날의 고시엔 고교야구대회)의 조선지역 예선전 역시 1926년부터는 경성야구장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6년에는 동아일보가 창설해 서울의 4개 학교(경신, 배재, 중앙, 휘문)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한 팀을 이루어 대결하는 '4구락부연맹전' 역시 경성야구장에서 치러졌다.

해방 후 서울야구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나중에는 '동대문야구장'으로 불리게 된 경성야구장은 한국 최초의 정식 규격 야구장인 동시에 1982년 잠실 야구장이 지어지기 전까지 한국 최대의 야구장으로서 한국 야구의 메카 역할을 했다. 2006년 당선된 오세훈 서울시장이 공약이었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건설을 위해 야구장을 철거하기로 했을 때 야구인들이 반발한 것은 학생야구 경기의 대부분이 열리던 곳이라는 현실적인 상황 외에 그곳이 가지는 그런 역사적인 의미 때문이었다.

한국 야구의 메카, 동대문 야구장
 

조선총독부가 발간산 <용산시가도>에 '만철야구장'으로 불린 철도운동장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지금은 그 자리에는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으며 우측 '철도공원'으로 표시된 자리에는 용산세무서가 들어서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동대문 외에 용산에도 좋은 야구장들이 있었다. 1910년대 후반 만주철도주식회사가 지금의 용산세무서 서쪽 일대에 건설한 일명 '만철야구장'이 경성야구장 못지 않은 위용을 자랑했고 1950년대에는 용산 미군기지 내에 조성된 야구장이 가장 아름다운 야구장으로 유명했다.

1957년에는 육군이 지금의 국방부 시설본부 자리에 천연잔디가 깔린 야구장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야구장들은 일본인, 미군, 그리고 군인들 외에는 거의 이용할 수 없는 특수한 영역이었다. 

결국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은 동대문에 있던 서울야구장을 제외하면 한국인들이 제대로 된 야구 경기를 볼 수 있는 야구장은 없었던 셈이다. 홈플레이트로부터 100미터 안팎의 거리에 부채꼴의 펜스가 설치되고, 투수 자리에 마운드가 마련되고, 포수 뒤쪽과 옆쪽으로 적절한 공간이 보장되는 야구 전용 경기장이 동대문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청룡기와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의 예선을 비롯한 많은 경기가 각 지역의 공설운동장과 학교운동장에서 열렸지만 간신히 선을 긋고 베이스를 설치하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는 마운드와 홈플레이트, 각 베이스 사이의 거리조차 정확히 측정되지 못하는 곳도 적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래서 서울이 아닌 곳에서도 제대로 된 야구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1960년대 중반부터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정부는 '체육을 통한 국민 계몽'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전국체육대회의 규모를 확대하는 동시에 지방에서 순회 개최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그에 따라 1962년부터 대구, 전주, 수원, 광주, 부산 등에서 '대통령이 직접 개회사를 하는' 국가적 행사를 치르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고 그 준비 과정에 1만 석 이상의 관중석을 가진 야구장을 건설하는 일 역시 포함되었다.

1963년에 전주야구장이 지어지고 부산 구덕운동장이 야구장으로 개조되었으며, 1964년에는 대전 한밭야구장과 인천 도원야구장이 건설되었다. 그 뒤로도 1965년 광주 무등야구장, 1968년 제주 오라야구장, 1971년 수원야구장이 문을 열었다.

각 도의 중심 도시마다 야구장이 하나씩 생기면서 학생들은 서울에서 열리는 본선 무대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제대로 된 투구와 타격, 홈런과 폭투와 파울플라이의 감각을 경험할 수 있었다. 야구팬들 역시 고속버스를 타고 동대문으로 원정 응원을 감행할 만큼의 열성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도 마음만 먹으면 직접 관중석에서 야구 경기를 눈으로 보면서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1970년대 초반부터 갑자기 고교야구가 선풍적인 인기를 모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로부터 몇 년 사이에 전국 각 지역에 야구장이 건설됨으로써 선수와 팬들이 동시에 비로소 제대로 된 야구를 경험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이 있었다.

그런 배경은 1970년대 중반부터 지역연고제에 기반한 프로야구 창설이라는 아이디어가 제기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실제로 그렇게 시작되어 발전되는 과정에서 정치적 환경의 변화와 맞물려 1982년 프로야구가 창설될 수 있었던 이유가 되기도 했다.

