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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관씨는 속초와 아야진 사이에 위치한 '청간'이라는 곳에서 부동산중개업을 하고 있다.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뒤에도 마을 이장을 10년 이상 할 만큼 마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며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나이에 납북된 어린 피해자 중 하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 시 필요한 등록금을 벌기 위해 배를 탔던 것이 결국 납북으로 이어져 고등학교 진학도 포기해야 했다.

김일관씨는 납북귀환 어부들 가운데 서울 미군정보부대에 다녀온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미군부대에 다녀오는 바람에 다른 선원들로부터 뭔가 특별한 혜택(?)이나 대우를 받은 것으로 오해받기도 했던 그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경찰이나 보안대와 같은 공안기관의 극심한 감시와 불규칙한 연행, 조사에 시달려야 했다.

납북귀환되어 전과자 신세로 다른 이들의 남다른 시선과 차별을 받는 처지는 변한 게 없지만, 고향 청간이라는 마을은 개발과 관광으로 무척이나 변해 있었다. 점차 변해가는 동해안을 바라보자니 변한 것 없는 자신의 처지가 문득문득 서글퍼진다고 했다.

인터뷰는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그 역시 다른 이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말끔한 정장에 후덕한 표정의 김일관씨는 인터뷰 내내 자신감 있는 말투와 호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딱 한 차례, 결혼 후 보안대에 연행되었다가 돌아온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자 그는 겨우겨우 견뎌왔던 설움의 감정을 드러냈다. 손수건으로 한동안 눈물을 닦아내던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양복 뒤에 숨겨진 고통의 기억은 지워낼 수 없는 현재형의 고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
 
강원지방경찰청에서 작성한 납북귀환 당시 승운호 등 선박의 장비에 대한 조사보고서. 이 보고서에 따르면 통신장비 등이 전무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강원지방경찰청에서 작성한 납북귀환 당시 승운호 등 선박의 장비에 대한 조사보고서. 이 보고서에 따르면 통신장비 등이 전무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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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고성이 고향인 김일관씨는 고등학교 등록금을 모으기 위해 승운호를 탔다고 한다. 일종의 아르바이트 목적으로 승운호를 탔기에 승운호 선원 중 아는 사람은 한 두 명이었다고 한다. 처음 먼 바다로 나가 오징어 조업을 했기 때문에 멀미도 심했지만 조금 지나 숙달되어 그마저도 참을 만했다고 한다.
 
"승운호 타기 전에는 연안에서 미역을 채취하는 작은 배를 타고는 했어요. 오징어잡이배를 타고 나간 것은 승운호가 처음이었어요. 밤에 작업하고 오전에 날이 훤해질 때 고성으로 돌아오다 납북이 되었어요. 뭐 승운호라고 전자장비라는 것이 있나요? 지금처럼 GPS가 있나, 레이더가 있나. 그냥 나침반 하나 가지고 방향을 아는 것이죠. 그러니 납북된 지점도 몰라요. 처음 북한 배가 나타날 때는 뭔 배가 온다고 해서 선원들이 신기해서 다 나와서 구경했을 정도로 순진했다니까요."

그렇게 두세 시간 정도 북한 배에 끌려갔고, 도착한 곳은 장전항이었다(그곳이 장전항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북한군인들이 알려줬다). 장전항에 도착해 식사가 나왔지만 도무지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곳에서 별일 없이 하루 이틀 보내고 나서 금강산으로 이동했다.

금강산에 도착해서는 신원조사를 했는데 선원들을 심하게 다루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곳에 있는 동안에는 주로 온천이나 관광을 시켜주었지만 선원들은 그런 것들을 즐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긴장과 스트레스로 인해 속병을 앓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김일관씨 역시 소화불량으로 침을 맞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13개월, 13개월 억류되었잖아요. 아, 정말 긴 시간이죠. 언제 나갈 수 있는지도 모르니 답답했죠. 더구나 우리 아버지가 예전에 치안대에 계셨거든요. 그래서 어린 마음에 북한 애들이 아버지의 치안대 경력을 알아챌까 봐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요. 그렇다고 어디 도망갈 데가 있나요? 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죠."

그런 두려움의 시간을 견디게 해 준 것은 선장 이진형씨를 비롯한 선원들의 격려였다. 특히 선장 이진형씨는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정말 좋은 분이었다고 한다.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선원을 북에서 데리고 나오려 애썼고, 선원들 모두 선장을 믿고 똘똘 뭉쳐 단합했다고 한다. 결국 승운호 선원들은 모두 남한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남한으로의 귀환은 예상보다 따뜻하지 않았다. 항구에서 내리자마자 선원들을 버스에 태워 속초 시청으로 데려갔고, 버스에 오르내릴 때는 누구와도 접촉할 수 없도록 경찰들이 통제하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 자기를 찾는 어머니 얼굴이 보였고, 반가움에 어머니를 향해 큰 소리로 '엄마! 나 여기 있어!'하고 불러봤지만 소용없었다.
 
