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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공정'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기성세대들은 이런 현상을 가리켜 '불의는 참아도 불공정은 못 참는' 세대라며 비아냥대기도 했지만, '공정조차 제대로 못 하는' 이 사회에서 공정 바람은 꺼질 줄 몰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젊은 세대들의 공정 감각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 나오더니 급기야 정치가 화답하며 너나 할 것 없이 공정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공정은 서서히 이 사회의 절대 반지가 되었다. 기업에서 페미니스트를 고용하는 것을 공정의 이름으로 단호히 반대하고, 직무가 정지된 여당의 당 대표는 공부로 서열을 매기는 행위를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라고 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적 채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의 대통령을 만든 핵심 슬로건조차도 공정과 정의였다.

그렇다면 이 나라는 얼마나 공정해졌을까? 아니 최소한 공정의 사회를 향해 열심히 나아가고는 있을까? 그전에 우리가 이야기하는 공정은 과연 공정한 것일까?

한국 사회의 공정 담론에 주목해 온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 학과 교수 김정희원은 한국 사회의 공정을 왜곡된 공정이라고 말한다. 최근 출간한 <공정 이후의 세계>를 통해 불평등한 공정과 각자도생의 공정과 무한 경쟁의 늪에 빠진 공정을 짚는다. 그리고 공정 너머의 가치들이 공존하는 세계를 찬찬히 탐험한다.

김정희원은 이 책을 공정 이후의 세계로 가기 위한 초대장이라고 표현했다. 이 초대장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닿을까? 관련하여 지난 7월 22일 김정희원을 만났다. 

"'최소한 공정 경쟁 하자'? 이 말 때문에 제자리걸음"
 
김정희원 교수
 김정희원 교수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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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간 우리 시대의 공정론에 대해 연구하고, 다양한 지면을 통해 목소리를 내왔다.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을까?

"사실 청년세대의 공정성 요구가 긍정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시기가 있었다. 기성 세대가 배워야하는 새로운 가치인 것처럼 논의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같은 공정성에 대한 관심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공정 개념을 개별 사안에 따라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정치인들은 마치 자신이 진짜 공정의 수호자인 것처럼 포장했지만, 우리의 삶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에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다. 자연히 불공정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면서, 다양한 논의의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된 채로 한국 사회는 오직 '공정'만 이야기하고 있다. 말하자면 '공정한 경쟁'이라는 덫에 걸려있는 교착 상태인데, 이 상태가 몇 년째 지속되고 있다.

이 교착 상태가 가져다 준 부작용은 생각보다 크다. 마치 우리 모두가 재난과 위기의 시대에 각자도생을 갈구하는 것과 같다. 이미 우리는 하루하루 버티면서 달리고 있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여러가지 외부적 요인으로 일한만큼 잘살게 될 수 없는 시대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겨우 우리가 요구하는 게, '공정하게 경쟁하게 해달라' 혹은 '능력자들이 잘살게 해달라'여야 할까?

우리는 사실 더 많은 것, 혹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우리가 느끼는 불공정과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공정'을 넘어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다른 필수적인 삶의 가치들을 더 전면에 앞세워야 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는 '공정'이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회다. 그래서 이번 책에서 그간의 '공정' 논의를 완전히 정리하고, 다음 단계를 함께 고민해보고자 했다."
 
<공정 이후의 세계> 표지이미지
 <공정 이후의 세계> 표지이미지
ⓒ 박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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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사회에서 공정은 최우선 가치로 앞세워지고 있고, 동시에 그 의미가 왜곡되어 있기도 하다." 말씀하신 대로 모두가 공정을 말하는 시대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서 말하는 공정은 그 의미가 왜곡되어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이유인가?

"한국 사회의 '공정' 개념은 아주 좁은 의미의 형평에 가깝다. 이 이야기를 3년째 하고 있다. (웃음) 한국 사회의 공정은 공정한 분배를 실현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나는 내 노력에 정확히 비례하는 보상을 받아야 하고, 남들 역시 내가 고생한 수준으로 똑같이 고생하게 해달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나 사회 태도를 책에서는 개별주의적 존재론'이라고 설명했다. 내가 하는 노력이나 혹은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노력의 양과 질과 결과는 사회적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다. 이걸 고려하지 않고 외치는 공정은 그저 가진 자들에게 유리한 시스템을 더욱 공고히 할 뿐이다."

