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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으로 귀향한 지 만 20년, 이제야 진짜 군산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듯하다. 한 살이었던 딸아이가 성인이 되고, 우연히 시작한 학원과 맺은 인연들 역시 스무해 동안 만나면서 정을 쌓아가니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한 군산사람이다.

단연 눈에 띄는 군산의 배롱나무꽃

게다가 올해는 월명산 말랭이에 책방을 열어 책방손님으로 온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쌓는다. 군산을 알리고 문화활동을 하는 책방지기 역할은 지극히 좋다. 단, 아쉬운 점이 있다면 책방에 찾아올 누군가와의 보이지 않는 약속을 지키느라 맘대로 문을 닫고 나만의 자유시간을 갖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월명산 말랭이 책방 출근이 어느새 여섯 달이 되었다. 사람들은 묻는다. 책방하니까 무엇이 좋은지, 책이 얼마나 팔리는지,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오는지, 특별한 책 판매 노하우가 있는지 등.

그러나 나의 주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다. '초로의 인생길로 접어드는 내가 책방으로 오고가는 길목마다 펼쳐지는 자연 세상과의 만남 그리고 사람과의 인연'이다. 매일 내 삶의 가치와 사유를 진실되게 만들어주는 자연환경과 사람들 덕분에 정말 행복하다.

책방이 월명산 아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서 가는 곳마다 꽃들과 나무들의 환대를 받는다. 3월에는 개나리와 진달래, 4월에는 목련과 산벚꽃, 5월에는 금계국, 라일락, 오동나무, 6월엔 이팝나무와 자귀나무꽃, 7월엔 능소화와 배롱나무꽃이 지천에 피어났다. 이러니 말랭이 마을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꽃씨처럼 보이고 그들 모두가 아름다운 꽃으로 보인다.

요즈음 전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꽃은 단연코 배롱나무꽃이다. 부처꽃과에 속한다는 진한 분홍빛 배롱나무꽃을 보노라면 절로 카메라 셔터에 손이 간다. 꽃이 100일 이상 계속 피어서 백일홍나무라고도 하며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으면 잎이 움직인다 해서 간즈름나무라고도 한다.

군산의 옥구향교 초입에 있는 배롱나무 꽃처럼 전국 각지의 유명한 고택이나 향교나 서원에 있는 배롱나무는 그 품격과 아름다움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특히 양반가에 배롱나무를 심었던 것은 선비들이 배롱나무처럼 깨끗하고 청렴한 성품을 닮으라는 뜻이 담겼다고 한다.

한시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글로 공헌한 학자들의 청렴과 기백을 상징하는 배롱나무꽃
▲ 배롱나무꽃이 만발한 문헌서원 글로 공헌한 학자들의 청렴과 기백을 상징하는 배롱나무꽃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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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유독 푸른 어느 날, 말랭이 마을 앞 도로변에 있는 배롱나무꽃 아래에서 사진을 찍어 지인에게 보내니, 고창 선운사에 핀 꽃나무 사진으로 화답했다. 꽃을 보니 맘이 둥둥 떠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가자. 어디로든. 배롱나무를 찾아서.'

지난 7월 31일 고려말 학자 목은 이색 선생을 모신 서천의 문헌서원을 찾았다. 배롱나무의 붉은 꽃잎들과 목은 이색 선생의 한시를 담은 천 자락이 두 팔 벌려 극진한 환대를 해주었다. '아, 나도 시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어찌 이 모습을 말로 담지 못하는가' 하는 슬픔이 밀려왔다. 동행한 지인 중 취미 삼아 한시번역을 하는 박선생님이 이색의 <대월>(待月)을 번역해주었다.

待月(달은 기다리면서) - 李穡(고려의 시인)

待月月未出(대월월미출) 달 뜨기를 기다려도 달은 돋지 않고
久立天星繁(구립천성번) 무성한 별을 보며 오래도록 서 있다
河漢淨如洗(하한정여세) 은하는 물로 씻은 듯 맑고 깨끗하여
萬家寂無喧(만가적무훤) 집집마다 고요하고 쥐소리도 없구나!
須臾寫銀浪(수유사은랑) 매우 짧은 순간에 은빛 물결 쏟으니
巖谷收餘昏(암곡수여혼) 산골짝 바위에 나머지 어둠 거둔다
淸賞愜幽意(청상협유의) 맑게 완상하니 그윽한 정취 흡족하여
快哉誰與言(쾌재수여언) 쾌재로다, 뉘와 더불어 이야기 나눌까?


