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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나이프크루에서 진행한 '건강' 살롱에 참여한 참가자들이 남긴 포스트잇
 버터나이프크루에서 진행한 "건강" 살롱에 참여한 참가자들이 남긴 포스트잇
ⓒ 버터나이프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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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여성가족부 사업에 참가해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사업 이름은 '버터나이프크루'였다. 청년의 입장에서 정책을 분석하고 토론하며 결과물을 제출하는 사업이라고 들었다. 정책에 관심이 많았던 만큼 흔쾌히 사업에 참가했다.
 
버터나이프크루 사업에 참여한 청년들은 다양했다. 누구는 대학생이고, 누구는 직장인이며, 누구는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고, 누구는 직장을 다니지 않았으며, 장애인, 서울 외 지역 거주자 등도 있었다.

버터나이프 크루는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정한 주제 몇 가지를 선정하여 살롱을 열었다. 건강에 대해 이야기하는 살롱, 장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살롱, 주거 안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살롱, 외모 지상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살롱 등. 참가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살롱에 참가하여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대부분 경험에서 시작한 이야기를 사회적으로 풀어나가는 방식이었다. "아픈 사람을 탓하기보다 아플 때 충분히 쉴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할 것 같아요",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유니버셜 디자인 모델이 확장되어야 할 것 같아요" 이러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매번 살롱에서는 공감과 지지를 기반으로 열정적인 토론들이 진행되었다. 버터나이프 크루 사업에 철퇴를 가하고자 하는 정치인들은 사업 참가자들과 주최자들이 모두 한통속의 이상한 사람들로 보는 것 같지만, 그렇진 않았다.

성평등에 대한 개인의 가치관 차이도 분명히 조금씩 있었고, 어떠한 방식으로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지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달랐다. 한통속이라 부르기에는 결론을 제시하기 위해 꽤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나는 그곳에서 '성숙한 시민으로서의 토론 참가' 방안을 배울 수 있었다. 입장 차가 있더라도 서로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대화에 참여할 방안을 끊임없이 고민했기 때문이다.
 
살롱이 마무리된 이후, 참가자들은 팀을 꾸려 정책 연구에 돌입했다. 전문가를 인터뷰하고, 논문을 찾아보며, 직접 현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마지막 모임에서 참가자들은 본인이 소속된 팀에서 조사한 정책을 다른 참가자들에게 보여줬다. 그 속엔 당연히 청년들이 겪고 있는 고단한 삶들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었다. 그래서 신선했고, 그래서 의미 있었다.

결과물의 퀄리티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팀은 여성 청년이 겪는 주거 안전의 문제에 대해 조사한 후, 실제 법안의 형태로 만들기도 했었다. 정책결정자들이 버터나이프크루의 결과물들을 자세히 살펴봤다면, 아마 수많은 아이디어를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자고 일어나니 '세금 도둑'이 되어 있었다
 
국민의힘 권성동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가 7월 18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를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국민의힘 권성동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가 7월 18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를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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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나이프크루에서 졸업한 지 4년이나 지난 2022년, 난데없이 버터나이프크루가 뉴스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세금 낭비성 사업', '남녀 갈등의 원인인 과도한 페미니즘', '일반 청년'이 참여하지 않은 사업 등의 키워드가 눈에 보였다.

논란의 시작은 한 통의 전화였다.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이 여성가족부 장관과 통화하며 해당 사업의 문제점을 전한 후, 여성가족부가 사업 전면 재검토 결정을 내리겠다고 발표하면서부터다.

그동안 버터나이프크루의 사업들은 취지와 목적, 효과들이 소거된 채 단편적으로 쪼개지고 생략된 채로 보도되었다. 어느 순간 그 사업에 참가한 나도, 지인들도, 그곳에서 만난 지극히 평범한 청년들도 비이성적인 주장과 활동을 통해 세금을 빼먹는 도둑이 되어 있었다. '일반 청년'에서 탈락한 것은 덤이었다.
 
권성동 의원도, 여성가족부도 버터나이프크루 참가자들에게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만족도 조사 같은 것도 없었다. 그곳에서 무엇이 진행되었는지, 어떤 발전이 있었는지, 왜 참여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사업에 직접 참여한 청년들의 경험 따위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고 판별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적 채용 논란에 대해 "9급 갖고 뭘 그러냐" 등의 발언을 했던 권성동 의원이 생각하는 청년은 아마 딱 그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 먹고 토론하고 노는 거 자기 돈으로 하면 됩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듣거나 청년들이 발전할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 권 의원에게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적 채용 논란 후 버터나이프크루 때리기로 청년들의 지지를 끌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지 우려스럽기까지 했다. 남녀갈등은 누가 부추기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페미니즘을 주제로 양분화된 청년을 통합하기 위해 고민하는 정치인들은 많았다. 권성동 의원의 해법은 그 고민 중 가장 최악의 방식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성평등을 고민하는 청년들을 '일반청년'이 아니라고 매도하는 것은 청년들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방식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버터나이프크루에 모인 청년들은 지극히 일반적인 청년들이었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주거환경에서 살고 싶고, 아플 때 자유롭게 연차를 사용할 수 있는 직장을 원하며, 성폭력의 피해에서 안전하길 원하는 욕망은 전혀 지나친 것이 아니었다.

