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19 05:16최종 업데이트 22.07.19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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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는 1980년대와 1990년대 한국프로야구의 절대강자였다. 1982년 창설한 프로야구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의 파고에 휩쓸리며 한 차례 구조조정을 겪기 시작한 1998년 이전까지, 모두 16번의 시즌 중 9번의 우승을 독점한 것이 해태 타이거즈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강력함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은 쉽지 않다. 타이거즈의 모기업 해태는 프로야구 창설에 참여한 6개 기업 중 가장 자금력이 부족한 축에 속했으며, 연고지인 호남 역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가장 우수한 자원들을 배출해왔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팬들에게는 '오리궁둥이'로 더 유명했지만 언론에서 김성한을 주로 표현하던 별명은 '팔방미인'이었다. 프로원년 투수와 야수를 겸하며 10승과 10홈런, 그리고 타점왕 타이틀을 섭렵한 김성한은 역설적으로 해태 타이거즈의 얇은 선수층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 김성한

 
오히려 가장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모기업을 가졌을 뿐 아니라 1970년대 내내 고교야구 무대 최강팀으로 군림한 경북고와 대구상고를 통해 우수한 선수들을 가장 많이 배출해온 대구를 연고지로 삼은 삼성 라이온즈가 유독 우승 문턱에서 그 해태 타이거즈 외에도 OB 베어스와 롯데 자이언츠에 밀려 만년 조연 역할에 머물렀던 것과 특히 대조를 이루는 대목이다.

또한 해태 타이거즈가 9번의 우승을 독식한 그 16년 사이에 LG 트윈스와 롯데 자이언츠, OB 베어스가 2번, 삼성 라이온즈가 한 번씩 우승했을 뿐 한화(빙그레), 현대(삼미, 청보, 태평양), 쌍방울은 한 번도 우승을 경험하지 못했다. 도대체 해태 타이거즈는 왜 강했을까?


해태 타이거즈가 강했던 이유에 대한 답은 쉽지 않지만, 약할 만도 했던 그 팀이 약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최소한 19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 이전까지 한국 프로야구 리그에서 모기업의 자금력과 야구팀의 전력이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없었던 제도적 장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KBO의 전력평준화 장치

스포츠에 있어서 팀 전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선수 구성에 있으며, 프로 스포츠의 특징은 자금력에 따라 선수 구성의 기회가 달라진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뉴욕 양키스나 유럽 프로축구의 레알 마드리드 같은 명문구단들이 수십 년간 꾸준히 정상권에 머물며 리그를 지배하는 힘은 선수 한 명의 영입을 위해 수백억에서 수천억 원에 이르는 이적료와 연봉을 지출할 수 있는 압도적인 자금력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 한국 프로야구의 상황은 달랐다. 구단이 선수를 영입하는 길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하는 선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드래프트가 거의 유일했다.

드래프트는 각 구단의 연고지역 내 고등학교 출신 선수들에 대한 독점적 선발권을 보장하는 1차 지명과 모든 지역 선수들을 지난 시즌 성적의 역순으로 차례대로 지명하게 하는 2차 지명으로 나뉘는데, 두 경우 모두 지명권의 배분은 자금력과 무관하며 지명된 선수와의 협상 역시 독점적인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계약금을 제시함으로써 다른 구단 지명 선수를 영입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구단과 선수 사이의 자유로운 계약의 권리 대신 선수들에 대한 권리를 구단들이 고르게 나누는 합의가 더욱 강력한 구속력을 가지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해태에 비해 월등한 자금력을 보유했던 삼성이 더 뛰어난 선수를 선발할 수 없었고 막대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해태를 압도하는 성적을 얻을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다.

드래프트 외에 기존 선수들을 트레이드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것 역시 구단 간의 합의가 이루어져야 했을 뿐 아니라 현금 확보를 목적으로 전력 평준화를 저해하는 트레이드를 금지하던 리그 사무국으로부터도 승인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돈으로 전력을 사는 방법이 되긴 어려웠다.

또한 선수들이 소속 구단과 계약에 합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그 선수에 대한 보유권은 원소속구단에 보장해주었기 때문에 다른 구단이 그 선수를 영입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말하자면 각 구단은 소속 선수와 지명 선수에 대한 배타적인 독점권을 보장받았으며, 그것은 자금력을 통해 변화시킬 수 없는 평준화된 질서를 만들어냈다.