"시청에 도착해서는 2층 회의실로 데려갔어요. 남한으로 내려올 때 우리 배 말고 다른 배들이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회의실 안에는 우리 같은 선원들이 엄청 많이 있었더라고요. 조사는 시청 근처 해동여인숙에서 했는데 조사받으러 들어가면 고문받는 소리로 시끄러웠어요. 다행스럽게도(?) 나에게는 위협을 주는 정도로 몽둥이를 휘둘렀는데 심하게 때리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일주일 조사를 받다가 물치 비행장으로 끌고 가더니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헬리콥터를 태워서 서울로 데려가더라고요(그때 승운호를 같이 탔던 김팔용씨도 함께 끌려갔다).

정확히 서울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 구속되어 있는 동안, 개인별로 유치하고, 유치장 안에 매트리스가 깔려 있고, 간수가 미군인 걸 보고 '여긴 미국식'이구나 생각했었어요. 조사받을 때는 작은 방으로 데려갔는데, 조사는 한국말을 잘하는 미군(백인)이 하더라고요. 그곳에 있는 동안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었고, 배가 아프다고 하니 암포젤엠이라는 약도 줬던 기억이 있어요."

입영 버스 타는 날, 태극기 들고 애국가 부른 어머니

어느 날 다른 건물에서 따로 조사를 해야겠다며 한국 사람들이 김일관씨를 데리러 왔다고 한다. '중앙정보부'에서 왔다는 그들은 미군에게 조사받을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김일관씨가 주눅 들어 말을 더듬자 '말을 왜 제대로 못 하냐'며 오금 사이에 각목을 끼우고 무릎을 꿇게 한 후 허벅지를 밟기 시작했다고 한다. 얼마나 아프던지 오줌을 지릴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고문하는 이유는 북한에서 간첩교육 받은 것에 대해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고통스러워 나중에는 없는 간첩행위도 지어내야 했다. 없는 말을 만들어 이야기하니 구타가 멈췄다. 그러다가 수사관들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다시 주먹질과 발길질이 쏟아졌고, 각목 구타가 이어졌다. 어린 나이이기도 했고, 고문이 무섭고 두려웠던 김일관씨는 시키는 대로 이야기를 갖다 붙이면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끝내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며칠간 중앙정보부 수사관에게 조사를 받았다.

얼마 후 김일관씨는 다시 헬기에 태워져 속초로 보내졌다. 속초경찰서 유치장은 한 방에 30~40명쯤 수감되어 밤에는 칼잠을 자야 할 정도로 비좁았다. 경찰서 유치장은 재판에서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나서야 나올 수 있었다.

막상 집에 돌아오니 고등학교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김일관씨는 일산에 있는 지인의 집으로 찾아가 버스 회사 정비소에서 정비 일을 배우면서 운전면허를 취득했다고 한다.

그렇게 일하던 어느 날 버스 기사 한 명이 다가오더니 '형사가 왜 따라다니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더니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있어도 그런 과거가 있으면 취직할 수 없다'면서 '기술이나 배우라'고 조언해 줬다. 어딜 가도 경찰의 감시가 있다는 것을 그때부터 알게 되었다고 한다.

군입대 영장이 나왔다. 과거 사건으로 인해 군대를 가고 싶어도 못 갈 줄 알았는데, 신검에서 갑종을 받고 현역을 가게 된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입영 버스를 타는 날, 너무 기쁜 나머지 어머니는 태극기를 들고나와 애국가를 부르셨다고 한다.
 
"33개월 군대 생활을 마치고 나니 '이제 나라에서 나를 인정해 줬다'고 생각을 했어요. 순진했던 거죠. 자신감을 갖고 떳떳하게 직장을 구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러나 정작 직장을 얻는 건 쉽지 않더라고요. 외국에 노동자를 파견하는 회사에 지원했지만 신원조회에서 떨어지고 절망하고 있을 때 친구의 도움으로 부산에 있는 신발공장에 들어갔어요. 하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경찰의 감시로 결국 그만두게 되었어요. 고향으로 돌아와 택시회사에 들어가 택시 운전을 했어요. 그때 아버지 친구(당시 속초문화원장)분이 설악산케이블카에 나를 추천했고, 그렇게 입사하여 21년간 케이블카 조종기사로 일하다가 총무계장으로 퇴사했어요."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동안, 형사들 역시 성실히 집 주위를 맴돌며 김씨를 쫓아다녔다고 한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김씨의 상황을 잘 알고도 채용해 준, 보안대 출신 사장 덕분에 다른 납북어부들에 비해 감시가 덜 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김씨도 더 성실하게 일하였다고 한다.

