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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명이 먹을 식사는 혼자서 뚝딱 해내는 요리의 신, 백은주씨
 100명이 먹을 식사는 혼자서 뚝딱 해내는 요리의 신, 백은주씨
ⓒ 나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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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 정도는 하룻밤 사이에 뚝딱 만들어 내는 분이 있다. 100명분의 식사는 혼자 집에서 사흘이면 해낸다. 곳곳 투쟁 현장에 밥심을 불어넣어 주는 사람이다. 전국 곳곳 투쟁 현장에 연대의 손길을 보내는 백은주씨다. 그를 충북 청주시와 세종시 사이에 있는 오송역 근처에서 만났다.

많은 분이 그를 2014년 삼성전자서비스노조 노동자들이 노숙농성할 때 페이스북을 통해 '만 원의 만찬'을 제안하여 1천 명분의 밥으로 연대한 일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을들의 투쟁 현장에 밥심을 불어넣어 주는 그의 얘기를 지난 4월 말에 들어 보았다.   

여자라 살림할 줄 알아야 한대요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간 캠핑. 모자 쓴 모습이 야무져 보인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간 캠핑. 모자 쓴 모습이 야무져 보인다.
ⓒ 백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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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줄곧 청주에서 나고 자랐다. 부모님은 두 분 다 교사여서 순환근무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전근을 다녔다.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까지 남동생과 오빠, 세 남매가 할머니와 살았다. 할머니 혼자 살림을 했기에 여자아이인 백은주씨가 도울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채소 다듬고 된장, 고추장 만들 때 고추장 젓고 된장 가르고, 감 깎아서 옥상에 말리고... 이런 일들을 했죠. 아버지는 '네가 뭘 하든 살림이랑 음식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늘 자잘한 심부름을 시켰어요. 파를 다듬는다든지, 마늘을 찧는다든지 이런 걸 시켰죠. 할머니가 음식을 잘하셨어요. 파 뿌리 하나도 안 버렸거든요. 잘 씻어서 된장찌개에 넣으면 정말 맛있었어요. 별거 들어가지 않았는데도요."

1970~1980년대였으니 가부장제의 권위가 드높던 시절이었겠다. 부러 살림을 시킨 아버지뿐만 아니라 할머니에게도 아들 선호 사상이 단단히 뿌리내려 있었다. 손녀인 백은주씨가 살림을 거드는 건 당연한 거였다. 심지어 학교 끝나고 오는 오빠 마중을 가기도 했다.  

"오빠가 중학생일 때, 집에 올 때면 저한테 마중을 나가라는 거예요. 할머니는 손자들을 주로 살폈죠. 저는 일종의 '어린 노예'였어요. 그다지 할 일은 없었지만 어쨌든. 오빠 도시락, 제 도시락, 동생 도시락 씻어야 되고, 아침에 할머니 요강도 씻어야 되고, 아침에 콩나물시루에 물도 줘야 되고..."

어린 마음에 할머니를 미워했지만, 그 시절 기억이 지금의 밥 연대로 이어져 오지 않았을까. 백은주씨는 할머니를 미워했지만 왜소한 몸으로 세 남매를 키워 준 기억을 떠올리면서 오래 살았으면 효도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할머니는 그가 스물두 살 무렵에 돌아가셨다.
  
아버지와 다른 삶 살고 싶었다

백은주씨는 중학교 3학년쯤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부모님이 여러 곳을 전근 다니다가 마침내 청주에 정착하면서 온 식구가 함께 살게 되었다. 밥 연대 활동의 씨앗이 되는 계기를 찾아보고자 그의 청소년 시절에 대해 물었다. 그는 스스로를 '모범생'이었다고 하면서도 선생님들의 위선적인 모습이 싫었다고 표현했다. 부모가 교사였음을 학교 선생님들도 알았으니 그를 더 챙겼을 테다.
   
"선생님들이 나를 예뻐하면 저는 그게 좀 부당하다고 생각했어요. 또 잘사는 집 애들이 못된 짓을 해도 별로 혼내지 않아요. 저한테 효행상, 모범상 이런 거 꼭 주거든요. 싫었어요. 진짜 어려운 환경에서 부모님 살피면서 다닌 친구들 많거든요. 그런 애들한테는 관심도 없어요. 성적 좋거나 반에서 뭐 맡은 애들한테는 그런 거 막 주고. 좀 위선적이라고 생각해서 싫었어요."