-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자신의 중학생 시절을 회고하며 "오직 공부로 서열이 매겨진 무한 경쟁, 그것이 바로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라고 말했을 때, 실제로 많은 청년들이 공감을 표했다"는 문장과 이어지는 것 같다. 이준석 표 공정이 가진 자들에게 유리한 공정이라는 의미인가?

"그렇다. 쉽게 말하면 어떠한 자원도 없는 저소득층 학생이 혼자서 한 시간을 공부해서 올릴 수 있는 성적과, 고소득층 학생이 한 시간 동안 소위 '족집게 과외'를 통해 올릴 수 있는 성적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나의 노력의 질,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는 사회적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이지 않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공정 개념은 무조건 '노력 대비 보상'을 외친다. 내가 노력한다고 보상도 그만큼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정 경쟁'은 결국 기득권에게 유리하다. 우리는 내 노력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조건을 재구성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공정이다."

- 한편으로 지금 이 사회를 바라보면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으며 당선된 대통령은 공정과 거리가 먼 행태를 보이고, 교수 부모를 둔 자식들은 너무 쉽게 의대나 법대를 간다. 그러니 최소한 공정이라고 하자는 얘기가 나오는 실정이라고 본다. 공정도 먼 나라 얘기인 와중에 공정 이후의 세계를 말하는 건 너무 앞선 것은 아닐까?

"바로 그 '최소한 공정 경쟁을 하자'는 얘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누구보다 공정과 상식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 공정 개념을 전면적으로 위반하고 있지 않나. 현 정부의 국정 운영도 마찬가지다. 결국 불공정에 대한 반발이 계속 쌓이니 최소한 공정성이라도 확보해달라는 이야기가 자꾸 나온다. 이런 것이 한국 사회의 공정 담론을 계속 제자리걸음 하게 하는 이유다.

그들이 말하는 공정이 얼마나 가식적인가는 이제 많은 이들이 절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정'과 '능력'이라는 핑계로 결국 기득권을 재생산하고 있지 않나? 이제는 다른 이야기를 할 때다. 실은 주위의 동료들은 물론, 청년층과도 이야기를 해보면 공정 담론에 지쳤고 탈출구가 필요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경쟁과 각자도생의 이야기를 계속 듣는 것도 힘들어 치유의 담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이제 공정 논의에 가려진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더 많이 논해야 할 때다. 이번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좀 더 본격적으로 하고자 했다."

경쟁과 각자도생으론 '지속 가능하지 않다'

- 지금 한국은 이른바 갈등의 사회가 아닐까 싶다. 책에서도 소개한 것처럼 청년 남성의 절반에 가까운 47.3%가 페미니스트 채용 거부가 공정하다고 답한 것이나, 페미니즘이 여성 우월주의라고 생각하는 청년 남성이 80%에 달한다는 결과는 좀 놀라웠다. <공정 이후의 세계>에서는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인 여성 할당제에 대해서도 다뤘는데, 관련해서 좀 얘기해 준다면?

"여성 할당제에 대해서는 책에서 꽤 길게 다루고 있기도 하다. 정치적 당위가 아니라 데이터와 논거를 가지고 얘기했기 때문에, 논의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각자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결론만 말하자면 여성 할당제는 과도기적 정책이자 미완의 기획이다. 공정을 향해가는 길목에 있는 제도다. 궁극적으로는 젠더와 무관하게 채용하고 승진할 수 있는 문화적, 구조적 바탕이 마련되어 여성 할당제가 필요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기울어진 장을 구조적으로 바로잡기가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여성 할당제는 그나마 불평등을 조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완책이라고 할 수 있다."
 
- <공정 이후의 세계>는 한국 사회의 다양한 병증에 대해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다. 고용 불안, 능력주의, 페미니즘, 차별, 무한 경쟁, 등 각각의 개념들에 대해 하나하나 치밀하게 접근하는데, 수없이 산적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하나만 꼽는다면?


