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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진정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내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기자말]
'표현의 자유'를 위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키아오라리조트와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에 반가운 손님들이 왔다. 지난달 17~19일 사흘간 원주 반계초등학교 5~6학년생 10명이 선생님 4명과 함께 수학여행을 온 것이다. 뉴스타파저널리즘스쿨,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안산꿈의교회청년부 등 각종 단체와 가족여행단이 이곳을 방문해 무료 강연을 자주 했지만 수학여행단은 처음이었다. 중단됐던 수학여행이 코로나의 기세가 꺾이자 재개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학부모 전원 동의를 받아야 하는 등 수학여행이 쉽지 않다고 한다. 전교생이 32명밖에 안 되는 작은 학교이기에 가능했던 듯하다. 키아오라도 소방·가스·전기 세 분야에 걸쳐 점검을 받아야 하는 등 절차가 까다로웠지만 기꺼이 감수했다.

실은 한 선생님이 여름 휴가 때 서귀포·성산 일대를 사전답사한 뒤 키아오라리조트를 선택했다고 한다. 키아오라는 복도형이 아니라 독채 펜션처럼 분리형으로 지어져 출입통로가 다 다르다. 투숙객끼리 마주칠 일이 별로 없으니 전염병에는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편이다. 반가운 마음에 바비큐 파티와 아침 식사 그리고 글쓰기 강연도 거저 해주기로 약속했다.
 
키아오라리조트 카페에서 반계초등 학생들에게 ‘기자 피디 유튜버 되기 쉽다’는 주제로 강연하며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키아오라리조트 카페에서 반계초등 학생들에게 ‘기자 피디 유튜버 되기 쉽다’는 주제로 강연하며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 정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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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강연은 내가 제주 키아오라리조트에 미디어리터러시스쿨을 설립한 목적 중 하나다. 우리나라는 한글과 영어 문맹률이 대단히 낮아졌지만 가짜뉴스가 난무하는 환경에서 '미디어 문맹률'은 오히려 급등했다고 할 수 있다. 미디어 리터러시(Literacy) 교육은 미디어 바로 보기와 듣기, 글쓰기를 비롯한 콘텐츠 제작과 매체비평 능력을 길러준다.

이 과정에서 인문사회 교양교육에 힘을 쏟는 이유는 교양이야말로 비판의식과 역사의식, 윤리의식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교양에 바탕을 두고 본 대로 느낀 대로 쓰게 하면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고 나아가 민주주의도 제대로 작동하게 된다. 우리 언론이 '기레기 천국'이 된 것은 전국의 언론학과와 언론기관들이 교양교육을 소홀히 하고 우선 써먹기 좋은 기능 교육에 치중한 탓이라고 나는 진단한다.

초등학생 글에 눈시울을 붉히다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경험과 교양이 부족한 탓이지만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글쓰기를 잘못 가르친 탓도 크다. 우리나라는 학교에서 글쓰기가 아니라 글짓기 교육에 주력해왔다.

교과목 이름도 지을 '작' 자를 붙인 '작문'(作文)이고 대회 이름도 '글짓기대회'였다. 소설가나 시인을 꿈꾸지 않는 한 일반인은 글짓기가 아니라 글쓰기를 평생 해야 하는 사람이다. 기자도 마찬가지다. 본 대로 들은 대로 '쓰지' 않고 머리 속에서 기사를 '짓기' 때문에 언론 신뢰도가 세계 꼴찌를 헤맨다.

오래 전 KBS 토크쇼에 출연해 "우리 언론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성씨가 뭔지 아느냐"고 농담한 적이 있다. 답은 '관' 씨다. 이름은 '계자'. '관계자'라는 익명 뒤에 기자들이 자기 주관을 집어넣고 객관을 무시한다. 자신이 또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했는지, 일련의 서사를 쓰면 왜곡할 필요도 없고 쓰기도 쉽다. 학교에서 배운 틀에 맞추려고 머리를 쥐어짜지만 자신도 감동하지 못하는 글을 남이 공감할 리 없다.

어린이들은 원래 쉽게 글 쓰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글은 말과 다르다고 배운다. 말하고 싶은 대로,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쓰면 쉬운데 어른 흉내를 내라고 하니까 글쓰기가 어렵고 싫어진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나 MBC 저널리즘스쿨에서 내가 한 일은 이런 잘못된 글쓰기 습관을 '봉인해제' 해주는 거였다.

