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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연 대표
 백정연 대표
ⓒ 백정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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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눈으로 보는 데 어려움이 있는 시각장애인이 눈이 아닌 점자와 음성을 통해 정보를 아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말로 소통하기 어려운 청각장애인이 수어를 통해 정보를 아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요. 그렇다면 '이해의 어려움'이라는 장애 특성을 가진 발달장애인이 이해할 수 있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당연해져야 하는 거 아닐까요? 장애 특성에 맞는 정보 접근 지원을 받는 것은 그들의 권리예요. 발달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선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15년간 사회복지사로 일한 백정연은 2015년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 준비를 위한 복지부 파견 근무 중 다양한 해외사례를 접하며 '쉬운 정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2017년 발달장애인이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사업에 뛰어든 그는 현재 서울시 우수 사회적경제 기업 '소소한소통'의 대표다.

식당에서 메뉴를 선정하는 일부터 원하는 후보에 표를 던지는 일까지. 발달장애인이 어떤 영역에서도 차별 받지 않고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는 그를 지난 5월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쉬운 정보'를 만드는 과정은 전혀 '쉽지 않은' 것

- '소소한소통'은 어떤 기업인지, 대표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는지 간단히 설명해주세요.

"'소소한소통'은 발달장애인을 위해 '쉬운 정보'를 만드는 사회적 기업이에요. 설립 초기에는 모든 일을 거의 혼자 다 했지만, 지금은 많은 직원 분들과 함께 역할을 분담하고 있어요. 역할은 크게 기획과 디자인으로 나뉘는데, 저는 주로 기획 업무에 참여하고 있고 이외에도 직원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쉬운 정보'는 무엇이고 일반적인 정보와 어떻게 다른가요?

"'쉬운 정보'는 한자어, 외래어, 전문 용어를 최대한 쓰지 않은 쉽고 짧은 글에 보조적 이미지를 더한 것을 말해요. 한자어, 외래어, 전문 용어를 전부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지양하는 것이 목표예요. 외국에서는 'easy read' 혹은 'accessible information'이라고 불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읽기 쉬운 자료' 혹은 '쉬운 정보'라고 불려요. 사실 '읽기 쉬운 자료'가 더 직관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소소한소통'에서는 활자로 된 인쇄물이라는 형식에 국한되지 않고 눈으로 보는 모든 정보가 쉬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쉬운 정보'라고 지칭하고 있어요."

- 그렇다면 '소소한소통'은 활자 인쇄물이라는 형식을 넘어서서 어떤 '쉬운 정보'를 만들고 있나요?

"공간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사인물, 식당에서 메뉴 결정에 중요한 메뉴판, 그리고 영상으로 된 쉬운 정보까지 다양한 형식으로 만들어요. 또한, 어려운 정보를 이해하는 일은 발달장애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그들이 무언가를 볼 때 심리적 저항감이 생길 수 있어요. '소소한소통'에서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디자인적 요소들을 활용하곤 해요. 

예를 들면, 최근 중앙선관위와 제작한 지방선거 정보집에 '북이'와 '숭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데요. 선거는 자주 겪는 일상의 일이 아니라 어렵고 추상적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에 캐릭터를 통해 심리적 거리감을 줄이고 싶었어요. 콘텐츠를 완성한 후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읽어보고 체험하는 활동을 진행했는데 당사자 분들께서 캐릭터의 대사를 읽어보면서 즐거워 하고 공감하는 모습을 보며 뿌듯했습니다."
 
'정책선거를 부탁해' 자료집
 "정책선거를 부탁해" 자료집
ⓒ 소소한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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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운 정보'를 만들 때 가장 염두에 두는 점은 무엇인가요?

"'쉬운 정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참여예요. 모든 콘텐츠에서 필수적으로 거치는 과정은 '감수'로, 콘텐츠가 거의 완성된 시점에서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읽으면서 이해가 어렵진 않은지 의견을 수렴 받는 과정이에요. 간혹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초기 단계에서부터 의견을 구하기도 해요. 

또 '쉽다'의 기준이 상대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한 번 완성했다고 끝인 게 아니라 피드백을 받아서 계속해서 보완해가야 하는 '진행형' 정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어요. '쉬운 정보'지만 사실 그걸 만드는 과정은 전혀 쉽지 않습니다."

- 다양한 파트너들과 함께 '쉬운 정보'를 만들어오고 계십니다. 최근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을까요?

"제20대 대선 관련 프로젝트들이 아무래도 가장 기억에 남아요. 우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함께 정책선거에 대해 알려주는 <정책선거를 부탁해>를 제작했는데 선거의 본질적인 특성상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짧은 기간 내에 콘텐츠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왔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측의 큰 협조와 배려 덕분에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또한 자체 콘텐츠였던 <쉬운 10대 공약>의 경우 원 자료인 '10대 공약'이 함축적이고 선언적인 표현으로 작성돼 있기 때문에 생략된 행간의 의미를 찾아내는 노력이 중요했어요. 이를 위해 후보자의 토론회, 유세 영상, 기사, 세부 공약 등 다양한 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을 거쳤고 정보가 왜곡되는 걸 막고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동시 작업(둘 이상이 함께 작성하는 것)을 하기도 했어요.