"경쟁과 각자도생으로는 우리 사회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개별화된 이해관계가 아닌, 관계성과 공동체성에 기반한 삶과 정치를 구상해야 한다. 하나의 키워드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큰 틀에서 이 책은 개별주의적 존재론에서 관계적 존재론으로 이동하는, 우리의 삶의 양식과 사유의 바탕을 재구성하기 위한 책이다. 그래서 결국 관계적 존재론이 전체적인 주제가 아닐까 싶다.

타인과의 관계와 상호 영향을 인식한다면, 공정이 아닌 다른 가치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독자들을 위한 길잡이로서, 보편적 정의, 연대와 상호 부조, 돌봄, 사회 변혁과 같은 키워드를 중심으로 2부의 논의를 전개해 나갔다. 사실 1부보다는 2부의 논의가 앞으로 더 길게 이어지리라 생각한다."

- 사회 문제를 이야기하는 책들을 보면 대부분 그 해결책으로 정치를 통한 변화로 귀결되기 마련인데 교수님은 오히려 아래로 내려간다. 좀 신선했달까? (웃음) 풀뿌리와 공동체를 이야기하는데, 관련해서 좀 설명해 주신다면?

"풀뿌리 정치도 정치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슬로건도 있지 않나. 약자나 소수자, 취약 계층의 사람들은 그런 슬로건을 깊이 새기면서 싸워왔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삶이라는 건, 그 자체가 정치적 구조적 부조리의 집합체라는 뜻이다. 그런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꿔낼 것인가에서부터 출발해 구조적 개혁과 체제 전환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세계와 사회를 쇄신한다는 건 우리의 몸과 마음과 행동을 바꾼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주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는 차별과 편견을 걷어내지 못하면서 어떻게 더 큰 변화를 말할 수 있겠나. 제도적 변화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래로부터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구조와 문화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나은 삶과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들이 있는데, 그걸 오직 직업 정치인들에게만 의존해서 얻어낼 수 없다는 건 자명하다. 지금의 윤석열 정부가 나를 대변한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나. (웃음)

역사적으로도 한 사회의 혁신을 가져왔던 결정적인 계기들은 풀뿌리의 힘과 연대에 있었다. 아주 가까이는 촛불의 경험도 있고. 제도권 정치가 희망을 주지 못해도 좌절하지 말았으면 좋겠고, 풀뿌리의 힘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좌우명을 "시대와 불화하는 삶"이라고 하셨다. 보통 큰 이상을 품고 있는 사람일수록 현실에 절망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아시겠지만 세상은 잘 바뀌지 않으니까. 절망하거나 외로울 때는 없는지?

"물론 수시로 절망한다. (웃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함께 추스르면서 나아가야 한다. 흔히 세상은 잘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세상은 바뀐다. 예전에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에서 주최하는 모임에 갔다가 어떤 말을 듣고 감동받았던 적이 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지만, 인권 운동을 한다는 것은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라는 말이었다. 지금까지도 이 말을 되새기고 있다. 사회 운동을 한다는 것은, 정치를 한다는 것은,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깊은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변할 수 있다는 신념을 잃지 말았으면 좋겠다.

또 하나. 공정 이후의 세계로 가자고 제안하는 것이 반드시 어떤 끝에 도달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와 내 옆 사람이 상호작용하고 작은 무언가라도 계속해서 변화를 만들어 내는 과정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작은 변화라도 함께 만들어가면 된다."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마디.

"이 책은 공정 이후의 세계로 초대하는 책이다. 우리가 정말 이렇게 살 수 없다면, 조금이라도 변화를 원한다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썼다. 경쟁과 성공에만 집중하며 '위를 보는 삶'이 아니라, '옆을 보는 삶'을 함께 그려보고 싶었다. 내 주위를 둘러보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만나고, 서로 지켜보고 연대하면서 더 나은 세상을 모색하는 삶. 이 책을 통해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

공정 이후의 세계

김정희원 (지은이), 창비(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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