공설야구장의 전국체전, 세계선수권대회의 잠실야구장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위해 지어져 그 해 창설된 프로야구의 주무대가 된 잠실야구장은 40년 이상 한국야구를 상징해온 공간이다. ⓒ 정부기록사진집


국가적 행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각 지역의 공설야구장들이라면, 잠실야구장은 국제적 행사를 위해 만들어졌다. 물론 1962년 4월부터 8월 사이에 확장공사를 통해 1만 8000석에서 2만 2000으로 증축되고 1966년에는 국내 야외 경기장 최초로 야간 조명시설이 설치된 동대문의 서울야구장이 있었고, 그곳에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를 치르고 있었다.

하지만 1976년 세계선수권대회와 올림픽을 비롯한 세계적인 스포츠대회들을 유치하겠다는 구상으로 잠실 일대에 세계적인 수준의 종합운동장을 건설하겠다는 대통령의 구상이 발표되면서 길고 길었던 동대문 시대가 저물기 시작했다. 

특히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예상을 깨고 우승한 데 고무된 정부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유치 작업에 나서 성공하면서 그 과정은 본격화되었다.

1980년 4월에 착공되어 1982년 7월에 준공된 잠실야구장은 홈플레이트에서 가장 먼 가운데 펜스까지의 거리가 125미터나 되는 거대한 그라운드를 중심으로 3만 명 이상의 관중이 동시에 경기를 관전할 수 있는 넓은 관중석과 쾌적한 관람이 가능하도록 충분한 화장실과 매점, 주차장을 비롯한 부대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특히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이 기적적인 우승을 이루어내면서 개장과 동시에 역사적 의미까지 가지게 된 잠실야구장은 그 대회가 끝난 뒤에는 같은 해에 창설된 프로야구의 주무대로 전환되면서 순식간에 한국인들의 가슴에 자리 잡았다. 그곳에 '서울야구장'이라는 공식 명칭이 옮겨지고 원래의 서울야구장이 '동대문야구장'으로 격하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3만 석 규모의 야구장이란 프로야구의 산업적 성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었다. 프로야구란 기본적으로 관중의 입장 수입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물품판매, 광고비, 방송중계권료 수입 등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산업이며, 주중에는 야간 경기는 어쩔 수 없더라도 주말 경기만큼은 최대한 많은 관중을 불러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1985년에는 제2의 도시 부산에도 3만 석의 관중석을 가진 대형 야구장이 지어졌다. 오늘날 '야구의 도시' 부산을 상징하는 사직야구장이다. 잠실야구장이 국제대회를 위해 지어진 뒤 프로야구에서 주로 활용되었다면, 사직야구장은 프로야구를 위해 지어졌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초대 총재이자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군 시절 상관이기도 했던 서종철은 프로야구가 창설 첫 해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둔 데 고무되어 부산에도 잠실야구장에 맞먹는 야구장이 반드시 지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대통령의 공감 하에 부산시장이 행동에 나선 결과였다.

사직야구장, 부산을 야구도시로 만들다

사직야구장은 2008년 시즌 중 롯데 자이언츠 경기를 해설하던 허구연 현 KBO 총재가 '지구상에서 가장 큰 노래방'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가장 흥이 넘치는 야구 문화가 자리한 한국 야구의 또 다른 중심이다.

다른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런 강렬한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산의 깊은 야구 역사 외에도 3만 명이라는 압도적인 규모의 군중이 같은 장면에 시선을 집중시킨 채 목소리를 집중시킬 수 있는 야구장, 그리고 잠실야구장과는 달리 롯데 자이언츠 한 팀만을 응원하는 관중만으로 3만 석 거의 전부를 채울 수 있는 부산이라는 위치의 독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프로야구는 처음부터 흥행에 성공했고 그 뒤로도 꾸준히 성장했지만 야구장의 건설은 한동안 뜸했다. 잠실과 사직에 야구장이 문을 연 이후 2002년 인천에 문학야구장이 지어질 때까지 80년대와 90년대 내내 새로 지어진 야구장은 없었다. 프로야구의 규모가 커지는 사이에 정부의 주도성은 점점 약해졌고 그 공백을 기업들이 채워갔지만, 야구장은 여전히 정부가 아니면 짓기 어려운 제도적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체육시설의 설치·이용에 관한 법률'은 야구장을 체육시설업이 가능하지 않은 전문체육시설로 분류하며 설치와 운영의 책임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만 부여했다. 물론 야구장을 건설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영리 목적 운영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구단이 경기장을 소유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소유의 야구장을 임대해서 사용해야 하는데, '공유재산 및 물품관리법'은 특정한 사업자에 대한 수의계약을 금지하고 일반경쟁입찰을 의무화했을 뿐 아니라 임대 기간도 5년 이내로 한정하고 임차인의 영구시설물 축조를 금지하는 등 여러 가지 규제조항을 가지고 있었다.