국가적 프로젝트이다 보니 심리적 압박감도 물리적인 난관도 존재했지만, 발달장애인 유권자 분들이 선거 정보를 얻고 참정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어 뿌듯했습니다." 

'소소한소통'이 걸어온 '소소하지만 꾸준한' 길

- 올해 5주년을 맞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소하지만 꾸준히'라는 슬로건이 눈에 띄는데요. 대표님께서 포기하지 않고 '소소하지만 꾸준히' 걸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우선 외부적으로는 발달장애인 분들이 보내주시는 피드백이 큰 힘이 돼요. 사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에 자신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거든요. '우리의 '쉬운 정보'가 발달장애인이 주체적 삶을 사는 데 정말 긍정적 영향을 주었나?'라고 자문할 때 곁에서 '정말 도움이 되었다'고 말해주는 발달장애인 분들의 목소리는 우리가 계속해서 나아갈 이유가 되어줬던 것 같아요.

또 내부적으로는 직원들이 함께 일하면서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 나가는 과정을 지켜볼 때 힘을 얻곤 해요. 사실 직원들에게는 '소소한소통'에서의 과정이 그저 업무가 될 수도 있는 건데 스스로 동기부여를 받아 보람을 느끼며 일하는 모습을 보면 큰 힘이 됩니다."

- '쉬운 정보'라는 아이템을 발굴해 새로운 국내 시장을 형성하고 창업에까지 성공하셨습니다. 이를 가능케 만든 자신의 자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업을 시작할 때 생존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국내에 많은 출판사가 있는데 그들이 이 시장에 들어왔을 때 '소소한소통'만이 갖는 강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기억나는데, 걱정이 되면서도 자신이 있었어요. 

제 자신감의 원천은 바로 '네트워크'였어요. 진정으로 도움 되는 '쉬운 정보'를 만들기 위해선 단순히 콘텐츠를 만드는 능력 뿐만 아니라 발달장애인을 잘 알고 이를 콘텐츠에 녹여 내기 위한 다양한 사람들과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네트워킹을 통한 충분한 당사자성의 이해가 제 자산이었지 않나 싶어요. 또 저와 함께 일하는 유능한 직원들도 소중한 또 하나의 네트워크이고요.

물론 이것이 저만 가진 자산은 아니죠. 하지만 제 문제의식에 공감해서 다른 사람들도 이 시장에 들어온다면, 그래서 발달장애인들이 자신이 원하는 콘텐츠를 골라서 볼 수 있는 사회가 온다면 또 그것으로도 저의 가치를 실현하게 되는 것 아닐까요?"

- 사회적 기업은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가 맞물리는 지점입니다. 어떻게 보면 상충하는 두 가지 가치라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대표님께선 이 둘 사이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저도 사실 큰 고민이 있었어요. 그러나 5년간 '소소한소통'을 운영하며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는 절대 상충하지 않아요. 오히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습니다. 전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다 보면 경제적 가치가 뒤따라온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확신해요. 

실제 사례가 여러가지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를 말씀드리자면, 코로나 초기 대구의 모 기관에서 '방역 정보를 쉽게 알려주는 자료를 만들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저희는 코로나 상황이라는 위기 속에서 발달장애인을 위한 사회공헌 활동을 하고 싶었기에 '돈을 받지 않고 자료를 제작하겠다'고 답변했어요. 순전히 선의로 임한 프로젝트였고 뿌듯함도 많이 느꼈죠. 

제작된 자료가 배포된 이후, 놀랍게도 보건복지부와 대구광역시 시청 측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정부 차원에서 코로나 관련 정보를 알려주는 '쉬운 정보'를 함께 제작해보고 싶다'는 내용이었죠. 이처럼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되지만 제작하기 어려운 '쉬운 정보'가 있는 경우, 저희가 그냥 만들어요. 그런 마음가짐으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이후 매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단 사실을 경험적으로 깨닫게 됐기 때문이죠.

물론 창업 초기에는 경제적 가치가 곧 기업의 존폐와 직결되기에 이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후 비즈니스 모델이 어느 정도 탄탄해지고 사회적 가치를 좇다 보면 자연스레 경제적 가치와 맞물려서 성장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 기술 발전이 가속화됨에 따라 정보 사각지대는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소소한소통'은 어떤 발걸음을 계획하고 있나요?