권성동 의원이 지적한 공유주방에서 밥 먹고 성평등 대화하기, 여성들에게 '넷볼'이라는 공놀이 가르치기 등의 활동도 그러하다. 페미니즘을 악마화하는 사회 속에서 청년 페미니스트들은 자주 아프다.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지 않는 젊은 여성들도 자주 아프다. 그건 그들이 나약해서가 아니라 쉽게 사회적 편견이나 폭력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들이 함께 모여 대화하고, 운동하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인지 잘 모르겠다. 코로나 시기 여성 청년 자살률 증가에 대한 보도가 심심치 않게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함께 모여 서로를 돌보는 것은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지자체나 정부 주도로 1인 가구나 청년들의 활동을 지원해주는 사업은 버터나이프크루 이외에도 많다. 운동 모임을 하는 청년들, 요리 모임을 하는 청년들, 영화 보고 밥 먹고 문화생활 하는 청년들은 자기 돈으로 "밥 먹고 토론하고 노는 거"를 하기도 하지만, 지원금을 받고 "밥 먹고 토론하고 노는 거"를 하기도 한다.

청년들의 사회적 관계망을 지원하는 일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 되었다. 그래서 이 사업들을 무작정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다. 고립 청년과 은둔 청년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발전하고 있는 2022년이라면 더욱 그렇다. 버터나이프크루가 '성평등'을 주제로 하기에 특별히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과도한 면모가 있다.
 
권성동 의원이 최근 쏟아낸 말 중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성평등과 페미니즘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자기 돈으로 자기 시간 내서 하면 됩니다"라는 말이었다. 성평등 조차 개인이 알아서 시간 써서 할 일로 치부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면 인권도, 평등도, 자유도, 복지도 자유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모조리 폐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사회에는 성평등이 필요합니다"라는 아주 상식적인 말을 열심히 주장해야 하는 작금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권성동 의원이 생각하는 '일반 청년'은 무엇일까?
 
한국대학생진보연합 소속 회원들이 7월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앞에서 불공정 비리정권 윤석열 퇴진! 대통령의 사적 채용 옹호한 권성동 의원 사퇴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국대학생진보연합 소속 회원들이 7월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앞에서 불공정 비리정권 윤석열 퇴진! 대통령의 사적 채용 옹호한 권성동 의원 사퇴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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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의 공론장을 전화 한 통으로 닫으려고 하고, 사적 채용에 관한 청년들의 분노를 "9급 갖고 뭘 그러냐"라는 말로 받아치는 권 의원이 청년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을지 확신이 들지는 않는다.

어쩌면 권 의원이 생각하는 일반 청년은 사회에 대해 비판하지 않고, 토론하지 않으며, 더 나은 합의를 이끌어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정책을 결정하거나 사회를 바꾸어나가지 않은 채 사회에 영향을 받기만 하는 젊은 사람들 정도. 그런데 그런 '일반 청년'은 몇몇 기성 정치인들 머릿속에만 존재할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일반 청년이 원래부터 별난 존재라 생각한다. 성평등과 페미니즘을 해서 별난 것이 아니라 청년은 원래 좀 이상한 존재이다. 역사적으로 청년들은 늘 별나고 이상했다.

청년들이 사회 문제에 분노하고, 저항하며, 토론하며, 비판해왔던 역사는 늘 있어왔다. 현대 사회에 와서는 청년들이 더 넓은 스펙트럼으로 분노하고, 저항하고, 토론하고, 비판하고 있다. 나도 청년이지만, 청년을 설명해보라고 말할 때 자주 주저한다.

공동의 생각을 정의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청년이 제각각의 경험과 고민, 생각을 안고 살기 때문이다. 이 제각각의 경험은 자주 흩어지고 사라져서 사회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분노와 저항과 토론과 비판이 사회를 바꾸지 못하고 개인적인 것으로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그 흩어지고 제각각인 경험의 조각들을 붙잡고 더 나은 합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는 버터나이프크루 사업이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생각한다.
 
버터나이프크루 사업이 정상화되기를 바란다. 더 많은 사람들이 토론할 때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서이다. 청년들도 사회를 바꾸어나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버터나이프크루 정상화 공동대책위원회의 '전화 한 통으로 사라진 청년 성평등 정책을 돌려주세요' 서명에 다들 참여해주길 바란다.

링크 : https://campaigns.kr/campaigns/730

태그:#버터나이프크루, #권성동, #여성가족부, #페미니즘,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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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여성 정치에 관한 책 <판을 까는 여자들>과 <집이 아니라 방에 삽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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