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 스포츠 경기에 울고 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기는 날도 있고, 지는 날도 있지만 결과가 정해져 있는 경기는 없습니다. 강팀을 응원하는 사람도, 약팀을 응원하는 사람도 있지만 승리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스포츠를 좋아하는 이유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JTBC <최강야구>에서 이승엽 감독이 간절히 승리를 바라고 있다.

JTBC <최강야구>에서 이승엽 감독이 간절히 승리를 바라고 있다. ⓒ JTBC

 
야구팬들은 '희망고문'이라는 말을 쓴다. 가을야구 마지노선 근처에 있는 팀들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시즌 끝까지 순위의 행방을 묘연하게 만들 때, 한 두 점 뒤진 9회 선두타자가 출루해 득점 기회를 노릴 때, '제발, 제발 하나만!'을 외치는 순간, 그 실낱같은 기대를 '고문'에 빗댄 것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승리를 기대하기 어려울지라도 팬들은 희망을 놓지 않는다. 희망고문은 오래된 습관, 거스를 수 없는 관성 같은 것이다.

야구는 그 어떤 구기종목보다 승부를 결정짓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1회부터 9회, 때론 연장전까지 늘어지며 경기 시간은 세 시간이 임박하는데, 심지어 대부분이 '멈춰있는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주 천천히 팬들을 바싹 타들어 가게 하는 기괴한 스포츠랄까.

오히려 스포츠 특유의 박진감과 짜릿함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런 야구를 몰랐더라면 나는 더 생산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매일 세 시간을 희망고문에 저당 잡히는 대신, 독서나 운동처럼 건강한 취미생활을 하는 어른이지 않았을까.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우승을 차지했다.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우승을 차지했다. ⓒ 대한체육회

 
나는 '베이징 뉴비'라고 불리는 세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경기를 보고 입덕한 팬이란 뜻의 신조어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야구를 보는 이유라곤 할 수 없다. 지난 수년간 봐온 야구의 진짜 모습은 기대와 달랐다. 투타의 완벽한 조화나 투지 넘치는 허슬 플레이, 적재적소에 맞아떨어지는 작전야구는 드물었다. 대신 황당한 수비실책과 어이없는 주루사, 득점권 타석에 선 타자는 초구에 어림도 없는 헛스윙, 그리고 루킹삼진, 캐스터의 단골 멘트 "잔루 만루"로 화룡점정을 찍고 끝나는 경기가 더 많았다.

"그래도 마지막 경기는 이 악물고 이겨줄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통계를 넘어서는 기적 같은 것은 없다. 3할이 조금 넘는 승률의 이 막장팀은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것이 당연하다.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인데 왜 이렇게 쉽게 아무렇게나 기대해버리는 걸까. 가진 것보다 조금 더 나은 결과를 그래도 기대하는 것이 사람 마음일 텐데 어째서 세상은 이렇게나 정확하고 싸늘할까?"
- 윤지운, <안티레이디> 중에서.

 
 2020년 12월 20일 방송된 SBS <런닝맨> '불꽃 튀는 스토브리그' 특집 중 한 장면

2020년 12월 20일 방송된 SBS <런닝맨> '불꽃 튀는 스토브리그' 특집 중 한 장면 ⓒ SBS

 
베이징 올림픽이 끝나고 돌잡이 하듯 우연처럼 이끌린 팀은 솔직히 잘하는 팀이 아니었다. "야구 왜 좋아해요?" 누군가 묻는다면 "잘하니까요"라고 자랑스레 말하는 건 내 평생의 꿈인데, 한 번도 그래 본 적은 없다. 대신 "야구 안 좋아해요, 그냥 보는 거예요"라고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피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렇게 야구가 주는 '희망'에 매일 고문당하는 신세지만, 희망고문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올해는 다르다, 내일은 다르겠지, 이번 이닝은 다를거야' 애써 근거 없는 낙관을 주입해가며 다음을 기대하는 것이 야구이며 삶인 듯하다.

그리고 때론 낙관이 현실로 다가오는 기적도 일어난다. 이 기사를 쓰는 동안 내가 응원하는 팀은, 이미 가망없다고 생각했던 승부를 9회 말에 뒤집는 역전 드라마를 썼다.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실책을 저질러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던 그 선수가 끝내기 안타의 주인공이었다. 영웅이 된 선수는 "야구는 단체 스포츠다. 팀원들이 저에게 만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거로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실수에 실수를 거듭하며 엉망진창으로 시작했더라도 반등할 기회 한번 없이 끝나는 경기란 없다. '희망고문'이라는 건 야구가 너그러이 다음 기회를 내어주는 스포츠라서 가능하다. 놓치고 넘어지고 미끄러지며 우당탕탕 하더라도 끝나기 전까진 끝나지 않았다며 기대할 수 있다.

느릿하고 지루하지만 그래서 더욱 너그러운 스포츠, 나는 그런 야구에서 포기하지 않는 희망을 배운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야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여성의 일상에 빛나는 영감을 불어넣는 뉴스레터 'wew'를 만들고 있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