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갈등은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인류의 해묵은 숙제다. 미국 현대사 최악의 인종 폭동으로 불리우는 LA 흑인 폭동은 그동안 백인들에게 차별받는다고 주장하던 흑인들의 분노와 함께, 정작 소수민족인 한국인들이 애꿎은 분풀이의 대상으로 전락하며 또다른 희생양과 인종갈등을 만들어낸 비극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10월 5일 방송된 JTBC 역사예능 프로그램 <세계 다크투어>에서는 미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1992년 LA 폭동 사건'을 조명했다. 최악의 재난 속에서 한인들의 재산과 생명을 지켰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끝나지 않은 인종갈등의 현 주소에 대하여 분석했다.
 
사건의 발단은 1991년 3월 3일 미국 LA의 한 고속도로에서 과속주행을 하며 도망치던 2세 흑인 남성 로드니 킹을 경찰이 체포하면서 비롯됐다. 킹은 음주로 만취 상태였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다수의 경찰들은 킹을 둘러싸고 전기충격을 비롯하여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당시 킹은 81초간 곤봉으로 무려 56회나 구타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킹은 당시 강도죄로 수감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가 가석방으로 풀려난 상태였다. 킹은 음주운전으로 체포되면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야할까봐 도주했던 것. 하지만 단신에 무기를 든 것도 아니고 무저항 상태였던 킹을 향한 경찰의 과잉대응은 누가봐도 선을 넘었다.
 
킹은 심각한 폭행으로 영구적인 뇌손상과 청각장애을 입었고 전신에 무려 11군데가 넘는 골절상을 당했다. 킹을 폭행한 경찰은 세 명의 백인과 한 명의 히스패닉이었고 심지어 이들은 무자비한 폭행을 저지르면서 인종차별성 막말과 폭언까지 쏟아냈던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에서 경찰의 흑인에 대한 과잉 진압 논란은 최근까지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 2020년에는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비무장 상태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사실 '로드니 킹 사건'은 그렇게 후폭풍이 커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킹 역시 과실이 분명히 있었던 데다, 이 사건에 대하여 경찰 위원회가 과잉폭력 인정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구타를 주도한 경찰관 4명은 모두 기소되었다.
 
하지만 1992년 4월 29일에 법원에서 발표된 최종판결에서 놀랍게도 경찰관 4명 중 3명은 무죄, 1명은 재심이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사실상 4명 전원에게 면죄부가 주어진 것이었다.

공정성이 무너지다
 
사실 이미 판결이 내려지기 전부터 수상쩍은 정황들이 속속 등장했는데 엄연히 LA 관할에서 벌어진 사건이었음에도 법정이 LA 인근에 위치한 시미밸리로 갑자기 변경되었다.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사는 LA와 달리 시미밸리는 거주민의 70% 이상이 백인들이었다. 또한 재판에 참여한 배심원단 12인에는 흑인이 단 한명도 포함되지않았고 백인이 10명, 아시아계와 히스패닉이 각 1명씩이었다. 누가봐도 공정성에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최종판결에 분노한 흑인 사회는 폭발했다. 재판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분노한 흑인들이 법원을 비롯하여 각종 관공서와 언론사를 점거하며 폭동이 발생했다. 물론 평화로운 시위를 주장한 이들도 많았고 폭동에 가담하지 않은 흑인들이 다수였지만, 과격한 이들이 앞장서서 폭력적인 행동을 일삼으며 사태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순수한 시위가 목적이 아니었던 흑인 갱단 범죄자들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흑인을 제외한 모든 무고한 시민들이 무차별적인 표적이 되었다. 도로위에서 흑인 폭도들이 한 백인 운전자를 집단으로 폭행하고 비웃는 모습을 공중에서 촬영한 모습이 언론에 실시간으로 보도되며 미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결국 판결이 발표된지 불과 3시간 만에 거리는 무법천지가 되었고 LA전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흑인을 폭행한 백인경찰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해준 판결이, 흑인들에게 폭력을 정당화할 명분을 제공한 셈이었다.
 
