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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리었던 김명시 장군이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 된 뒤, 친인척들, 열린사회희망연대 김영만 상임고문(앞줄 오른쪽), 김숙연 사무처장(뒷줄 왼쪽), 이춘 작가(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함께 했다.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리었던 김명시 장군이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 된 뒤, 친인척들, 열린사회희망연대 김영만 상임고문(앞줄 오른쪽), 김숙연 사무처장(뒷줄 왼쪽), 이춘 작가(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함께 했다.
ⓒ 열린사회희망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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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여 민족자존의 기치를 높이 세우신 김명시 선생의 독립운동 위업을 기리어 애국장에 포상하기로 결정하였다.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신 선생의 희생정신과 애국심은 대한민국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귀감으로서 후세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가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리었던 김명시(金命時, 1907~1949) 선생에 대해 '광복절 계기 독립유공자 포상'을 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김명시 선생에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명시 선생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손이 없어, 훈장은 여동생의 '양아들'이 받는다. 그는 현재 경북 상주에 살고 있어 국가보훈처는 경북도청을 통해 훈장을 전달한다. 포상 전수 우선순위는 상훈법시행령에 따라 결정된다. 

김명시 선생이 서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열린사회희망연대(대표 백남해)의 재심까지 가는 노력 덕분이다. 이 단체는 2018년 12월 창원시에 김명시 선생의 흉상 건립을 제안한 뒤부터 서훈 추서 관련 활동을 벌여 왔다.

당시 창원시가 '서훈'을 받아야 한다고 했던 것도 한 이유였다. 이 단체는 2019년 10월, 현재 마산 오동동문화광장 뒤편에 해당하는 김명시 장군의 생가터에 나무로 된 표지판을 세웠고, 이후 창원시가 새 표지판을 세웠다.

이후 이 단체는 신문에 '김명시 장군 친족 찾기' 광고를 냈다. 당시 <오마이뉴스> 등 언론 보도를 본 친인척들이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다. 특히 외사촌 김필두(85)씨는 장롱 속에 오랫동안 보관해 왔던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2019년 1월 처음으로 서훈 추서 신청(1차)을 했다. 하지만 당시 국가보훈처는 '포상 제외' 결정을 내렸다. 이 단체가 2021년 7월 재심을 신청하자 국가보훈처는 같은 해 8월 '사망 경위 및 광복 후 행적 불분명'의 사유를 들어 '보류' 통지했다. 

이후 이 단체는 다시 재심을 신청했고, 국가보훈처 학예연구사가 지난해 11월 열린사회희망연대를 찾아 친인척들을 만나는 등 현지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번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것이다.

김명시 장군 관련 자료를 찾거나 정리하는 일은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상임고문과 이춘 작가, 김숙연 사무처장이 주로 해왔다. <오마이뉴스>는 광복절을 앞둔 13일, 김명시 선생에 대한 재평가 활동을 해온 김영만 상임고문을 만나 관련 이야기를 들었다.

보훈처가 내민 13글자... '사망 경위 및 광복 후 행적 불분명'

- 김명시 선생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었다고 하던데.

"처음에는 막막했다. 사실상 자료가 부족했다. 우리가 수집할 수 있었던 자료는 이미 누구라도 잘 알 수 있는 수준이었다. 과거 언론에 보도됐던 내용 정도였다. 일부 역사학자들이 김명시 선생에 대해 거론하는 정도였다. 처음에 포상 신청했다가 탈락되었을 때 가장 큰 사유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에 나름대로 보완 작업을 해나갔다. 보훈처가 탈락 사유로 밝힌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13글자, '사망 경위 및 광복 후 행적 불분명'이었다. 그 이외 어떤 설명도 없었다."

- 첫 신청 때 서훈에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이었다고 보나. 

"김명시 장군이 부천경찰서에서 사망했을 때, 당시 내무부장관(김효석)이 발표하면서 '북로당 정치위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국가보훈처 입장에서 북쪽 정권 수립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 정부의 보훈 심사 기준에 맞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북로당 정치위원'은 사실이었는지?

"아니다. 그때부터 관련 자료를 집중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김명시 장군이 북쪽 정권 수립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어느 정도 높은 직위였는지가 궁금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북로당 창당대회' 관련 자료를 입수하게 되었다. 그 자료를 분석해 보니 북로당 '중앙위원'과 '감찰위원'이라는 직책은 있었지만 '정치위원'은 없었다. '2차 당대회' 명단을 보니 역시 '정치위원'이라는 직책도 없고, 여러 명단에 김명시가 없었다. 그러면 '북로당 정치위원'이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 그렇다면 김명시 장군이 북 정권 수립에 역할을 한 게 아니라는 말인가.

