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백귀주행: 여성괴물행진
 백귀주행: 여성괴물행진
ⓒ 최고은

관련사진보기


한 권의 책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를 어떻게 몇 단어로 줄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이 책을 설명해야 한다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여성'과 '괴물'이다. 여기에 한 단어를 더 추가한다면 '연대'가 되겠다. <백귀주행: 여성괴물행진>은 여성도 나오고, 괴물도 나오고, 이들이 연대하기(를 꿈꾸기)도 하는 책이다. 자기 몸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여자들은 왜 괴물로 기록되는지를 질문하고, 전설 속 여성괴물과 현실의 여성 활동가들의 연대를 상상하는 그림책이자 인터뷰집이다.
  
'여성'이라는 우리에서 시작하기

이 책은 '백귀야행회권(百鬼夜行絵巻)'이라는 일본의 두루마리 그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캄캄한 밤 요괴들이 행진하는 모습이 마치 인간의 시위 행렬 같다는 생각이 이 책의 발단이었다. 괴물과 인간의 시위를 가장 잘 보여주는 형태의 책, 우리는 시위 그림을 길게 펼쳐 볼 수 있도록 책을 병풍 형태로 만들기로 했다.

몇 년 전 <슬픈 요괴 도감>을 만들면서 알게 된, 슬프고 기구한 사연을 가진 괴물들 중에는 유독 여성의 외양을 한 괴물들이 많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임신한 채 죽거나, 출산하는 과정에서 죽은 여성들. 사산아를 낳아 슬픔에 잠긴 여성들은 '괴물'이 되어 세계를 떠도는 형벌을 지금까지도 받고 있었다.
 
회의 때마다 우리가 좌절하지 않게 든든한 사랑을 준 아기 강아지 두목.
 회의 때마다 우리가 좌절하지 않게 든든한 사랑을 준 아기 강아지 두목.
ⓒ 최고은

관련사진보기


'사산아를 낳거나' '죽었기 때문에' 원한을 품게 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 슬픔을 나는 쉽게 헤아릴 수 없다. 하지만 비슷한 내용의 전설이 시대와 민족을 막론하고 전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기를 잃은 슬픔에 괴물이 되어버린 '남성형 괴물'은 왜 존재하지 않을까. 임신, 출산과 관련된 여성괴물 이야기는, 사회가 여성에게 보내는 일종의 협박은 아닐까. 재생산이라는 임무를 완벽히 해내지 못하는 여성은 사회에서 괴물로 추방된다는.

그렇게 우리는 '재생산'과 '여성' 그리고 '괴물'을 다뤄보기로 했다. 여성괴물을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 다시 쓰고, 재생산권을 비롯한 다양한 여성 의제를 위해 투쟁하는 여성 활동가의 목소리를 담아보기로 했다. 그 두 가지를 교차시키며, 여성괴물과 여성 활동가의 연대를 감히 상상해 보는 책을 만들기로 했다.

'재생산권'이라는 더 넓고 깊은 주제로의 수렴

주제를 재생산권으로 좁히자 고민이 생겼다. 2021년부로 한국은 형법상 낙태죄가 처벌 효력을 상실한 국가가 되었다. 비록 대체 입법이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낙태죄가 사라진 한국에서 이 책이 어떠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그 너머를 우리가 짚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책을 만들기 위해 재생산권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하며, 나는 이 주제에 대해 내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2018년 국민투표로 임신중지를 제한해 온 '수정헌법 8조'를 폐지한 아일랜드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임신중지를 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난다. 라틴아메리카의 몇몇 가톨릭 국가들은 성폭행으로 임신한 사람의 임신중지를 처벌한다.

일본은 우생학에 근거해 국가 차원에서 장애인, 유전 질환 환자 등에게 불임 수술을 강제한 역사가 있으며, 임신중지를 하기 위해 배우자 혹은 파트너의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청소년과 이주민, 성소수자, 장애인의 임신중지 권리는 너무나 쉽게 등한시되고 만다. 이 책을 만드는 것은 시스젠더-비장애인-성인-한국의 선주민 여성으로 내가 지닌 특권과 오만을 깨닫고, 내 시선 바깥에 위치해 온 역사와 현재를 더듬어 가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다루고 싶은 모든 여성괴물을 '재생산권' 키워드로만 해석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정상성'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신체를 가졌다는 것, 여성의 신체를 식민화하는 발상에서 비롯된 특징을 지녔다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을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괴물이 품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페미니즘적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인터뷰이로 섭외한 세계 각국의 활동가들에게도 재생산권을 포함한 다양한 여성 의제에 대해 물어봤다. '한국의 상황은 이러한데, 거기는 어때?' 우리의 질문에 인터뷰이들은 마음을 담아 정성껏 답을 보내왔고, 책은 그렇게 완성됐다.
  