그리고 폭동의 후폭풍은 예상치 못하게 한인 사회로까지 번졌다. 사실 로드니 킹 사건과 별개로 한인-흑인간 인종 갈등도 이미 불씨가 잠재된 상태였다. 1991년 로드니 킹이 경찰에 폭행당했던 날로부터 불과 13일 뒤에 역시 LA에서 벌어졌던 '라타샤 할린스 살인사건(1991년 3월 16일)'은 도화선이 됐다.
 
당시 15세의 흑인 소녀 라타샤는 오렌지 주스를 구매하려다가 물건을 훔치는 것으로 오해한 상점주인인 한인 중년 여성과 시비가 붙었다. 라타샤는 자신을 도둑으로 몰아가는 한인 여성의 얼굴을 가방과 주먹으로 가격했고, 분노한 여성은 뒤로 돌아선 라타샤를 향해 총을 쐈다. 라탸샤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흑인 사회는 가해자의 엄격한 처벌을 요구했고 배심원은 2급 살인죄로 16년형을 권고했다. 하지만 LA 법원은 가해자의 상점이 흑인 빈민 지역에 위치하여 이미 수십 차례의 절도경험이 있었고, 피해자에 의한 폭행으로 부분적이 정당방위가 인정된 데다 재범 가능성이 낮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400시간 사회봉사 및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최종 판결이 내려진 날짜는 1992년 4월 21일로 로드니 킹 사건의 판결과는 불과 8일 차이였다.
 
흑인 사회는 판결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번에도 흑인이라서 당했다"라며 분노했다. 1년 사이에 로드니 킹과 라타샤 할린스 사건의 법정 공방이 비슷한 기간에 진행되면서 흑인들의 한인을 향한 적개심도 높아졌다. 
 
당시 LA의 한인타운이 흑인 거주지역이자 범죄율이 높은 빈곤층 밀집지역과 인접해있 었던 탓에 한인과 흑인 사회는 계속해서 크고 작은 갈등을 빚고 있었다. LA지역에 한인들이 소유한 상점 중 대부분은 저렴한 임대료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흑인 빈민가에 자리잡을 수밖에 없었다. 한인과 흑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무시한다고 주장하며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흑인 폭도들은 LA 경찰청이 있던 파커센터를 거쳐 한인타운으로 향했다. 폭도들은 한인 상점 곳곳에 불을 지르고 가게를 부쉈다. 일부는 혼란을 틈타 물건을 약탈해가기도 했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많은 한인들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LA폭동 피해자였던 이창엽씨는 당시 총으로 경고를 했는데도 단체로 밀고들어오던 폭도들의 모습을 보며 공포에 휩싸였던 순간을 회상했다. 이창엽씨는 옥상으로 피신하여 자신과 가족들이 피땀흘려 일꾼 가게들이 불타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했다.

이씨는 "3일동안 완전히 암흑의 세계였다. 우리를 지켜줘야 할 경찰은 어디로 갔는가.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렇게 무법천지로 변할 수 있는가"라며 암담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대부분의 경찰은 백인과 부유층이 주로 거주하던 베빌리힐즈와 할리우드 지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동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한인 지역은 경찰의 보호구역에 포함되지 못했고 폭도들의 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야 했다. 전체 경찰력의 10% 정도가 배치되기는 했지만 그나마도 민간인이 아닌 경찰서나 관공서를 경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병력이었다.
 
경찰이 흑인들로 하여금 사실상 한인 지역으로 향하도록 유도-방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인종갈등 때문에 비롯된 LA 폭동이 그 전개 과정에서 또다른 인종차별로 번진 것이다. 한인들을 희생양삼아 백인들을 향한 분노의 불씨를 돌리려 했다는 사실은 씁쓸한 장면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을 지켜낼 수밖에 없었다. 폭동 이후 LA 한인 지역 방송국은 전 직원은 2교대 24시간 근무로 현지의 실황을 생생하게 전달하며 한인들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줬다. 또한 위기일수록 똘똘 뭉치는 한국인들답게 현지 한인들은 자경단을 결성하여 폭동에 맞섰다. 한인 라디오를 통하여 현지의 피해상황이 전달되면 자경단이 현장으로 곧바로 출동하는 방식이었다.
 