"우리 정부가 김명시 장군에 대해 갖고 있는 정보가 잘못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명시 장군이 북 정권 수립에 공로가 있는지 여부도 살폈다. 북쪽 국립묘지라 할 수 있는 '신미리애국열사릉'에 보면 남쪽에서 활동하다 희생되었거나 월북한 인사들이 묻혀 있다. 그런데 거기에도 김명시 장군은 없었다. '북로당 정치위원'이라는 직위도 잘못이고 북 정권 수립에 공로가 있는 인물도 아닌데, 일제강점기 때 7년간 옥살이를 하고, 21년 동안 무장항일 투쟁을 한 인물은 당연히 서훈을 받아야 된다는 생각에 재심을 신청했다."

- 국가보훈처가 현지 조사를 벌이기도 했는데.

"세 번째 신청을 한 뒤 보훈처 직원들이 창원마산에 와서 조사를 벌였다. 우리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친인척들도 만났다. 당시 보훈처는 올해 광복절 계기로 서훈 여부가 발표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낙관적인 입장에서 기다렸다."

- 훈격(건국훈장 애국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건국훈장 독립장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김명시 장군의 항일무장투쟁 이력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봤다. 독립유공자 서훈에 있어 민족주의, 사회주의를 구분해서 훈격이 결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국가 위상이나 국력도 커졌으니 진영 구분 없이 제대로 평가를 했으면 좋겠다."

- 창원마산에서도 김명시 장군에 대해서는 많이 모르는 것 같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어려웠던 점이 그 부분이다. 김명시 장군의 고향인 마산에서도 시민들이 아무도 몰랐다. 그것보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으로 알려진 게 큰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우리조차 선뜻 나서는 데 제한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2015년 전후해서 영화 <밀정>, <암살> 등이 나오면서 우리 사회에서는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그런 분위기가 김명시 장군을 주변에 알리는데 큰 힘이 되었고, 좀 더 적극적으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 김명시 장군 관련 활동을 벌이는데 부정적 시선은 없었는지?

"사업을 활발하게 하고 싶어도 제한을 받은 것은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빨갱이'를 자꾸 영웅으로 만드느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정부에서도 인정을 했기에 고향 사람들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명예회복을 꼭 해드리겠다'... 이제 약속 지킨 것 같다"
 
열린사회희망연대 김영만 상임고문(가운데)과 이순일 공동대표가 2019년 1월 9일 창원마산 정부경남지방종합청사 내 경남동부보훈지청을 찾아 '김명시 장군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서'를 냈다.
 열린사회희망연대 김영만 상임고문(가운데)과 이순일 공동대표가 2019년 1월 9일 창원마산 정부경남지방종합청사 내 경남동부보훈지청을 찾아 "김명시 장군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서"를 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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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시 장군 관련 자료를 찾으면서 특이한 사항이 있었다면?

"극적인 장면이 많았다. 특히 너무 알려진 게 없다 보니 자료도 없었고, 고향에서도 '구전'으로 내려온 이야기조차 없었다. 내가 어렸을 때 '마산 출신 여성이 중국에서 항일 투쟁을 했는데 장군 칭호를 받았다고 하더라'는, 희미한 전설과 같은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름이라든지 활동을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김명시 장군에 대해 알아 가는 과정에서 오빠(김형선)와 남동생(김형윤)이 독립항일투쟁과 노동운동을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 고인의 후손이나 친인척도 아닌데 어떻게 나서게 됐나.

"우리는 같은 고향 사람이다. 내 고장 사람이니까. 본능적으로 우리 고향에서 역사적으로 업적을 남긴 인물이 있으면 자랑하고 존경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불행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묻혀버린 인물을 찾아서 후배들에게 알리는 일은 보람된 일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 '친족 찾기'도 했는데.

"분명히 친족이 어디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언론 협조 속에 친족이 나타났다. 그 순간 깜짝 놀란 사실이 있다. 친족이 한두 명도 아니고 굉장히 많았다. 그것도 가까운 마산에 살고 있었다. 처음에는 친족들이 일찍 마산을 떠났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친가 쪽 사람들이 많이 마산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외가 쪽 사람들도 찾게 되었다.

