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가쁘게 흘러간다. 찰나를 놓칠세라 집중을 하건만, 간첩 '동림'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과 난무하는 정보 속에서 세밀한 조각 맞추기가 쉽지 않다. 쫓고 쫓기는 인물들의 심리로 장면과 장면 사이의 긴박감은 유지되지만, 빠르고 많은 대사들이 타버린 문서처럼 내용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치밀해야 할 조직 사이사이 보이는 유격을 눌러 주는 것은 슬픔을 동반하는 묵직한 주제이다. 영화 <헌트>는 영화가 구현해내는 가상 현실이 실제와 다름 없다는 인식을 야기한다.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 불친절한 결말은 절망의 총성처럼 가학적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시도는 피학적인 것일까. 지옥 같은 사냥터, 관객들은 그 어디에서 구원을 찾을 수 있을까. 
 
영화 <헌트> 포스터

▲ 영화 <헌트> 포스터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영화 <헌트>가 변형시킨 이야기는 명백하다. 우리의 어두운 현대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간첩 잡는' 이야기는 참혹하다. 한 사람을 위해 가동되는 조직이 자행하는 무차별적인 폭력은 공포스럽기 그지없다. 제 살 길을 도모하기 위해 조작과 이간질을 서슴지 않는 권력은 그 어떤 괴물보다 포악하다. 

숨이 막히는 것은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는 음모보다 권력의 목적을 위해 '나'와 동료를 포함하는 불특정 다수의 존엄과 생명이 위협 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잔인하게 하수를 부리는 권력의 극악함을 그대로 답습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그 누구도 빠져나갈 구멍을 찾을 수 없다. 싸움 붙이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싸워야 하고, 감시 당하는 것을 눈치 채고도 모른 척해야 한다. 

때문에 간첩 '동림'을 쫓는 김정도(정우성 분)와 박평호(이정재 분)의 대립에 승자는 없다. 쓰임을 다한 사냥개는 언제든 버려진다.

누구든 즉시 감금될 수 있는 밀실이 존재하는 이 디스토피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그 어떤 고뇌 없이 명령에 복종하는 '기술자'로 보인다. 미소를 지으며 즐겁게 혹은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이 사람(들)은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정도나 평호와 달리 평온하다. 제 일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자가 누리는 평화, 그 평화가 부럽기보다는 혐오감이 느껴지는 것이 바로 영화 <헌트>가 제시하는 '구원'이다. 
 
영화 <헌트> 한 장면

▲ 영화 <헌트> 한 장면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한나 아렌트는 나치 독일 치하의 '유대인 문제 전문가'로 기능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고한다. 독일과 유럽 전역의 유대인을 소개하고 이송하는 과정을 책임졌던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위를 임무에 충실한 '국가적 공식 행위'라고 변호한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문제 의식을 전혀 가지지 못하는 아이히만을 향해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유대인 학살에 협조하고 눈 감았던 많은 당시의 사람들이 아이히만과 그리 다를 것이 없었음을 폭로한다.

아렌트는 유대인 대량 학살이라는 인류의 비극에 무거운 책임을 묻는 한편, 나치에 협조하지 않았던 또다른 사람들을 환기시킨다. 비록 협조했던 사람들보다 적은 수였지만, 나치의 요구에 협력하지 않았던 나라들과 유대인의 탈출을 도왔던 사람들의 면면은 아렌트의 황량한 보고서에 사람의 온기를 채운다. 

정도와 평호는 자신들을 부리는 권력의 요구에 충성한다. 권력이 그러하듯 제가 살기 위해 의심을 이유로 감금하고 가혹한 고문을 가한 후 필요한 죄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순간순간 흔들린다. 두 사람은 분노하고 슬퍼하며, 제가 하는 일에 고통을 느낀다. 그들의 고뇌 속에는 나치 치하 속 독일의 아이히만이나 예루살렘의 재판정 속 아이히만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양심의 가책이 보인다. 

누군가의 양심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며, 가책이 정도와 평호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 양심과 가책은 사냥개를 사람으로 변모시킨다. 권력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닌 제 삶의 살아가는 사람말이다. 그 속에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멈추지 않고 이어지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듯 무도한 시대는 지나갔다. 무도한 폭력과 만행이 보이지 않는 곳에 여전히 잔존할지라도 모든 것이 그때 그대로는 아니다. 분명한 것은 변화는 목적을 위한 도구들의 힘이 아니라 '고뇌하는 사람들'의 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영화 <헌트> 속 정도와 평호의 대립이 극한에 치달을수록 관객의 고뇌는 깊어갈 것이다.

우리의 양심, 그 곳에 구원이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네이버 포스트 평범한 그녀(https://m.post.naver.com/sungyuji3)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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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대한민국 한 귀퉁이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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