물론 삼성이나 두산 같이 야구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은 대기업들은 훈련시설과 훈련 여건을 개선하고 해외 명문 구단과의 합동훈련이나 지도자 연수 프로그램 운영 등을 통해 전력 강화를 도모했지만, 선수 영입이라는 핵심적인 통로가 봉쇄된 상황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에 전력 평준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는 몇 가지 계기를 통해 무력화되었다.
 

'마땅히 최강이었어야 할' 삼성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당대 고교야구 최고의 감독이었던 대구 야구의 대부 서영무 감독(가운데) 외에도 일본 프로야구의 작전 전문가 이충남(오른쪽)을 영입해 보완했고, 치열한 돈싸움 끝에 재일동포 투수 김일융을 데려오면서 허탈감에 빠진 OB 베어스가 김일융에게 주려던 계약금을 전용해 지은 신축 연습구장에 '니우라(김일융의 일본 이름) 구장'이라는 별명을 짓게 하기도 했다. 또 1985년에는 LA 다저스 훈련캠프에 입소해 선진야구 기술을 대대적으로 전수받기도 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선수 영입에 가진 돈을 다 쓸 수 없었던 족쇄는 삼성을 답답하게 한 가장 큰 문제였다. ⓒ 삼성 라이온즈

  
전력 평준화 장치의 해체

첫째, 선수와 돈을 바꾸는 유상 트레이드가 양산되었고 리그 존속과 규모의 유지를 위해 사무국이 그것을 묵인했다. 1998년 외환위기 와중에 해태와 쌍방울이 부도 상태에 빠지면서 타이거즈와 레이더스에 대한 운영비 지급도 중단되었다. 하지만 리그 운영을 위해서라도 두 구단이 즉시 배제될 수는 없었기에 인수 기업이 나설 때까지는 어떻게든 유지시켜야 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운영비 마련을 위한 선수 판매행위를 리그 사무국이 묵인한 것은 그런 상황의 산물이었다.

예컨대 쌍방울 레이더스는 주전 포수 박경완을 9억, 마무리 투수 조규제를 6억, 신인투수 마일영을 5억을 받고 현대 유니콘스에 보냈으며 4번 타자 김기태와 에이스 투수 김현욱을 묶어 20억을 받고 삼성 라이온즈에 보내 운영비를 충당했다.

해태 타이거즈 역시 에이스 투수 임창용과 조계현을 14억에 삼성 라이온즈로 보냈는데, 모기업이 부도에 몰리기 전 선동열과 이종범을 각각 임대와 트레이드 형식으로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로 보내면서 6억 엔 안팎의 자금을 마련한 것을 포함하면 그 규모는 더욱 불어나게 된다.

그렇게 8개 구단 체제에서 2개 구단이 주력 선수들을 팔고 2개 구단이 그 선수들을 집중적으로 사들이면서 전력의 균형은 극적으로 깨졌다. 결국 주요 선수들을 매각한 해태와 쌍방울은 최하위권을 맴돌다가 해체되거나 매각되었고, 그 선수들을 흡수한 현대와 삼성은 2000년부터 2006년까지 7시즌 동안 각각 3번씩의 우승을 주고받았다.
 

삼성 라이온즈가 한국시리즈에서도 강자로 올라선 것은 해태 우승의 주역 김응용과 선동열, 한대화를 감독과 코치로 영입하고 이강철, 조계현, 임창용 등 해태 타이거즈의 주축 선수들을 FA와 트레이드를 통해 영입한 2000년대 초반 이후의 일이었다. ⓒ 연합뉴스

   
둘째는 1998년부터 시작된 외국인 선수 선발이었다. 한국프로야구는 창설 2년 차인 1983년부터 구단마다 일본 국적의 선수 영입을 두 명씩 허용하고 있었지만, 그 경우에도 한국 혈통의 재일교포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3년 시즌 30승을 기록한 장명부가 전 시즌 꼴찌 팀 삼미 슈퍼스타즈를 전후기리그 2위까지 끌어올리거나 1985년에 25승을 기록한 김일융이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를 한국시리즈 7차전까지 이끄는 위력을 발휘하며 리그의 판도를 좌우하기도 했다.

그런데 1998년부터 들어온 외국인 선수의 영향과 파급력은 훨씬 컸다. 막대한 계약금과 연봉을 줄 수 있는 팀들은 시속 150km 이상의 강속구 투수와 시즌 40홈런 이상의 장타자를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특히 도입 초창기인 1998년과 1999년에는 전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을 거쳐 지명권을 나누어 선발했지만 2000년부터는 각 구단이 자유롭게 선발하도록 함으로써 좋은 선수를 찾고 계약을 이끌어내기 위해 충분한 자금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구단과 그렇지 못한 구단 사이에는 점점 더 큰 전력 차가 생겨났다.

