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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드레스의 날(Red Dress Day)'은 실종되고 살해당한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들을 추모하는 국가 기념일이다.
 "붉은 드레스의 날(Red Dress Day)"은 실종되고 살해당한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들을 추모하는 국가 기념일이다.
ⓒ 밴쿠버아일랜드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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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몇 주 전, 전공 수업을 듣기 위해 캠퍼스를 가로지르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누군가 입은 흔적이 보이는 새빨간 드레스가 나무에 덩그러니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본 드레스 외에도 붉은 색 옷들이 캠퍼스 곳곳에 걸려 있었다. 공포 영화에나 나올 법한 연출에 놀란 나머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캐나다인 친구에게 혹시 학교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냐고 물었다.

친구는 붉은 드레스를 가리키는 내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서 캠페인 때문에 걸어둔 건가 봐." 친구가 말한 캠페인은 'Red Dress Day' 즉, '붉은 드레스의 날'을 앞두고 학교에서 진행한 행사였다.

'붉은 드레스의 날'은 2010년 캐나다 원주민 예술가 제이미 블랙(Jaime Black)이 실종되고 살해당한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들을 조명하고자 기획한 예술 프로젝트 'The REDress Project'에서 파생한 국가 기념일이다.

붉은 드레스의 날인 5월 5일에는 내가 있던 밴쿠버아일랜드대학교(VIU) 외에 다른 대학은 물론 캐나다 전역에서 추모 행사가 열렸다. 이 캠페인을 본 뒤 처음 본 나의 감정은 놀라움과 충격이었다. 학생 소모임이나 동아리가 아닌 학교 측이 직접 이런 추모행사를 주최하다니, '놀랄 노' 자였다.

뒤이어 씁쓸함이 찾아왔다. 학교에서 추모 행사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나는 마치 학교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처럼 놀라워했기 때문이다. 대학을 비롯한 모든 교육기관은 사회적 약자 보호에 앞장서는 사람을 기르기 위해, 민주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걸 나조차 잊고 있었다.

한국 대학에서 여성 인권을 말하기는

나는 캐나다에 있는 동안 수업 안팎으로 여성인권과 페미니즘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엔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대화에 남학생이 끼어 있는 게 두려웠지만, 한국에서 직간접적으로 겪은 것과는 다른 반응 덕에 안심할 수 있었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학교에서 주최한 세미나에도 여학생들만큼이나 남학생들이 많이 참여했다. 캐나다에서 페미니즘을 주제로 이야기한 경험들은 성인이 된 후 또래 남성들과 '싸우지' 않고 원만하게 이어간 첫 '대화'였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캐나다 학교에서 했던 만큼의 건강한 대화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막연한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 대학 내의 페미니즘 의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대학이라는 공간은 대화를 하기는커녕 여성들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지난 4일 연세대 화장실 안에서 불법촬영 성범죄가 발생한 것만 봐도 그렇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별은 여느 불법촬영 성범죄 기사에 적힌 것과 다르지 않았다.

여학생의 공간을 침범하려는 남성들의 범죄 행위는 어제오늘 일어난 일이 아니다. △2021년 발생한 서울대 여학생 기숙사 침입 사건 △2019년 숙명여대와 서울교대 여학생 기숙사에 나란히 발생한 '여장남자' 침입 사건 △2018년 동덕여대 알몸 남성 음란행위 사건 △2017년 서울여대 강의실 남성 침입 사건 등 매해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대학 내 범죄가 끊이지 않았다.

공학대학 내 총여학생회가 잇따라 폐지 수순을 밟은 것 역시 여성들의 공간을 위협하는 '백래시'의 일종이다. 총여학생회 대신 성평등위원회 등의 대안기구를 출범시키는 것을 긍정적 반향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그러나 그 시작점은 '여학생들만을 위한 교내 자치 기구'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부 남학생들의 반발이었다.

중앙대의 경우 총여학생회의 이름을 지우고 성평등위원회라는 새 기구를 세웠지만 그마저 몇 해 운영되지 못하고 폐지되었다. 수십 년 동안 여학생의 인권 보호를 위한 '공간'이 존폐의 위협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다.

모든 청년 남성, 혹은 공학대학에 재학하는 남학생이 여성혐오에 앞장서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 남성들의 우경화한 정치 성향과 페미니즘에 대한 다양한 설문조사 결과는 2022년 대한민국의 여성 인권 현주소가 백래시의 한가운데 있다는 걸 보여준다.

문제는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입장을 가진 일부 남성들의 의견이 여성과 남성 모두를 포함한 청년 전체의 의견인양 과대표되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이 그들에게 마이크를 쥐여 주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교육기관의 첫 번째 목적은 민주 시민 양성

다시 붉은 드레스의 날 캠페인으로 돌아가자면, 내가 교환학생으로 두 학기를 보냈던 캐나다 학교에서 캠페인을 진행한 것은 구성원들의 정치 성향이나 '페미니즘 지지' 여부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의 범죄 피해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것이 학교의 본분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여성혐오 범죄가 '한 개인이 운 나쁘게 겪은 일'이 아닌 사회적 약자의 혐오범죄 피해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내가 경험한 한국과 캐나다 대학의 결정적 차이였다.

참으로 씁쓸하다. 페미니즘(feminism)의 'F'자만 꺼내도 '과격한 사상, 이념을 주입하지 말라'며 반발하는 이들을 대학은 어떻게 민주 시민으로 양성할 것인지 궁금하다. 그런데도 윤석열 대통령은 "교육부의 첫 번째 의무는 산업 인재를 공급하는 것"이라니 앞으로의 대학 내 페미니즘 교육 향방이 어떠할지 여전히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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