명문대 출신 학생이 그런 과정을 더 어려워한 사례도 많다. 잘못된 글쓰기 지도일지라도 범생이들은 금과옥조로 여겨 나쁜 버릇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남의 글을 인용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자기만의 서사를 풀어내는 데는 미숙하다. 때로는 모방이 필요하지만 자기 이야기가 들어가야 창조적 모방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명문대 출신 필자가 쓴 글에는 감동한 적이 드물지만 초등학생이 쓴 글에는 감동해 눈시울을 붉힌 적이 많다. 이번 강연에서도 '쉬운 글이 좋은 글이다'라는 점을 강조했는데, 아래 PPT 강연자료들은 초등 고학년을 위해 편집한 55개 슬라이드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오덕 선생이 펴낸 <일하는 아이들>에 실린 시
 이오덕 선생이 펴낸 <일하는 아이들>에 실린 시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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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한 시는 이오덕 선생이 펴낸 <일하는 아이들>에 실린 건데 농촌 아버지들이 병들어도 일을 해야 하는 현실이 잘 드러난다. 열 살쯤 되는 어린이가, 힘이 부쳐 굴러 떨어진 아버지의 사고 현장을 찾아가 우는 장면은 가여우면서도 대견하다. 문장이 너무 길어 어색한 데도 있지만, 이보다 더 가슴 아린, 이보다 더 힘있는 시가 있을까?      

'이오덕·권정생'이란 글쓰기 선생

이런 글은 이오덕이란 선생님을 만났기에 나올 수 있었다. 안동에는 두 걸출한 글쓰기 선생이 있었는데 이오덕과 권정생이다. 나는 두 선생과 만난 적이 없지만 우리 아버지는 둘 다 아는 분이었다.

아버지는 이오덕 선생과 1925년생 동갑이고 안동 일대에서 교사-교감-교장으로 일하면서 서로 자리를 물려받기도 한 것 같다. 권정생 선생은 아버지가 교장이던 일직서부국민학교 옆 조탑동에 손수 방 한 칸 집을 짓고 살았다. 지금은 폐교돼 권정생문학관이 들어선 일직남부국민학교에도 아버지가 재직했다.

나는 사숙하다시피 그들의 책을 다 읽었지만 국민학생 때 좋은 글쓰기 선생님을 담임으로 만나지는 못했다. 안동중학교에 진학했을 때는 안동군 국민학교 백일장 당선작 모음집에 이름을 올린 친구들을 문예반에서 다 만났다. 나는 시를 썼고 산문을 쓴 서정오는 인기 학생 잡지 <학원>에서 학원문학상을 받아 표지 모델로 등장해 나를 주눅들게 했다.

그는 대구에서 초등학교 선생 노릇을 하면서 아마 한국에서 가장 많은 동화를 쓴 인기작가가 됐다. 지금도 나는 초등학교 때 쓴 동시가 생각나는데, 어린 마음에도 선생님 마음에 들기 위해 자기검열을 했다. 기억나는 부분은 이렇다.

냇물은 심술쟁이
옷만 적시고
고기도 못 잡았다.
냇물은 심술쟁이
큰물이 져서
학교에도 못 갔다.


당시에는 냇물에 다리가 없어 큰물이 지면 학교에 갈 수 없었다. 학교에 안 가면 너무 좋던 시절인데 '냇물은 심술쟁이'라고 거짓 글을 쓴 것이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오리 가까이 걸어야 했는데 길이 냇물을 따라 나 있어 냇물로 들어가 고기를 잡으며 집에 가곤 했다. 동요 중에는 이런 것도 배웠다.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시냇물>이라는 이 동요는 흥얼거리긴 했지만 냇물을 늘 보고 걸으면서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은 없고 감동도 없었다. 어른의 언어유희에 가깝기 때문이다. 냇가에 사는 어린이가 '강물아 어디로 가니'라는 동시를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윤극영의 <고드름>도 음악책에 실려 있었다.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각시방 영창에 달아두어요.
 

동시라고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수정이나 발을 친 고급주택을 본 아이가 몇이나 있었을까? 최남선 이광수 노천명처럼 정신이 똑바로 박히지 않은 '글 재주꾼'들은 결국 변절해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윤극영은 항일운동을 했으나 일제 말기에는 강요에 따른 것이라 해도 친일단체에 몸담은 적이 있다. 나도 이 시의 영향을 받아 <고드름>이란 동시를 썼는데, 이렇게 시작했다.

고드름 고드름 맛없는 아이스케키
고드름이 달콤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들이 쓴 시 모음
 아이들이 쓴 시 모음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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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아오라의 2천평 정원에서 풀을 뽑다 보면 실제로 개미는 풀뿌리 근처에 집을 많이 짓는다. '근질근질하게 들었습니다'라는 구절은 '절창'이다. 비록 개미가 내 손으로 기어오르는 건 아니지만 사람의 감각은 뇌에서 연결되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다. 스케치 기사나 글에는 시각뿐 아니라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을 다양하게 동원하는 게 좋다.