친인척들은 오랫동안 '김명시'라는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자기 집안 출신으로서 굉장히 긍지를 가지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왜 입을 닫고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해방 이후부터 극심한 이념 갈등 속에서, 특히 남쪽에서는 사회주의운동이 불법화되면서, 가까운 친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취직도 못 하고 경찰 감시를 받다 보니 그들은 입을 닫았던 것이다."

- 친인척을 다 찾아 낸 건가?

"김명시 장군이 결혼을 했는지, 자식은 있었는지에 대해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김명시 장군은 다섯 형제가 있었는데 생사를 모르는 형제도 있었다. 김명시 선생 언니의 손자가 경기도에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막내 여동생의 '양아들'이 경북 상주에 산다는 사실을 알아 냈다. 처음에는 그 소식을 듣고 굉장히 반가웠다. 여러 차례 전화통화를 했지만, 김명시 장군 관련 자료나 증언이 없었다. 매우 안타까웠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나 친인척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를 알 수 있는 하나의 사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 오랫동안 김명시 장군을 추적하면서 드는 생각은.

"김명시 장군이 살아있다면 묻고 싶은 말이 있다. 집안이 온전하지가 않은데, 독립운동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다. 나는 김명시 장군을 늘 '누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누나가 없었다. 김명시 장군을 알고부터는 '내 누나'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동네 누나 말이다. 사무실 출입구에 사진을 붙여 놓고을 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누나의 명예회복을 꼭 해드리겠다'고. 이제 약속대로 해드렸다는 생각이 든다."

- 김명시 장군의 사망 경위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일부에서는 의문사라고 하는데 규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지.

"이번에 서훈 재심 신청하면서 이미 경기남부경찰청, 부천경찰서에 정보 공개 요청 과정을 거쳤다. '체포 당시 혐의'와 '시신 인수를 누가 했는지', '시신 인수자가 없었다면 어떻게 처리 했는지' 등에 대해 물었는데, 결론은 '자료 없음'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현재로서는 사망 경위를 따지기 힘들다.

일부는 김명시 장군이 경찰서에서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고 하기도 하고, 반면에 김명시 장군 정도라면 동지의 이름을 불지 않기 위해 비밀을 지키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라 하기도 한다. 어떻게 사망했는지, 고문에 의한 타살인지 자살인지를 지금은 밝힐 수 없다."

- 서훈을 받기까지 창원시와 언론의 관심이 컸다고 하던데.

"창원시와 시민들의 관심이 컸다. 감사 드린다. 특히 서훈을 받기까지 <오마이뉴스>가 계속 보도를 하면서 역할을 했다. 서훈 신청에 두 차례나 탈락 되었을 때 우리 뜻을 정확하게 전달했던 매체가 <오마이뉴스> 였다. 언론 보도가 서훈 심사를 받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고맙게 생각한다."
 
창원마산 오동동문화광장 옆에 있는 김명시 독립유공자의 생가터 표지판(원안).
 창원마산 오동동문화광장 옆에 있는 김명시 독립유공자의 생가터 표지판(원안).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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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유공자 서훈을 계기로 기념사업을 할 계획이 있나.

"차차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장 급한 게 있다. 오동동문화광장 옆 생가터 주변부터 새롭게 정비해야 한다. 지금은 주변이 어지럽게 되어 있는데, 안내판도 새로 세워야 한다. 지금은 글씨가 잘 보이지도 않고 조잡하다. 생가터 주변에 3‧15의거발원지기념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린 '인권자주평화다짐비'가 있다. 김명시 장군 생가터와 연계해서 '테마골목'으로 조성해 시민과 학생들이 많이 찾아올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

김명시 장군 흉상 건립을 제안했을 때 전임 허성무 창원시장은 '서훈을 받으면 하겠다'고 했던 적이 있다. 이번에 창원시에 관련한 요청을 할 것이다. 또 이번에 서훈 소식이 알려지고 나니까 김명시 장군의 항일무장투쟁을 담은 영화 제작을 제안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제작을 위해 '펀딩' 이야기도 나온다. 김명시 장군에 대한 관심이 이전과 비교하면 가히 폭발적이다. 여러 기념사업을 생각해 보겠다."

창원마산 출신인 김명시 장군은 일제강점기 중국 화복지역에서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의 여성부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벌여 '조선의 잔다르크' 내지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렸다. 1930년 하얼빈 일본영사관 공격을 주도했으며, 신의주에서 일경에 체포돼 7년간 복역했다. 1939년 출옥한 뒤 중국으로 탈출해 '팔로군'에 들어가 천진, 제남, 북경, 태원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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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심 끝에...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독립유공 서훈 (8월 12일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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