자경단은 자칫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스스로 원칙을 정하여 '선제공격에 대한 대응사격, 대응하더라도 위협사격'만 할 것을 약속하고 철저히 '사수와 방어전'에 초점을 맞췄다. 실제로 폭동시간에 한인 지역 내에서 흑인들과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행히 폭도들은 총을 들고 강하게 저항하던 한인 자경단을 보고 철수했다.
 
자경단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옥상이나 지붕에 올라 높은 곳에서 폭도들의 동선과 피해 상황을 파악했고, 이런 한인들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미국 언론으로부터 '루프 코리안(지붕위의 한인 자경단)'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급박한 상황에서 침착하고 이성적인 대응을 보여준 자경단의 활약으로 한인 사회는 그나마 폭동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다. 자경단 활동 중 오인 사격으로 인하여 19세의 한인 청년인 이재성군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는 사고도 있었다.
 
당시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하여 LA 폭동사태의 조속한 해결을 약속하며 특히 피해를 입은 한인 사회에게 애도와 유감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미국 정부는 결국 주방위군까지 투입하며 진압에 나섰고 결국 일주일이 지난 5월 4일에야 모든 폭동을 종결을 고했다.
 
광기의 시간이 지나고 난 후 씁쓸한 진실들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폭동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무고한 한인이나 백인들만이 아니었다. 폭동의 혼란 속에 평범한 흑인들이 운영하던 다수의 상점들도 약탈과 방화의 피해를 입었다. 심지어 폭도들은 흑인의 가게라는 것을 알고서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LA 폭동이 처음부터 인종차별에 대한 항의와 분노라는 본질에서 벗어나 그저 무차별적인 폭력사태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또한 한인과 흑인이라고 해서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이들도 많았고 폭동 당시 오히려 한인 가게를 지켜주려고 했던 흑인들도 있었다.
 
폭동 당시 흑인들의 분노가 한인 사회로 향한 데는 현지의 자극적인 언론보도도 한 몫을 담당했다. 미국 언론은 라타사 살인사건 당시 로드니 킹 사건과 자주 비교하거나, '한인이 흑인을 죽였다'는 인종갈등에 포커스를 갖춘 헤드라인으로 흑인 여론을 자극했다. 혐오를 조장하는 이슈일수록 그만큼 소비가 쉬워지는 현실 때문이다.
 
폭동이 진정되고 난 후, 수만 명의 한인들은 시청앞에 모여서 "평화를 원한다"고  외치며 거리행진을 벌였다. 한인뿐만아니라 많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평화시위에 동참했다. 이웃주민들이 삼삼오오 한인 거리를 찾아와서 청소를 하고 상점을 보수하는 것을 돕기도 했다.

절망의 늪에 빠져있던 한인들은 평화와 이웃과의 소통의 가치를 환기하면서 다시 일어날 원동력을 찾을 수 있었다. 3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 그 지역에서 LA 한인 타운은 과거의 상처를 회복하고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LA 폭동이 한인-흑인-백인의 모든 인종을 아울러 남긴 공통적인 교훈은 '우리는 싸워야할 적이 아닌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이라는 것이다. LA 폭동으로 방화 피해를 입었던 한 한인 상점은 가게를 재오픈하면서 갱 단원 출신이었던 흑인 직원을 고용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인 사장님 부부와 흑인 직원이 함께 웃고있는 훈훈한 벽화에는, 여러 인종들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을 추구해야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LA 폭동 이후 어느덧 3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인종갈등이 끊이지않는 미국 사회, 그리고 어느새 여러 인종들이 모여사는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돌아볼 때 여전히 그리 멀리있지 않은 이야기다.
LA흑인폭동 로드니킹 세계다크투어 인종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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