"발달장애인은 일상 속의 다양한 활동들을 비장애인과 똑같이 경험하고 있어요. 똑같이 지하철을 타고, 카페를 가고, 쇼핑하고, 영화관에 가죠. 이런 일상 속에서 정보약자가 정보 사각지대를 겪지 않으려면 바로 기업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업이 자신의 잠재적 고객 중에 정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존재함을 인지하고, 비록 소수라고 할지라도 이들을 고려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현재 저희는 주된 파트너사인 복지기관이나 비영리기관 뿐만 아니라 영리 기업과의 파트너십을 적극적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최근엔 '배달의 민족'과 <쉬운 배달앱 사용법>을 제작했는데요. 작년에 어떤 주제의 '쉬운 정보'가 필요한지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 실무자에게 의견을 묻는 서베이 결과 '배달 어플리케이션 설명서가 필요하다'는 결과를 수렴해 제작한 게 계기가 되어 올해엔 정식으로 파트너십을 맺어 리뉴얼된 새로운 자료를 제작했습니다. 앞으로도 영리 기업과의 파트너십을 더 늘려가려고 시도중이에요."

- 지난해 인스타그램, 트위터, 유튜브 계정 개설 등 소통 창구를 더욱 활성화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도 그러한 발걸음의 일환일까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저희의 최종 고객은 발달장애인이지만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닿을 수 없기 때문에 중간 고객인 비영리/공공기관 및 영리 기업을 거쳐야 하고 따라서 저희를 알리는 게 중요하거든요. 물론 홍보 목적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코로나로 인해 오프라인으로 모여서 소통할 수 없게 되자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소소에게 물어봐'라는 라이브 방송을 매주 목요일마다 진행하고 있어요. 수다도 떨고, 공부하기도 하고, 새로 제작된 콘텐츠를 소개하기도 하는 등 발달장애인 분들과 더 연결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모두가 쉽게 정보를 이해할 수 있는 사회를 향해
 
소소한소통과 배달의 민족이 함께 제작한 쉬운 배달앱 사용법 책자
 소소한소통과 배달의 민족이 함께 제작한 쉬운 배달앱 사용법 책자
ⓒ 소소한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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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장애인이 발달장애인과 소통할 때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할까요?

"우선, 발달장애인과 대화할 때 너무 조심스러워 하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사실 우리는 발달장애인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를 만나도 처음은 언제나 조심스러운 법이잖아요? 그러니 '이 사람을 처음 만나서 그 사람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소통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모든 사람에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너무 어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또 발달장애인과 이야기할 때는 솔직하고 정확한 소통 방식이 필요해요. 우리는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불편할 때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걸 미덕으로 생각하곤 하잖아요. 에둘러 말하더라도 사회적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발달장애인의 경우 이 부분을 어렵게 느낄 수도 있거든요. 

실제로 저와 가까운 발달장애인 지인이 있는데 어느 날 제가 밥을 먹고 있을 때 전화가 왔어요. 전화를 받아서 "나 지금 밥 먹고 있는데…"라고 얘기했죠. 그랬더니 "저는 다 먹었어요~"라고 대답하곤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가는 거예요. 이럴 땐 "내가 밥 먹고 있어서 좀 이따 다시 전화할게"라고 확실하게 말하는 게 더 좋은 표현이었던 거죠. 

발달장애를 이해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이런 상황을 무척 당혹스러워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발달장애인들은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비장애인이 발달장애인과 대화할 때 친절하지만 아주 솔직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쉬운' 표현은 말 그대로 이해하기 쉬운 표현일 뿐이지 수준이 낮거나 미숙한 표현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면 좋을 것 같아요."

- 정보 소외 계층을 위해 우리가 일상 속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은 없을까요?

"박막례 할머니께서 햄버거 가게에서 키오스크를 사용해서 주문하다 '왜 안 되냐'며 화내시는 유튜브 영상을 본 적 있으신가요? 이처럼 현대 사회의 다양한 공간에서 발달장애인 뿐만 아니라 어르신, 어린이 등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이때 이들을 투명인간으로 취급하거나 짜증 섞인 눈빛으로 보지 않고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한자어의 조합이나 줄임말 사용을 지양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겠죠? 엘레베이터를 'E/V'로 줄여 쓴 표지나 지하철 역에 적힌 '화기엄금' 등의 문구는 사실 비장애인에게도 어렵거든요. 일상의 언어를 사용해서 표현하면 모두가 이해하기 편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희가 매달 어려운 말을 하나씩 골라 쉬운 대체어로 바꾸는 '어려운 말 캠페인'을 진행했었는데, 이를 정리해 웹사이트(sosoeasyword.com)에 기록했어요. 현재 100여 개의 단어가 등재돼 있는데, 주 단위로 업데이트할 예정이니 정보 약자를 위한 쉬운 사전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소소한소통' 직원들의 모습
 "소소한소통" 직원들의 모습
ⓒ 소소한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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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소소한소통, #쉬운정보, #백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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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 조현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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