선생님들의 행동을 호의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다른 친구들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그는 효행상을 몰래 버리기도 했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돌아보는 연민 의식이기도 할 텐데, 부모가 교사여서 그런 가르침을 받았을까? 전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저희 아빠는 약간 태극기 부대 스타일이거든요. 장애가 있거나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한테 좀 모질어요. 아빠를 안 닮고 싶어 했어요. 아빠처럼 살지 말아야지 하면서.

엄마는 달랐어요. 저한테 심부름 한번 시킨 적이 없어요. 콩나물 하나 사 오라고 할 수 있잖아요. 안 시켰어요. 근데 그걸 사다 주잖아요. 어릴 때 그 아기가 뭘 알겠어요. '사 오면 고맙다, 수고했다' 꼭 그러셨어요. 또 제가 진짜 화나서 사람들 욕할 때 있잖아요. 그러면 '그럴 수도 있지, 이런 사람이 있고 저런 사람이 있는 거지' 이러세요."
 
대학 시절 엠티 때 모습. 사진을 뒤져보며 늘 단발이었음이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대학 시절 엠티 때 모습. 사진을 뒤져보며 늘 단발이었음이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 백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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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주씨는 1992년 청주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의 임상병리학과를 다녔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난 자유와 그동안 몰랐던 세상을 보면서 일탈을 시작했다.

한국사회연구회라는 동아리와 노래패 활동을 비롯해 야학 교사까지 했다. 5월에 학생회관에서 본 5.18 광주민주화운동 영상 자료는 큰 충격이었다. 동아리방에서 본 <말>지를 비롯한 시사잡지는 방송에서 얘기해 주지 않은 세상의 또 다른 모습을 알게 해 주었다.

학사경고도 받았다. 대학 등록금 투쟁 당시 선배들 따라 총장실 점거에 나섰다가 아버지에게 알려져 바로 집으로 끌려왔다. 학생운동에 발을 디딘 것일까?

"아버지에게 다신 안 하겠다고 거짓말하고 휴학했죠. 그때 학사경고를 두 번 맞아서 한 번 더 맞으면 제적이었어요. 쉴 수밖에 없었죠. 근데 제가 학생운동을 했다거나 운동권이었던 건 아니었어요. 집을 떠나 아버지 통제에서 벗어나니까 좋더라고요. 매일 술 먹었죠. 선배들이 참 좋았어요. 열심히 살고, 많은 걸 알려 주려고 하고. 근데 그게 몸으로 와 닿지는 않더라고요."

졸업할 때쯤 임상병리사로 취직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IMF가 터지고 말았다. 정규직 임상병리사로 일할 곳이 없었다. 취직을 기다리며 학원 수학 강사를 하다 얼마 안 돼 수학 과외를 시작했다. 돈을 많이 벌었다. 따박따박 많은 돈이 들어오니 정규직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10여 년을 보냈다.

대학 후배의 노동자 연대활동, 내 삶이 부끄러워졌다

2012년 백은주씨는 초록마을이라는 유기농산물 매장을 인수했다. 수학 강사로 벌어 모은 돈을 털어 단골처럼 늘 다니던 동네 매장을 인수했다.

"제가 그 집 고객이었거든요. 장사가 잘 돼 보이는 거예요. 당시 애들하고만 지내는 게 힘들기도 했어요. 어른들과 어울려 이야기도 하고 싶고. 사실 자영업자가 되어도 어른들과 얘기할 기회는 많지 않아요. 고객들 비위 맞추는 거지. 어떤 공동체에 속해서 공동의 일을 얘기하고, 운동이 아니라도 그랬으면 어른들하고 얘기할 기회가 있는데. 어쨌든 십여 년 하니 좀 지겨웠나 봐요."

장사 경험이라곤 전혀 없었고, 정보도 없었다. 초록마을을 운영한 지 여섯 달쯤 지나 동네에 자연드림 매장이 들어섰다. 수학 강의로 벌어들인 돈으로 적자를 메워 나갔다. 6년쯤 버티다 매장을 접었다. 오래 버틴 셈이다. 지금은 수학을 가르치면서 자연드림 계약직 점장으로 일하고 있다.

