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헌법 제27조 제3항입니다. 하지만 이 헌법 조항은 잘 지켜지고 있지 않습니다. 재판 지연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판결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탓에 실질적인 구제를 받기 어렵거나 당사자가 사망했다면, 정의가 실현됐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마이뉴스>는 '정의의 유효기간'이 지난 재판 지연 사례를 추적하고, 우리보다 먼저 사회적 논의를 진행한 독일에서 그 대안을 찾고자 합니다.[편집자말]

지난 6월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앞에서 소송 지연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다. ⓒ 금속노조 현대제철 비정규직지회

"벌써 정년을 생각할 나이가 됐네요. 정규직이 돼야 하는데..."

지난 1일 만난 현대제철 입사 23년차 김민수(51)씨의 말이다. 그는 2004년 현대제철의 전신 현대하이스코 순천공장 사내하청업체에 입사했다. 현대제철은 정씨를 파견노동자로 부렸다. 제조업 직접생산공정업무에 파견노동자를 사용할 수 없다는 파견법을 위반한 것이다. '불법파견'을 저지른 회사는 김씨를 직접고용해야 한다.

하지만 김씨는 아직 그의 작업복과 안전모에 '현대제철' 명찰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이미 11년 전 김씨와 동료들은 법대로 자신이 현대제철의 노동자임을 확인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아직 소송은 끝나지 않았다. 1, 2심 모두 승소했지만, 회사는 꿈쩍하지 않고 있다. 대법원 판결은 기약이 없다.

정충식(44)씨는 김씨와 같은 선배들의 승소에 용기를 얻어, 2016년 5월 같은 내용의 소송을 제기했다. 1년, 2년, 3년, 4년, 5년…. 정씨의 소송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법원은 소송 제기 5년 6개월이 지난 2021년 11월로 선고기일을 정했다. 하지만 곧 이를 취소하고 다시 재판하기로 했다.

이후에도 두 차례나 선고기일을 정했다가 이를 연기하거나 취소했다. 법원의 신뢰는 땅에 떨어진 뒤였다. 소송 제기 6년 2개월이 지난 올해 7월 마침내 선고가 이뤄졌다. 예상했던 승소였다. 앞서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2월 현대제철에 불법파견을 시정명령을 내린 바 있다. 정씨는 이해할 수 없다. 재판이 왜 이렇게 늦어진 것인지를.

"20대에 회사에 들어와 30대에 소송을 걸었는데, 마흔 중반이 된 이제야 1심이 끝났네요. 정년에 가까운 시기에 소송이 끝나는 건 아닐까요. 길어도 너무 기네요."


갖가지 소송 지연... 소송 제기 2년 동안 재판 안 열려

현대제철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소송 제기는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각 소송 모두 갖가지 재판 지연이 발생했다. 다들 지쳐가고 있다. 각 소송은 다음과 같다.

[1차 소송]

2011년 11월 금속노조 현대제철 비정규직지회 노동자 150여 명이 처음 소송을 제기했다. 1·2심만 8년이 걸렸다. 그 뒤 사건은 대법원에 올라갔지만, 3년째 감감무소식이다. 지난해 6월 '쟁점에 관한 종합적 검토 중'이라는 설명 이후, 지금까지 그 어떤 정보도 전해지지 않았다.

[2~3차 소송]

250여 명의 노동자가 제기한 소송이다. 지난 7월 나온 1심 판결은 6년 2개월 만에 나온 것이다. 그동안 법원에 선고를 내려달라고 수없이 외쳐야 했다. 사건은 지난 8월 2심에 올라갔지만, 재판이 언제 시작될지 알 수 없다.

[4차 소송]

70여 명의 노동자가 지난 2020년 11월 소송을 제기했다. 2년이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난 10월 첫 재판이 열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10분 만에 끝났다. 재판부는 1차 소송의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자고 제안했지만, 노동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정년 전에 소송이 끝날 수 있을까

현대제철의 2022년 브랜드 광고 내용. ⓒ 현대제철

현대제철 순천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모든 재판에서 승소했다. 여기에 고용노동부가 불법파견 시정명령을 한 사실이나 최근 현대·기아차와 포스코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승소 확정판결을 받은 사실을 고려하면, 이들의 승소 가능성은 매우 크다. 하지만 직접 만난 이들의 얼굴엔 초조한 빛이 역력했다.

2~3차 소송에 함께하고 있는 김성학(51)씨는 "2~3차 소송 기간은 1차 소송보다 더 길어지고 있다. 정년을 불과 몇 년 앞두고 대법원 판결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기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50대 후반에 정규직이 된다고 하더라도, 다른 공정에 배치돼 새로운 일을 배워야 한다면, 무척이나 힘들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김씨는 대학생 딸과 고등학생 아들을 두고 있다. 한창 학비가 들어갈 때다. 김씨는 "정규직은 학비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아이들이 다 취업한 다음에 정규직이 된다면, 정규직 복지혜택은 결국 못 받는 것 아니냐"면서 "재판 지연으로 반쪽짜리 승소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일에 집중해야 하는데, 법원에 판결을 빨리 내려달라고 투쟁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면서 "법원이 기업의 눈치를 보지 말고, 적극적으로 노동자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빠른 결정 내려주시기를 바란다"라고 강조했다.

4차 소송에 참여한 정성진(30)씨는 "1심 첫 재판부터 이렇게 늦으면, 앞으로 소송이 얼마나 길어질지 머리가 아프다"면서 "법에 따라 당연히 사내하청이 아닌 좋은 환경에서 일해야 하는데, 판결이 늦어질수록 좋은 환경에서 일할 시간은 줄어든다. 이겨도 그 의미가 퇴색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사건을 대리한 김기덕 변호사(법률사무소 새날)는 "돌려받아야 임금을 정해야 하는 복잡한 면이 있는 사건이지만, '재판부가 회사의 시간끌기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했더라면 재판 기간이 단축됐을 것'이라는 의견은 맞는 말"이라고 말했다. 이어 "또한 2~3차, 4차 소송의 하급심 재판부는 1차 소송의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대법원 판결이 곧 나올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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