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18 13:55최종 업데이트 22.07.1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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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이 진보적 기운을 일으킬 때 외세가 개입해 무산시키는 일이 최근 150년 사이에 자주 되풀이됐다. 그런 외세 중에서 '단골' 역할을 한 것은 일본이다.

동학혁명군이 반외세·반봉건을 외친 1894년에는 일본이 국제적 반대를 무시하고 조선을 침입했다. 이 사건은 이때 조선에 대해 확보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판으로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를 연파하고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조선 침략을 일단락 짓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4·19 혁명으로 민중의 열기가 고조되던 시기에는, 일본이 박정희 정권에 힘을 실어주면서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을 관철시켰다. 이때는 한국 국민들을 진압하는 악역을 박 정권이 담당했다. 1965년 체제는 4·19로 고양된 한국인들의 에너지를 한미일 삼각체제로 억눌렀다는 점에서 반역사적 성격을 띠었다.

촛불혁명으로 한국인들의 기운이 고조되고 이것이 한·일 역사문제로 팽창하는 속에서, 대법원이 일본 전범기업들에 대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일본은 2019년부터 경제보복을 통해 이 기운을 꺾고자 했다. 이를 통해 한일관계를 예전 수준으로 복원하려 하고 있다.

한일관계 하나만 예전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한국의 정치·경제도 함께 환원돼야 가능하다. 한국의 정치·경제를 주도하는 세력이 미국·일본과 긴밀히 연계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일본이 시도하는 것은 한일관계뿐 아니라 한국의 정치·경제까지도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촛불혁명 이후의 사회진보에 대한 일본 측 견제가 이런 식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1882년 임오군란 때도 일본의 개입이 있을 뻔했다. 이 사건은 표면상으로는 군인 봉급의 부실 지급에 대한 불만으로 폭발했지만, 실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이후의 대일 시장개방으로 한국 상권이 피폐해진 데 대한 분노를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이 일이 벌어졌을 때도, 일본은 군대를 보내 개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가 선수를 치는 바람에 무위로 끝났다.

아베와의 연결고리
 

서울 종각역 인근에 세워진 전봉준 장군 동상 ⓒ 김종훈


그런데 1894년·1965년·2019년 세 사례의 공통점이 있다. 이번에 피격 당한 아베 신조 전 총리와 관련된다는 점이다.

2019년 경우에는 아베 신조 본인이 한국에 대한 보복을 진두지휘했다. 1965년 경우에는 외조부이자 스승인 기시 노부스케가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비슷한 개입이 1894년에도 있었다. 전봉준의 지휘 하에 동학군이 궐기했을 때도 아베 신조의 조상이 나섰다.

1894년에 일본은 외형상으로는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실제로는 동학군 토벌을 목적으로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동학군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던 조선 조정은 이 같은 뜻밖의 사태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 전개에 놀란 전봉준과 고종은 상호 공격을 자제했다. 동학군은 호남의 중심지인 전주성을 스스로 비워줬고, 고종은 청·일 양군의 철병을 요청했다. 3천 병력을 파견했다가 일본군 7천을 보고 놀란 청나라도 철군을 희망했다. 청나라는 일본에 '함께 나가자'고 제안했다.

조선 정부는 '오지 마라'며 철군을 요청하고 청나라는 '함께 나가자'며 공동 철수를 제의하는 상황에서도 일본군은 막무가내였다. 바로 이 일본군 안에 아베 신조의 조상이 있었다. 아베 신조 할머니의 할아버지인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가 바로 그다. 아베 입장에서는 고조부이고 오시마 입장에서는 현손인 관계다.

전쟁 초기에 오시마가 지휘한 병력과 관련하여 황현의 <매천야록>은 "수사제독 이토 스케유키(伊東祐亨)와 육군소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가 뒤이어 왔다"고 한 뒤 "수군과 육군이 합해서 5천여"라고 말한다. 오시마와 이토의 병력을 합하면 청나라군보다 훨씬 많았던 것이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오시마는 그보다 많은 병력도 지휘했다. 병력이 증원된 이후의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왜장 오시마 요시마사는 도성에서 비밀리에 1만여 병력을 이끌고 아산으로 향했다"고 서술한다.

병력 규모에서도 나타나듯이 오시마는 이 군대의 핵심이었다. 그에게 그런 권한을 부여한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다.

오시마 요시마사
  

일본 국립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터에 소장된 '육군소장 오시마 요시마사의 조선국 파견에 붙이는 훈령의 건'이란 공문서에 두 사람이 등장한다. ⓒ 일본


일본 국립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터 홈페이지(www.jacar.archives.go.jp)에 소장된 '육군소장 오시마 요시마사의 조선국 파견에 붙이는 훈령의 건(陸軍少将大島義昌朝鮮国派遣ニ付訓令ノ件)이란 공문서에 두 사람이 등장한다. 문서에서는 '오시마'의 '시마'에 해당하는 글자가 도(嶋)로 표기돼 있지만, 이 역시 섬 도(島)와 같은 의미다. 뜻이나 음이 같은 글자를 혼용하는 일은 자주 있었다.

1894년에 작성된 이 문서는 '오시마 요시마사 파견에 관한 훈령을 만드노니 일왕(천황)의 재가를 바란다'는 취지의 메이지 27년 6월 7일자 이토 히로부미 총리의 요청을 담고 있다.

일본군은 조선의 요청이나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상륙을 감행했다. 그래서 그것은 침략이었다. 상륙한 뒤에 조선이 거듭거듭 돌아가라고 간청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자국민과 공사관 보호를 명분으로 했지만, 실제는 동학군과 전봉준을 잡으려 했다. 이를 위해 한양 경복궁부터 점령한 뒤 청나라 군대에 싸움을 걸어 승전을 거뒀다(청일전쟁). 그런 다음, 동학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여 조선 민중의 에너지를 억눌렀다. 이를 계기로 청나라·러시아를 연달아 격파하면서 그 여세를 몰아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를 강요했다.

오시마 요시마사의 군대는 한양 경복궁에도 출현하고 충청도 아산에도 출현했다. 경기도 개성을 거쳐 펑안도에도 진입했다. 아베 신조의 고조부가 한반도를 종횡무진 누비며 일본군을 지휘했던 것이다.

오시마 요시마사는 기시 노부스케나 아베 신조만큼의 위상은 갖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 근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상당하다. 일본군 주력을 이끌고 조선 곳곳을 누비며 일본의 영향력을 부식시켰다.

이것이 공로로 인정되어 오시마는 1895년에 남작 지위를 받고 귀족 반열에 들어섰다. 뒤이어 러일전쟁에 참전하고 육군대장으로 승진한 뒤 1907년 자작으로 올라섰다.

오시마는 대한제국에서도 상을 받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 고종황제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고종 43년 8월 29일자 <고종실록>에 따르면, 오시마에 대한 훈장 수여를 명령하는 칙령에서 고종은 "지난날 본국에 온 적이 있는 일본 육군대장 남작 오시마 요시마사"라는 표현을 썼다. 1894년의 침략 행위가 '본국에 온 적이 있는'이란 말로 표현됐던 것이다.

아베 신조의 혈통은 이처럼 한국 근현대사와 인연이 깊다. 그 역할은 한·일 양국을 상생시키기보다는 일본에만 긍정적 작용을 끼쳤다. 아베 신조는 그런 악연을 풀기보다는 오히려 뒤엉켜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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