책을 만들며 배운 것들
 
미국 연방대법원의 낙태권 보장 판례 폐기 결정 다음 날인 6월 25일(현지시간)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의 주의회 의사당 앞에서 낙태권 옹호론자들이 '대법원(scotus)은 수치다'라고 적힌 피켓 등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전날 임신 6개월 이전까지 여성의 낙태를 헌법상 권리로 인정한 1973년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공식 폐기했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낙태권 보장 판례 폐기 결정 다음 날인 6월 25일(현지시간)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의 주의회 의사당 앞에서 낙태권 옹호론자들이 "대법원(scotus)은 수치다"라고 적힌 피켓 등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전날 임신 6개월 이전까지 여성의 낙태를 헌법상 권리로 인정한 1973년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공식 폐기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책을 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미국 대법원은 1973년 이후 임신중지 권리를 인정해 주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49년 만에 뒤집었다. 미국의 수많은 주에서는 임신중지를 금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그보다 앞서 폴란드에서는 재생산권 활동가 유스티나 위드진스카가 "임신중지를 도운 혐의"와 "임신중지 의약품을 허가 없이 소지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을 위기에 처했다. 또한 폴란드 정부에서 개인의 임신중지 경위를 추적할 수 있는 '임신 등록제'를 추진하려고 해 논란이 됐다.

수십 년의 투쟁 끝에 쌓아 올린 승리가 다시 퇴보하는 것만 같은 이런 순간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쉽게 비참해진다. 누군가 손쉽게 내린 결정으로 삶이 위태로워지는 존재들을 떠올리면 더욱더 그렇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책에서 인터뷰이들이 전해 준 말들을 떠올린다.

페미당당의 활동가 지안은 "거창한 대의를 위해 한다기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이 울고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 운동을 한다고 했다. 아일랜드의 재생산권 활동가 헬렌 스톤하우스는 "급진적인 자기 돌봄"을 실천하며, "휴식하고, 서로를 안아주고, 먹고, 자고, 재충전"하며 지속적으로 투쟁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에콰도르의 활동가 레베카 산체스 몬테네그로는 "국가가 우리의 존재를 끊임없이 박탈하는 현실"에서도 "자매애와 동료애로, 폭력에 직면"하며 계속해서 저항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나는 이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소진되었어도 다시 일어서서 싸우면 된다는 "지속가능한 투쟁"이 우리에게 가능하다는 것을 익혔다. 나를 좌절시키는 뉴스를 시도 때도 없이 마주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도, 나보다 더 위태로운 존재들의 삶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사랑'과 '용기'의 힘을 배웠다.

그리고 각기 다른 상황과 역사에 놓인 여성들이 나와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페미니즘 운동은 이름 모를 어느 여성의 일을 나의 일처럼 여기며 함께 싸우는 것이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어진 현재 미국의 상황에 우리가 함께 좌절하고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2022년에 어떻게 이런 일이." 미국에서의 퇴보를 두고 자주 등장하는 반응이다. 아일랜드에서 '수정헌법 8조'가 폐지된 것은 불과 2018년의 일이다. 임신중지에 대한 전면 금지를 고수해온 에콰도르에서 성폭행 피해자의 임신 중지를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된 것은 올해 2월이다.

한국은 낙태죄 처벌 조항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대체입법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 임신중지와 관련하여 발의된 개정안이 모두 계류 중으로, 실질적이고 체계적인 권리 보장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낙태죄'는 사라졌어도 임신중지는 암암리에 이뤄진다. 어떤 곳에서는 진일보가, 어떤 곳에서는 퇴보가 진행 중이지만, 어디서든 여자들이 끝없이 투쟁하고 있다는 점은 같다.

파도는 거세지고 잠잠해지기를 반복하고 가끔 물살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파도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계속해서 싸운다는 것, 그 사실을 믿고 나아갈 힘을 이 책의 인터뷰이들로부터 얻는다.

태그:#백귀주행, #초우상회, #여성괴물행진, #낙태죄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초우상회의 공동 창립자이자 아마추어 요괴 연구가. 작물 기르기를 좋아하는 농부 연습생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