어른들과 뭔가를 모색하고 싶은 내면에는 어쩌면 세상과 접속하고 싶은 마음이 있던 게 아닐까.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책이나 시사잡지를 읽으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서른 초반에 프랑스 오베르 성당 앞에서. 여행 다니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차 타던 시절이었다.
 서른 초반에 프랑스 오베르 성당 앞에서. 여행 다니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차 타던 시절이었다.
ⓒ 백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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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에 대한 생각이 있었죠. 뭐든지 빨리 쓰고 없애지 않는다, 망가지지 않으면 바꾸지 않는다. 이런 생각으로 스마트폰을 늦게 구입했죠. 페이스북을 시작했는데 대학 후배가 노동자 연대활동을 전업으로 하는 거예요.

후배의 페이스북을 타고 타고 해서 그런 현장을 알게 됐죠. 부끄럽더라고요. 저는 그동안 잘 먹고 잘 살았거든요. 여행 다니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차 타고. 창피하고 사회에 대한 부채감마저 들었죠.

내가 이렇게 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이런 거를 다 감당하며 세상을 바꾸고 살았구나. 부끄러움이 몰려오면서 부채 의식이 생기고 그걸 어떤 식으로든 좀 갚아야 되겠다 싶었죠. 처음에는 돈을 보냈어요."


SNS를 통해 또 다른 세상과 접속하면서 그의 삶이 바뀌기 시작했다. 해고, 농성 등 투쟁 현장 소식이 들려올 때면 후원을 했다.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과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강서의 죽음은 그를 한 번 더 바꾸었다.

막연한 부채 의식을 넘어 '안 되겠다. 뭘 하든지 좀 싸워 보고 싶다. 최강서 같은 사람이 또 생기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나섰다.
  
주인공은 밥
 
  
백은주씨의 SNS를 들여다보면 음식 사진이 참 많다. 먹방 사진이 아니다. 농성장에 가져갈 음식 사진이다. 이렇게 사진을 올리는 까닭이 있다. 처음에는 개인 돈으로 음식을 해 갔다. 혼자 살기에 수입의 대부분을 음식 준비에 썼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조금씩 돈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보여 줄 수밖에.

"후원 때문에 밥 사진을 올리는 거예요. 제가 그 사진에 나올 이유는 없잖아요. 돈을 보낸 사람들이 주인이고, 그 음식이 주인이고."

농성장에 밥을 해 가려면 준비할 게 많다. 다듬고, 조리하고, 옮기는 일이 만만치 않을 텐데 어떤 과정일지 궁금했다.

"50~100인분 정도는 혼자 집에서 해요. 한 사흘 걸리죠. 장 보는 거 하루, 밑반찬들 하루. 밥이나 국처럼 따뜻하게 먹어야 할 것은 밤을 새우죠. 거실에 그릇 쭉 깔아 놓고 라벨 붙이고. 가기 직전에 데울 거 데우고 밥해요. 이후 팩에 넣어서 아이스박스에 담고. 차에 싣는 일만 한 30분 넘어요.

가장 힘든 게 재료 다듬는 일이에요. 누가 옆에서 다듬어 주고 설거지해 주면 금방 하거든요. 혼자 하려니까 난장판이죠. 김치 절여 놓고 그 사이에 육수 끓이고, 육수 끓는 사이에 파 다듬고 양파 까요. 난리가 아니죠. 전쟁터예요, 전쟁터."

      
듣고만 있어도 정신없겠다 싶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돌아올 때는 설거짓거리를 들고 와야 한다. 집은 여전히 난장판이다. 설거지하다 다시 일하러 가고, 퇴근하고 오면 여전히 설거짓거리는 쌓여 있고.

요즘에는 세종시 택시노조 망루 농성(택시발전법 제11조 2 즉각 시행 요구)에만 가니까 벅차지 않다. 5~6인분으로 이틀 치를 준비해 간다. 그는 어떤 메뉴를 주로 해 갈까? 처음에는 한식이라 할 수 있는 메뉴들을 준비했지만, 요즘은 다양한 메뉴를 준비해 간다.

"감바스나 마라탕을 처음 먹는 분들이 되게 많더라고요. 저는 그것도 일종의 문화생활이라고 생각해요. 그분들이 문화처럼 다양한 음식을 맛보게 해야겠달까. 시간이 쌓이면서 기술의 여유도 생기고, 장 보는 여유도 생기고, 그러면서 여기까지 확대가 되는 거 같아요."