예컨대 시행 첫해인 1998년 현대와 삼성, 두산은 각기 두 명씩 수준급 외국인 선수를 영입해 전력을 끌어올리며 우승을 다투었지만 해태는 몸값이 저렴한 선수 한 명만을 영입했다가 곧 방출했고 쌍방울은 외국인 선수를 한 명도 영입하지 못했다.

한국 프로야구리그 경제적 규모와 위상 확장

외국인 선수에 대한 각 구단의 투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한국 프로야구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의 수준도 높아졌고, 그에 따라 팀 성적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커졌다. 2020년을 기준으로 외국인 선수는 10개 구단 통틀어 30명(투수 20명, 타자 10명)으로 전체 선수의 5%에 불과하지만 성적 면에서는 평균자책점 10위권 투수 중 6명, 홈런 10위권 타자 중 5명을 차지했다. 외국인 선수가 팀 성적에 미치는 영향도 그만큼 커진 것은 당연하다.

셋째는 2000년부터 도입된 자유계약(FA)제도였다. 이전까지 '구단과의 계약에 합의하거나, 아니면 거부하고 은퇴를 할 자유'만이 주어졌던 선수들에게 처음으로 여러 구단과 협상을 통해 계약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준 것이다. 물론 145일 이상 1군에 등록된 시즌이 10년 이상인 선수들에 한해 자격이 주어지며, 그 선수를 영입한 구단은 원소속구단에 보상선수나 그 선수 직전 연도 연봉의 3배에 해당하는 보상금을 지급하게 함으로써 그 성사 가능성을 극히 줄여놓은 제한적인 방식이긴 했다.

하지만 제도 시행 2년 차인 2001년부터는 자격 요건이 9년으로 줄어들었고, 2009년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선수들에게 8년, 2011년부터는 대학을 졸업한 선수들에게 모두 8년을 적용하는 한편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한 선수에게도 자격 완화 특혜를 주기도 했다.

그 결과 시행 첫 해 해태의 이강철과 LG의 김동수가 각각 3년간 8억 원을 받기로 하고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한 것을 시작으로 그 숫자와 규모가 점점 늘어나 2010년대 이후로는 해마다 10명 안팎의 선수들이 이 제도를 활용해 더 좋은 조건에 유니폼을 바꾸어 입고 있다.

그에 따라 선수들에게 투자되는 자금의 규모도 꾸준히 커졌는데, 2005년에는 자금난을 겪기 시작한 현대 유니콘스의 심정수가 60억 원에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고 2017년에는 삼성 라이온즈에서 기아 타이거즈로 이적한 최형우가 총액 100억 원을 넘어섰으며 2019년에는 두산 베어스의 양의지가 NC 다이노스로 옮기며 125억 원을 받아 역대 최고액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정상급 선수 한 명을 영입하기 위해 백억 원 이상의 돈을 낼 수 있는 구단들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게 된 것은 물론이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선동열은 광주일고 출신이었기 때문에 해태 타이거즈 외에 입단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자유계약선수(FA)제도가 있었다면,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 기아 타이거즈


전력평준화조치의 후퇴는 강팀과 약팀의 위치를 고착화하고 의외성을 떨어트리는 문제점도 있었지만, 강팀 사이의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만들어냄으로써 지역대결 구도가 점차 퇴색하는 와중에도 야구의 인기를 유지하고 더욱 상승시킨 요인이 되었다.

강력한 전력 평준화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장기간 패권을 독점했던 해태 타이거즈의 몰락은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의외성을 높여 경쟁의 역동성을 확대했고, 팬들의 입장에서는 응원팀의 모기업에 투자를 종용하는 방식으로 팀 전력 강화에 개입함으로써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업의 입장에서도 성적이 비로소 투자에 비례하게 되므로 인해 추가적인 투자의 유인이 만들어진 셈이고, 한국 프로야구리그 전체의 경제적 규모와 위상이 확장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물론 과감한 투자를 거듭하고도 강해지지 못하는, 투자의 블랙홀 같은 구단의 팬들이 이젠 더 이상 가난한 모기업을 탓하지도 못하고 각자 전생에 지은 죄를 상상하며 더욱 속을 태우게 하는 미궁에 빠지게 된 것 역시 그때부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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