야구장 홍보수입이 전부 혹은 대부분이 지방자치단체에 귀속되는 것은 물론이고 입장료 수입의 대부분을 야구장 임대료로 지불해야 하며, 야구장의 개조나 변형을 통한 특색 있는 마케팅 전략도 어려웠다.

하지만 2007년에 '스포츠산업진흥법'이 제정되어 구단과 사업자에 대한 지자체의 지원이 가능하도록 했으며, 특히 2015년 12월 31일에 국회를 통과한 개정안을 통해 경기장의 25년 장기임대와 수의계약을 허용하도록 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기업들의 지속적인 요구와 대중의 여론이 정부를 압박해 법률의 일부 개정을 이끌어낸 것이다.
 

한국 최초의 돔야구장인 고척스카이돔. 설계와 시공 과정에 여러 가지 아쉬움이 지적되긴 하지만, 일년 내내 쾌적한 환경에서 야구를 관람할 수 있는 곳이고, 프로야구 비시즌에도 야구경기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이벤트가 이어지는 변화를 가능하게 한 공간이다. ⓒ 유성호

 
스포츠산업진흥법의 제정과 개정 이후 야구장 신축이 이어졌다. 2014년 광주에 2만 7000석 규모의 기아 챔피언스필드가 개장했고 2015년에는 2만 2000석 규모의 국내 최초 돔구장이 서울 고척동에 개장했으며 2016년에는 대구에 2만 4000석 규모의 삼성라이온스파크가, 2019년에는 창원에 2만 2000석 규모의 NC파크가 문을 열었다.

그 외에 2012년에서 2014년 사이에 대전 한밭야구장이 대대적인 개보수와 리모델링을 거쳐 한화생명이글스파크로 재개장했고 2014년에는 수원공설야구장이 역시 2만 2000석 규모의 KT위즈파크로 리모델링해 재개장했다.

2000년대 이후에 신축되거나 리모델링을 통해 재개장한 야구장들은 공통적으로 2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관중시설을 마련하고 관중들의 편의를 확대했다. 그리고 야구장에 구단 이름을 넣어 일체감을 제고하는 동시에 스카이박스와 익사이팅석 등 객석 구조를 다양화함으로써 적극적인 마케팅의 여건을 마련하기도 했다.

건설 과정에 기업들의 참여도 확대되었는데, 광주 챔피언스필드의 총건설비용 994억 원 중 기아 타이거즈가 300억 원을,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 건설비용 1666억 원 중 삼성 라이온즈가 500억 원을 '25년간 사업료 선납' 명분으로 분담했다. 창원의 NC파크도 1270억 원의 총건설비용 중 NC 다이노스가 100억 원은 일시불, 300억 원은 25년 분납 형태로 납부함으로써 25년간의 장기임대권을 보장받았다.

야구장이 야구인만의 것이 아닌 이유

공만 있으면 되는 축구와 달리, 야구는 꽤 까다로운 스포츠다. 적절한 규격에 따른 시설이 갖추어지고 경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과 완전히 분리된 야구장에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장비와 일정한 기술을 갖추어야야만 경기가 성사된다. 세계적으로 야구를 즐기는 나라가 드문 가장 큰 이유가 그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야구가 시작되고, 확산되고, 집중적으로 발전한 과정 역시 그것을 가능하게 한 야구장의 연대기와 밀착되어 있다. 그것이 '야구가 끝나는 날'이 지난 뒤에도 오늘날의 야구팬들이 야구 예능을 보고 자선 경기를 보면서 봄까지 버틸 수 있게 된 이유이며 한국에서 야구가 야구인들만의 것이 아닌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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