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장실 위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교내 화장실 개선사업위원회 위원이다. 쉽게 말하면 화장실 리모델링 회의에 참석하는 거다. 내가 학교에서 무슨 직책을 맡아서가 아니라 여성 교사를 대표할 사람이 필요해서 행정실 담당자가 나에게 부탁한 것이고 나는 별 고민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우리 학교 화장실은 2006년에 학교 자체 예산으로 보수했다고 한다. 그후 16년 만에 화장실 리모델링을 하라고 교육청에서 예산이 내려왔다. 지금까지 두 차례 회의를 했으니 이제 시작 단계나 마찬가지다.
설문조사를 통해 교사와 학생들의 의견을 받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건축사무소에서 여러 모델을 제시했다. 하지만 원래 학교가 지어질 때부터 화장실 공간이 협소했기 때문에 큰 변화를 주기는 어렵다는 게 건축사무소의 설명이었다.
한계가 있지만, 가급적 쾌적한 화장실을 만들기 위해 몇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갔다. 예를 들어 학생 화장실에 각 칸마다 화장지를 배치하냐 안 하냐, 손을 닦는 용도로 비누를 놓느냐 세정제를 놓느냐 따위의 이야기다. 오고 가는 이야기마다 행정실 측에서는 비용 문제를 근거로 부정적인 의견을 말씀하셔서 잘 받아들여 주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은 레이아웃을 논의하는 초기 단계이니 실행 단계나 디자인 단계 때 이야기하겠다는 생각으로 가급적 긴 논쟁은 피했다. 회의에 참석한 학생 대표들에게 발언 기회를 최대한 주기 위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줄여야 하기도 했다.
특히 여기서 내 역할은 여성 교사들을 대변하는 것이다. 우리 학교 여성 교사는 20명이 넘는데 5층 건물 중 화장실은 1층에 딱 하나 있다. 5층 교무실에 있는 여성 교사는 화장실에 한 번 가려면 마치 짧은 여행을 떠나는 듯 큰 다짐을 해야 한다.
수업이 연달아 있고 업무가 많은 경우에는 화장실이 뒤로 밀리는 경우도 있다. 나도 5층에서 몇 년 근무했었고, 그때 마침 임신을 하기도 했다. 임신을 하면 화장실에 더 자주 가고 싶어지는데 몸은 점점 무거워져서 무척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제시된 안은 여성 교사 화장실을 2층(지금 남성 교사 화장실 자리)으로 옮기는 방안이다. 한 층 올라오는 것만으로도 모두 환영할 일이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다행히 건축사무소 담당자가 여자 직원이어서 각 층마다 작게나마 공간을 만드는 안도 만들어보겠다고 해서 다음 회의를 기다리기로 했다.
남성 교사 화장실도 하나밖에 없지만, 그분들은 수업 시간에 학생 화장실을 사용한다. (우리 학교는 남자고등학교이다.) 남성 교사 화장실도 2층에 딱 하나 있으니 모두가 거기로 다녀야 했다면 남성 교사들도 우리들처럼 많이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각 층마다 2개씩 남자 화장실이 있으니 그분들은 불편함을 모른다.
화장실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런데 회의를 하다보니 더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는 걸 알았다. 바로 장애인 화장실 문제다. 우리 학교에는 1층에 딱 한 칸의 장애인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다. 지금까지 휠체어를 타야 하는 장애인 학생이 입학한 적은 없다. 규정 때문에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 장애인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는 중앙 현관에 있는 휠체어 길로 올라온 후 복도를 따라 한참 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더 기가 막힌 건, 우리 학교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점이다. 요즘 지어진 학교 건물에는 당연히 엘리베이터가 있고 예전에 지어진 건물이라 해도 구청에서 예산을 지원해주기 때문에 (5층 정도 되는 건물 중) 엘리베이터가 없는 학교는 무척 드물다.
우리도 구청에서 예산을 지원해 준다고 하는데도 건물에 만들 곳이 없다는 이유로 관리자들이 난색을 표하고 있다. 작년부터 몇몇 교사들과 학부모, 학생들이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데 적극적으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 학교에 휠체어를 타야 하는 장애인이 입학한다면, 교실이 3층부터 시작되므로 적어도 3층까지는 험난하게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문제는, 화장실에 가려면 그 과정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장실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사실을 느끼면서도 나는 각 층에 장애인 화장실 칸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공간이 너무 좁아서 양변기 개수도 줄여야 조금 쾌적해지는 판국에 장애인 화장실 이야기를 해도 이뤄지기 어렵겠다고 생각한 탓이다.
당장 휠체어를 타야 하는 학생이 없으니 심각성을 모른다. (지금 상황이라면 입학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장애가 있는 학생 뿐만 아니라, 학생들은 언제든 다칠 수 있다. 남자고등학교라 그런지 운동을 하다가 다리에 깁스를 해야 하는 경우는 종종 발생한다.
당장 어제만 해도 계단에서 깁스를 하거나 목발을 짚은 학생을 여럿 만났다. 그런 아이들이 한 발을 들고, 혹은 목발을 짚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장면은 너무 아찔하다. 화장실은? 그 좁은 화장실에서, 잡을 수 있는 지지대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 화장실에서 얼마나 불편할까 생각만 해도 안타깝다.
너무나 당연히 갖춰져야 하는 시설이 이렇게 뒤로 밀린다. 내 일이 아니니까 공감하지 못하는 문화를 화장실 위원이 되니 정말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나조차도 뒤로 미뤄놓은 게 아닌가 반성이 든다. 다음 회의 때는 꼭 말해야겠다. 적어도 3층 정도에는 장애인 화장실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