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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9일 오후 1시 서울시 서초구에 있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1968년 당시 한국군에 의해 발생한 퐁니퐁넛 학살 관련 기자회견이 있었다. 기자회견에는 학살 당시 한국군에 의해 전 가족을 잃고 혼자 살아남았던 응우옌티탄씨(학살 당시 8세)와 한국군의 학살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응우옌득쩌이씨(당시 28세)가 증언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로 제법 널리 알려진 퐁니퐁넛 학살은 구정 대공세가 한참이던 1968년 2월 12일에 발생했다. 구정 공세 당시 미군과 남베트남 연합군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봉기를 일으킨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맞서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는데, 한국군 또한 이러한 작전에 동참했다.

학살 피해자 중엔 1살, 2살 영유아까지 
 
한국사람들이 많이 놀러가는 베트남의 주요 관광지인 다낭에서 얼마 안되는 거리에 있다. 이 사진은 글쓴이가 베트남에 갔을 때 직접찍은 사진이다.
▲ 퐁니퐁넛 학살 위령비 한국사람들이 많이 놀러가는 베트남의 주요 관광지인 다낭에서 얼마 안되는 거리에 있다. 이 사진은 글쓴이가 베트남에 갔을 때 직접찍은 사진이다.
ⓒ 김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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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과정 속에서 1968년 2월 12일 꽝남성 디엔반 현에선 한국군에 의해 69명에서 74명의 민간인이 무차별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코로나19 초창기이던 2020년 2월 베트남에 갔던 글쓴이는 학살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다낭에서 그리 멀지 않은 퐁니퐁넛 학살 위령비를 방문했었다. 위령비에는 학살당한 74명의 명단이 작성돼 있었는데, 그중에는 도저히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으로 간주될 수 없는 1살, 2살짜리 영유아의 명단도 있었다.

퐁니퐁넛 학살은 당시 미군이었던 본 상병이 촬영한 현장 사진들을 포함해, 미군 측 문서 및 여러 증거자료들이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관련 사진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퐁니퐁넛 학살은 학살을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하기 힘든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억의 전쟁>의 한 장면
▲ 다큐멘터리  <기억의 전쟁>의 한 장면
ⓒ 시네마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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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직접 경험한 학살의 진상규명과 한국 정부의 진심 어린 사과를 위해 한국을 여러 번 방문했던 응우옌티탄씨는 이번 기자회견에서도 한국 정부의 사과와 학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래는 응우옌티탄씨가 기자회견에서 증언한 내용 중 일부다.
 
제가 이번에  재판에 서게 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학살의 진실을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학살은 1968년 2월 12일에 한국군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저희 가족은 학살로 인해 5명이 죽었습니다. 저와 제 오빠가 중상을 입었습니다. 저는 배에  총을 맞아서 심각한 총상을 입었습니다. 저는 이번 한국에 와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시민분들과 언론매체들이 저와 같은 피해자들을 응원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중략)

기자회견에서 증언한 바와 같이, 응우옌티탄씨는 한국군에 의한 학살로 언니 응우옌티쫑, 남동생 응우옌득쯔엉, 이모 판티응우, 엄마 판티찌를 포함해 전 가족을 잃었다. 이런 아픔을 가진 응우옌티탄씨가 원하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 정부가 학살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한국군들이 총을 난사... 시체에 수류탄 던져"
 
2022년 8월 9일 서울시 서초구 법원로 4길 23 대덕빌딩 2층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학살 피해자인 응우옌티탄씨와 학살 목격자인 응우옌득쩌이씨가 학살에 대해 증언했다.
▲ 퐁니퐁넛 학살 관련 기자회견 2022년 8월 9일 서울시 서초구 법원로 4길 23 대덕빌딩 2층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학살 피해자인 응우옌티탄씨와 학살 목격자인 응우옌득쩌이씨가 학살에 대해 증언했다.
ⓒ 김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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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응우옌티탄씨에 이어 이번 기자회견에선 당시 학살 현장을 목격했던 응우옌득쩌이씨가 학살에 대해 증언했다. 응우옌득쩌이씨는 응우옌티탄씨의 삼촌이기도 하며, 당시 남베트남군에서 복무했었다. 