처음 밥을 해 간 곳이 홍종인 전 유성기업 노조 아산 지회장의 고공농성 현장이었다. 이곳을 시작으로 밀양 등 곳곳 투쟁 현장을 누비며 연대하고 밥을 해 날랐다. 집 냉장고에는 장아찌, 쯔유 같은 소스, 양념, 육수 등으로 꽉 차 있다. 손이 빨라 후딱 음식을 해내기도 했겠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오랜 세월 밥 연대활동으로 그에게도 어떤 변화가 있었으리라 본다.

"사회에 소속감이 좀 생겼어요. 과외도, 자영업도 내가 이 사회의 일원으로 뭔가를 하고 있단 생각이 들진 않거든요. 내가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느낌 정도지. 이만큼 일했으니까 이만큼 누리지 하는 정도지, 소속감이나 공동체 의식은 없어요.

그런데 이 일을 하면 제가 아무리 타인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다고 해도, 타인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되요. 그분들도 저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타인의 삶에 자꾸 관심이 생기는 거죠. 부채 의식은 옅어졌어요. 마음이 무거웠는데 좀 줄어들었죠."


60이 되면 환갑 연주회를
 
백은주 씨가 환갑 연주회 때 바이올린 연주를 하며 입으려고 미리 마련해 둔 드레스. 벌써 기대된다.
 백은주 씨가 환갑 연주회 때 바이올린 연주를 하며 입으려고 미리 마련해 둔 드레스. 벌써 기대된다.
ⓒ 백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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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음계 '솔'에 가깝듯 백은주씨는 밝은 분이다. 스스로 말하듯 쉽게 상처를 받지 않는다.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다.

그렇다고 매우 낙관적이진 않다. 의외로 낯을 가리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사람 관계에서 단호한 편이라는 고백을 하였다. 그는 '요즘 어떤 고민을 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을 건넸다.

"제가 사람들하고 관계를 잘 못 맺어요. 사람을 싹둑싹둑 자르 거든요. 용납 못 할 어떤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만 자르는 게 아니에요. 이 사람이랑 친한 사람들도 다 잘라요. 그 사람들이 싫어서가 아니에요. 안 그러면 서로 불편해질 거잖아요. 불편하지 말라고 싹 다 잘라 줘요. 생각해 보니 못할 짓이었던 것 같아요. 그게 약간 결벽증 같아요. 사람 관계에 대해서. 좀 고쳐 봐야 되겠다 싶죠."

백은주씨는 바쁜 중간에도 틈틈이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다. 부끄러움과 부채 의식에서 시작된 그의 밥 연대가 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스스로 '독거노인'이라고 하면서 중년 이후의 삶을 고민하고 있다.

또한 세상과 접속되면서 많은 사람과 부대끼고 어울렸기에 동시에 자신을 들여다볼 기회도 생겼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자신의 모습을 조금 바꿔 보고자 하는 의지도 보여 주었다.

"택시 농성이 빨리 이겨서 내려왔으면 해요. 내 생활을 좀 하고 싶어요. 더 늙기 전에 취미도 좀 익혀 놔야 일종의 리추얼(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규칙적인 습관)이 되는 거잖아요. 늙어서 할 일 없고 공동체와 끈이 좀 느슨해질 때, 내가 나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그런 일을 준비하려고요."

그의 삶에 활력을 주는 바이올린 연주 실력이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환갑 연주회를 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는 연주회 때 입을 드레스까지 벌써 마련해 두었다. 

"60이 되면 환갑 연주회를 하고 싶고, 돈을 좀 모았으면 좋겠어요. 돈으로 뭘 해 보겠다는 게 아니라 노후에 품위를 잃는 상황을 좀 막고 싶어요. 그럴 정도의 재산을 갖고 싶은 거죠. 그리고 어떤 조직적인 활동을 좀 해 보고 싶어요. 우리 같은 독거노인(아직 젊은데)들이 함께할 공동체를 말이에요. 이런 생각을 한 지는 좀 됐어요."
  
각자도생의 시대가 되어 버린 현실에서 개인이 살아갈 길은 여전히 연대가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그가 꿈꾸는 공동체는 또 다른 연대라 할 수 있겠다. 환갑 연주회 때 그가 들려줄 바이올린 연주를 보고 싶어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작은책(www.sbook.co.kr)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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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잡스러운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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