숨길 수 없는 현실
 
사진은 시민들이 감금되어 조사와 고문을 받았던 곳으로 알려진 한 보안부대의 지하실. 자료사진.
 사진은 시민들이 감금되어 조사와 고문을 받았던 곳으로 알려진 한 보안부대의 지하실. 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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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케이블카 회사에 취직해 이제 더 이상 불행이 없을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1980년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 때 그 일이 터지고 말았다.
 
"가족들(어머니, 아내, 큰딸)이 모두 잠자리에 든 새벽 시간이었어요. 군홧발 소리가 들리더니 '김일관, 옷 입어, 옷 입어'하는 소리가 들려요. 워커발로 방에 들이닥친 남자들이 내 손목에 바로 수갑을 채우더라고요. 어머니와 아내, 딸 모두 울고불고 난리가 났죠. 남자들에게 이끌려 마이크로버스에 타자, 눈을 가리고 손목에 수갑을 채우더니 한쪽 수갑은 버스 손잡이에 걸더라고요. 팔이 버스 손잡이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이삼십 분 달리더니 학예리에 있는 보안사에 도착했어요."

조사실에 들어가자 옆방에서 고문하는 소리와 함께 울고 발악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죄가 있어서 나를 이렇게 끌고 왔느냐'며 엉엉 울면서 빌었다고 한다. 수사관들은 야구방망이를 들고는 무조건 '불라'며 패기 시작했고, 도대체 뭘 불라는 것인지 몰랐던 김일관씨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고 했다.

옆방에서도 누군가 울고불고 죽는다고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수사관들은 그렇게 한참 동안 야구방망이로 때리더니 팬티만 남기고 옷을 다 벗겼고, 의자에 앉히고 손을 의자 뒤로 묶어 놓고는 '여기는 국회의원도 죽어서 나가는 곳'이라며 더 가혹하게 패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일관씨는 너무 억울했다.
 
"그렇게 며칠간 조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 회사에 나가지 않았어요. 그러자 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사장이 예전 보안부대 대장 출신이었거든요. 사장실에 들어가자 사장이 '김일관, 많이 맞았어?'라고 묻길래 '괜찮다'고 했더니 '좀 맞았겠지, 여기 누구도 그런 사실을 모르니 나만 믿고 계속 직장 다녀'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눈물이 펑펑 쏟아지더라고요. '저, 진짜 다녀도 됩니까?'하며 펑펑 울었고, 사장은 '괜찮아. 언젠가는 겪었어야 될 일이었을 거야'라며 위로해 줬어요. 너무 고마웠어요. 실제 그 일 이후로는 감시도 덜 했어요."

언젠가 한 번은 겪을 일이라는 말을 그는 잊지 못했다. 납북되었던 어부들은 모두 한번 겪어야 할 일(?)이 예정되어 있었고, 시기와 경중의 여부만이 다를 뿐 모두 국가의 감시와 연행, 조사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젊은 날, 취업 때문에 면사무소에 호적 등본을 떼면서 내가 받은 형벌과 '집행유예'에 대해 뒤늦게 알게 되었어요. 무엇보다 등본에 박혀 있는 '납북귀환자'라는 글자와 빨간 줄을 보고 '아!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똑똑해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겠구나'하는 좌절감과 충격이 컸죠. 그래서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로 가지 않고 고향에 남기로 했던 것이에요. 어딜 가도 똑같을 테니까요. 그러나 고향 생활도 녹록지 는 않았어요. 내 과거를 훤히 잘 아는 고향 사람들에게, 나는 '이북 갔다 온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으니까요. 숨길 수 없는 현실이었잖아요."

하루에도 수도 없는 사람들이 설악산을 찾고, 그 중 다수가 설악산케이블카를 이용해 설악산을 오르내린다. 웃고 행복한 그들 뒤에는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과거를 간직한 케이블카 운전수가 있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설악산케이블카를 탔지만, 정작 아무도 그 케이블카의 운전수 아픔을 알지 못한다.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김일관씨는 정작 행복했을까?

감추고 싶은 마음이 커 온 만큼, 진실을 밝혀 그 불명예의 딱지를 떼고 싶은 마음도 크다. 김일관씨는 무엇보다 큰 소망은 자신과 같은 피해자와 자식들이 또 다시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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