응우옌득쩌이씨는 "한국 군인들이 마을에 모여 있었고, 주민들이 쓰러졌으며, 한국 군인들이 총으로 마을 주민들이 쓰러진 후에 수류탄을 던졌다"고 기자회견에서 증언했다. 아래는 이번 기자회견 당시 응우옌득쩌이씨가 증언한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마을 안에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주민들을 모아놓고, 집들을 불에 태웠습니다. 그 결과 마을에  남은 집은 한채 뿐이었습니다. (중략) 저는 망원경으로 학살을 봤는데요, 한국군인들이 총으로 난사했습니다. 난사한 다음에 수류탄을 시체에다 던졌습니다. 한국군인들이 철수한 다음에 저를 비롯한 주민들과 미군  그리고 민병대원(남베트남군)들이 마을에 들어가서  시신 수습 작업을 했습니다.  

응우옌득쩌이씨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군이 학살을 벌인 이후 마을 주민들과 미군 그리고 남베트남군이 들어가서 시신 수습을 했고, 응우옌티탄씨와 같은 학살 생존자들을 미군에게 부탁해 헬기로 수송하는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이번 기자회견에서 증언한 응우옌티탄씨의 경우 생존 당시 창자가 튀어나올 정도로 심각하게 부상을 당했으며, 동네의 어른들에게 발견돼 미군 헬기를 타고 병원에 가서 치료받아서 살 수 있었다. 티탄씨는 1년 동안 병원에 입원한 뒤에 퇴원했다.

퐁니퐁넛 학살의 또 다른 사실이라고 하자면, 당시 한국군이 자행한 학살지역이 놀랍게도 미군과 한국군의 동맹세력인 남베트남군 가족들이 사는 마을이었다는 점이다. 이번에 목격자로써 증언한 티탄씨의 사촌 응우옌득쩌이씨가 남베트남군이었다는 점은 그런 사실을 잘 증명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주월한국군사령관이던 채명신 또한 이 학살에 대한 조사에 착수해야 했고, 사건 1년 뒤인 1969년 한국 중앙정보부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조사를 했다. 그러나 당시 중앙정보부가 조사한 자료는 지금까지도 기밀이고, 아직도 국가정보원 측에서 공개하고 있지 않다.

일각에서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 세력이 한국군으로 위장해 민간인들을 살해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무엇보다 당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릴라전에서의 기본적인 요소는 민중의 지지를 받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나 한국군 그리고 남베트남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빈번히 발생한 이유에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민간인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입장에서 자신들의 해방구여야 하는 농촌에서 대량의 민간인 학살을 벌이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지난해 한국군 민간인 학살 가해자라고 고백했던 참전용사 류진성씨는 "한국군이 작전 수행 중 베트콩들이 민간인을 집단 살해하고 사라지는 게 불가능하다"고 증언한 바가 있다. 또한 류진성씨는 "베트콩은 게릴라전을 하기에, 노출되는 걸 각오하고 청룡부대 코앞에서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승소가 써있는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
▲ 응우옌티탄(좌)씨와 응우옌득쩌이(우)씨 승소가 써있는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
ⓒ 한베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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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니퐁넛 학살이 발생한 지 54년이 지났다. 54년이 지났지만, 당시 학살을 경험했던 피해자의 아픔은 지금도 계속된다. 이번 기자회견에서 응우옌득쩌이씨는 "한국 정부가 학살의 진실을 인정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응우옌득쩌이씨의 말처럼, 이제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진상이 밝혀져야 할 때다.

제주 4.3 사건과 여순사건 그리고 국민 보도연맹 학살 등 국가폭력에 의한 학살이 한국사회에서 진상이 규명됐듯이,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이 자행한 퐁니퐁넛 학살 또한 진상이 규명돼야 하며, 이것은 한국 사회의 의무다.

태그:#베트남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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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 전공자입니다. 사회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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