박선생님은 책방손님 중 한 분으로 퇴직 후 취미로 한시를 번역하신다. 매일 지인들에게 당신이 번역한 한시를 나눈다 해서 나도 역시 받고 싶다고 말했다. 책방을 방문한 사람들이 봄날의 산책에서 보내는 '시가 있는 아침편지'를 받고 싶다 하면 편지를 보내는데 나와 같은 마음이라 생각했다. 한시든 현대시든 '시'를 통하여 사람을 알고 세상을 알고 싶은 내 마음이 요동쳤다.
 
문헌서원 입구에 있는 연못과 경헌루를 보며 오래된 과거를 끌어올렸다
▲ 경헌루를 바라보며 시인을 꿈꾸다 문헌서원 입구에 있는 연못과 경헌루를 보며 오래된 과거를 끌어올렸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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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전문'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책방을 운영하는 내게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한시를 읽어본다는 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과 사회상 문화상을 공부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흔히 뉴턴의 말로 인용되는 문구,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나도 하고 싶었다. 근현대 시인들의 시를 매일 읽으면서 이 시들의 근원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를 궁금해하던 참에 한시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문헌서원은 입구에 있는 홍살문부터 이곳의 얼마나 신성한 곳인지를 가늠케 했다. 주로 왕릉이나 향교 서원, 궁궐 같은 곳의 초입에서 통행자의 엄격한 격식과 예절을 살펴보는 것 같은 눈을 가지고 있어서 묘한 긴장감이 생겼다. 고려말 삼은 중 한 사람이며 성리학의 어머니라고 할 만한 목은 이색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위패를 모신 곳에 온 것이다.

정문인 진수문에 들어서니 학생들이 공부하던 강학공간인 진수당과 그들의 거처공간인 '동재(존양재)와 서재(석척재)'가 있다. 또한 학생들에게 강론을 펼쳤던 '강론당', 이색의 후손인 한산이씨의 재실인 '영모재', 이색의 문집인 '목은집' 인쇄를 위한 '장판각', 그리고 이색의 초상화(보물 제 1215-2호)가 있는 '목은선생영당'등의 건축물들이 있다.

가장 오랫동안 머물며 멀고 먼 옛날 사람, 학자 이색을 떠올린 공간은 정자 '경헌루'가 있는 연못이다. 풍경이 수려하고 고즈넉한 누각에 서 있노라니 절로 이색 선생이 살았던 시대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에 올라탄 듯했다. 혹시 아는가. 그분을 만났더라면 한시의 맛과 멋을 전수받고자 문헌서원의 한 끄트머리에라도 앉아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저 멀리 이색의 묘를 둘러싼 붉은 소나무와 안개가 장관이었다
▲ 문헌서원 진수당 가는길 저 멀리 이색의 묘를 둘러싼 붉은 소나무와 안개가 장관이었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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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포시한 여름날 빗방울과 쌍벽을 이루며 떨어지는 배롱나무꽃 향기를 맡으며 저 푸른 초원에 누워있는 이색 가문의 선조들과 교학상장(敎學相長)하며 글로서 공헌한 문헌서원의 모든 학자들에게 진심어린 묵념을 했다.

글이란 참으로 오묘하다. 시 한 구절만으로도 몇 천년 간을 오며가며 자연과 사람, 역사와 사회, 문화와 정치 등 인간이 만든 위대한 산물을 만날 수 있다니. 특히 시를 읽으며 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글이 반추되어 지금의 내 마음을 돌아볼 수 있음도 매력적이다. 한시에서 만난 사람을 찾아 떠나는 한시여행. 반복된 일상을 벗어나 잠깐이라도 평온한 휴식을 안겨준 힐링여행이었다.

태그:#이색, #문헌서원, #충남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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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희망은 어디에서 올까요. 무지개 너머에서 올까요. 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임을 알아요. 그것도 바로 내 안에. 내 몸과 오감이 부딪히는 곳곳에 있어요. 비록 여리더라도 한줄기 햇빛이 있는 곳. 작지만 정의의 씨앗이 움트기 하는 곳. 언제라도 부당함을 소리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일상이 주는 행복과 희망 얘기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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