2학년생이 쓴 시의 촉각은 절정의 감각이다. 소믈리에가 포도주 맛을 감별할 때 눈을 감는 것도 다른 감각을 차단하고 오로지 미각에 집중하려는 태도다. 키스할 때 절로 눈을 감는 것도 절정의 감각을 느끼려는 본능이 아닐까?

<내 자지>란 동시는 그 또래 아이가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걸작'이다. 이런 '대시인'들이 학교 교육을 잘못 받으면서 감성과 멀어지고 구태의연한 표현에 빠져든다.
 
학생들이 명명한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 일부
 학생들이 명명한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 일부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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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대학원생을 지도할 때 르포-여행 기사 작성법을 '현지지도' 하려고 그들을 데리고 협곡열차를 탄 적이 있다. 스케치 기사를 써보라 했더니 대개 '백두대간 협곡열차에서 보는 자연은 한 폭의 그림이다'라는 식으로 써냈다. 원문을 거의 다 날리고 학생들이 명명한 대로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이 됐는데, 내가 어깃장을 놓은 첫 문장은 이랬다.

'빼어난 자연 앞에 서면 우리의 표현력은 얼마나 궁한가? '그림 같다'는 말은 자연에 대한 모독이다. '스스로 그럴듯한' 자연(自然)이 거기 있을 뿐이다. 허물어져가는 옛집과 오래된 철길마저 자연의 일부가 되어가는 듯한 풍경 속으로 앙증맞은 열차가 들어간다.'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의 <시골무도회>와 <도시무도회>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의 <시골무도회>와 <도시무도회>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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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화가 르누아르의 <시골무도회>와 <도시무도회>에는 그가 사뭇 다른 무도회 분위기를 풍기려고 여러 장치들을 그려 넣었다(Encoding). 제천에서 6년간 초중고생을 위한 청소년기자학교를 운영하면서 그런 '암호'들을 찾아내(Decoding) 보라고 하면 대학원생들보다 빠른 경우도 많았다. 반계초등생들도 거의 다 찾아냈다.

각각 10개 안팎의 코드가 숨어 있는데, 두 가지씩만 언급한다면 남자의 복장과 용모다. <시골무도회>에는 바짓가랑이가 헐렁하고 수염도 텁수룩한 데 견주어 <도시무도회>에는 바지가 잘 다려져 있고 얼굴도 말쑥하다. 사실 이 남자는 같은 모델이다. 르누아르가 그것마저 속일 수 없어서 나중에 그린 <도시무도회>에는 얼굴을 가렸다. 스케치 기사를 쓸 때도 르누아르처럼 장면의 디테일을 묘사하면 된다.

자기 삶을 자기 말로 쓰면 글쓰기가 쉽다

글은 머리 속에서 지어내며 자기검열을 하는 게 아니라 본 대로 느낀 대로 정직하게 쓰면 힘있고 감동을 준다. 그것은 비판정신은 물론 '표현의 자유'와 직결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교 교육은 정치와 절연된 일종의 '청정지역'으로 치부된다. 고교 3학년은 선거권까지 있는데 정치는 교육영역 밖에 있다.

선생이 학생에게 밝고 명랑한 가정과 학교생활만 쓰도록 지도한다면, 거짓 글짓기를 가르치는 셈이다. 문인들 수필·소설·시나 논리 위주 교수들 칼럼, 과장을 일삼는 지도자의 연설문 등을 흉내내라고 한다면 감수성 넘치던 글쓰기 재능은 점점 쇠퇴하게 된다. 자기 삶을 살아있는 말로 쓰지 못하게 하면, 불만이 누적되고 심하면 이성을 잃은 행동을 하거나 정신병이 도져 '극단적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학생들은 자신의 삶과 지역사회, 국가와 세계를 어떻게 개선해 나갈지 고민하고, 글·노래·그림으로 마음껏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고교생이 그린 '윤석열차'까지 문제 삼았다. 악독한 일제 치하에서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같은 글쓰기, 곧 '표현의 자유'는 어느 정도 인정했다.

태그:#글짓기대회 , #수학여행, #표현의자유, #이오덕, #권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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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제주 키아오라리조트 공동대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 원장, MBC저널리즘스쿨 교수(초대 디렉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글쓴이는 조선일보 기자, 한겨레 경제부장,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초대원장(2008~2019), 한겨레/경향 시민편집인/칼럼니스트, KBS 미디어포커스/저널리즘토크쇼J 자문위원, 연합뉴스수용자권익위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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