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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편집자말]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한 초기에 연습용 원단, 묻지마 원단을 몇 번 산 적 있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묻지 말고 30마에 2만 원,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이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옷을 만들어 입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천을 싸게 사고 싶은 마음, 한편으로는 아직 비싼 천을 사서 바로 만들어 입을 실력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초보 봉틀러들의 심리를 파고드는 틈새시장이었다.

연습용 원단을 산 횟수는 한두 번이지만 그 덩어리를 받았을 때의 충격은 컸다. 10년 뒤에 유행하게 될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라는 유행어가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엄청난 부피의 원단이 들어왔는데 그 중에 뭔가를 만들어볼 만한 천은 적었고 그걸로 뭘 만들어야 할지 판단할 눈썰미도, 만들어낼 능력도 부족했다. 그리고 어렵게 뭔가를 만들었어도 그 쓰임은 1년을 채 가지 못했다.

그건 싸게 산 게 아니다
 
묻지마 원단을 샀더니 이 내복원단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만들어도 안 예쁠 게 뻔한 원단으로 만들어야 하는 슬픔'이라고 쓴 메모를 발견했다.
 묻지마 원단을 샀더니 이 내복원단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만들어도 안 예쁠 게 뻔한 원단으로 만들어야 하는 슬픔"이라고 쓴 메모를 발견했다.
ⓒ 최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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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용으로 싸게 산 원단으로 옷을 만들면 정성 들여 만들었어도 입지 못할 물건이 되고 말았다. 좋은 원단으로 정성들여 만들어 제대로 된 옷을 한 벌 입는 편이 낫다는 결론이 나왔다.

연습용 원단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 없이 묻지마로 사들인다는 게 문제다. 천이 많아져서 그걸로 뭔가를 만들긴 해야겠는데 그 안에 내가 만들고 싶은 옷을 만들 수 있는 원단은 없다.

공들여 만들었는데 못 입는 옷이 쌓여간다. 그러면 바느질이 재미가 없어진다. 한번에 많이 들인 연습용 원단은 끝내 옷이 되지 못하고, 내 마음에 얹힌 체기가 되어 남는다. 결코 싸게 산 게 아니게 된다.

사는 동안 열심히 해야할 일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파악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취향이 아닌 것을 돈 때문에 받아들이는 선택을 취미 생활에서 굳이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묻지마 원단 더미'는 본 것도 많고 만들 수 있는 것도 많아서 어떤 재료를 가져다 안겨도 그럴듯한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다.

나는 실력이 없으니 묻지마를 사야겠다가 아니라 나는 아직 경험이 없으니 묻지마 원단을 사서 제대로 활용하기가 어렵다, 고 생각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좋은 원단을 사서 다림질이면 다림질, 시침질이면 시침질, 해야 할 과정을 빼먹지 않고 제대로 만들면 어느 순간 옷이 되는 경험을 쌓이니 처음부터 좋은 원단으로 만든다. 바지 앞지퍼 달기나 카라티의 단추 달린 앞단작, 입술주머니처럼 정 부담스러운 과정은 그 과정만 자투리 천에다 연습을 해보고 실전에 들어가면 된다.

좋은 원단으로 바로 만들기가 부담스럽다고 자꾸 연습용 원단으로 옷을 만들면 공들여 만들었는데 입어봐도 뭔가 태가 나지 않으니 두 번 손이 가지 않는다. 또 이미 한번 만들었기 때문에 진이 다 빠져버려 같은 옷을 만들고 싶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니 좋은 천으로 새로 만드는 걸 미루게 되고 만다.

원단이 산을 이루고, 쌓인 원단에 짓눌리다보면 내가 만들어 입고 싶은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단을 없애기 위해서 만들게 된다. 어떤 디자인이 더 천을 많이 잡아먹으면서 간단히 만들 수 있을지 궁리하게 되는 본말전도 현상도 일어난다.

인생은 연습이 없다. 매일 자고 일어나 한번뿐인 새로운 날을, 귀하디 귀한 내 인생의 실제 시간을 쓰면서 아무 대본 없이 살아간다. 지금은 아직 진짜 내 인생이 아니고 나중에 잘 살기 위한 연습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은 없다.

매미는 땅 속에서 애벌레로 6년을 살다가 우리가 아는 성충 매미로 사는 기간은 보름이 안 된다는 애기를 들었을 때 처음엔 충격이었다. '고작 2주를 땅 위에서 맴맴 거리려고 땅 속에서 6년을 보낸다고? 사는 게 뭐 그래?' 그러다 내가 성과지상주의의 사고방식에 젖어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충 매미로 사는 기간만 매미의 삶이 아니라 땅 속에서 나무 뿌리에서 수액을 빨아먹으며 산 기간도 매미의 일생인데 나는 땅 위로 올라와 노래하는 2주만을 진짜 인생(매미의 한자어는 매미 蟬선이라고 하니 선생인가)이라고 생각했구나.

이 시험을 통과해서 대학생이 된 후에야, 입사 시험에 합격해서 직장인이 된 후에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어야 내 인생이 시작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어떤 걸 좋아하고 잘 하는지 생각해보고 무엇이 되고 싶다고 결심하고 그 결심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모든 순간이 내 인생의 찬란한 전성기였다.

망쳐도 괜찮다, 실력으로 쌓이니
 
마음에 드는 천으로 옷을 만들어 완성하는 순간
Unsplash
 마음에 드는 천으로 옷을 만들어 완성하는 순간 Unsplash
ⓒ ?ⓒtaylor_sm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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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은 직선박기면 족하다. 내가 박아야 할 곳에서 박기 시작하고 멈춰야 할 곳에서 멈출 수 있도록만 연습하고 나머지는 실전에서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게 맞다. 좋아하는 원단에 가위를 댈 때 '망치면 안 되는데, 반대로 재단한 건 아니겠지? 같은 쪽을 두 개 재단한 건 아니겠지?' 불안이 엄습한다.

망칠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가끔은 일어나지만. 하지만 수습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수를 하고 수습을 하는 과정조차도 경험으로 쌓여 내 바느질 실력을 이룬다.

너무 만만해서 가위로 자르면서도 아무 느낌이 없고, 만들면서도 심드렁한 옷은 완성하고 나서도 그저 그런 후줄근한 옷으로 옷장에 들어가서 자리만 차지하게 된다. 옷장에 옷이 가득한데 입을 옷이 없다는 탄식을 내뱉게 되는 이유가 된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가위를 대기가 망설여지는 천에 가위를 대고 사각사각 잘라나가는 순간의 설렘을 많이 느껴봤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돌이킬 수 없는 파괴를 통해 완성해낸 옷을 입은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며 도전을 성공으로 마무리 짓는 경험을 쌓아갔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것을 아꼈다가 나중에 언젠가 내가 실력이 되면 만들어야지, 하다가는 그 원단을 보며 눈을 반짝이던 마음은 사그라들고 마침내 내가 뭘 만들려고 이 천을 샀는지 기억도 하지 못하게 된다. 내 안에서 솟아난 생기를 그때그때 느끼고 키우고 발산하면서 살면 좋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원단은 망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실패가 두려워 시도하기를 미루고 있는 동안에도 내 인생은 따박따박 투입되고 있으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
태그:#바느질, #부캐, #연습용원단, #구매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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