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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 ‘지하 고문실’ 악명을 떨치던 6별관 자리.
 중앙정보부 ‘지하 고문실’ 악명을 떨치던 6별관 자리.
ⓒ 최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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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시대의 부패상을 풍자하는 담시를 '북괴 주장에 동조'했다는, 위반혐의로 시인과 관계자들을 구속하고, 국회에서는 연일 정치공방이 벌어졌다. '오적'들과 여권 제도언론이 김지하와 신민당을 싸잡아 매도했다. 광인의 광시(狂詩)를 실었다는 것이다.

김지하는 광인이 아니고 오적시는 광시이기는 커녕 1970년대 초반 한국사회의 부패상을 절절히 풍자한 저항시다. 5.16쿠데타로 단절되었던, 전통적인 민중시ㆍ저항시의 당당한 복원이었다. <사상계>는 1970년 2월호에 동빙고동 일대 '도둑 마을'의 실태를 보도했다. 

이들 주택의 건축비는 최저 5천 내지 6천만 원에서 최고는 3억 원, 그런데 그곳 주인공들은 한 달에 몇 만원의 봉급밖에 받지 못하는 전ㆍ현직 각료나 대통령 비서실을 중심으로 한 고급 관료이다.…… 건축 자재는 외국 수입품이 사용되고, 사치품의 수입을 규제하는 법률은 마이동풍, 건물의 유지비만도 매월 10만 원은 들며, 승용차 두 대, 옥내 엘리베이터, 응접실의 열대어 등 사치스럽기 그지없다. 개중에는 매달 수백만 원의 경비를 지출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이들 주택이 계속 범죄 행위에 의해 유지된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주석 1)
1961년 8월 31일 서울 중앙정보부 남산청사를 방문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대화를 나누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오른쪽).
 1961년 8월 31일 서울 중앙정보부 남산청사를 방문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대화를 나누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오른쪽).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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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1961년 부정부패 척결을 내세우며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집권 9년 만에 '신악'이 '후악'을 뺨치는 부패사회가 되고, 이를 풍자한 사인과 보도기관을 '북괴 동조'라는 상투적인 수법으로 탄압했다. 김지하는 중앙정보부에 갇혀 혹독한 수사와 회유를 받았다. 이 역시 그들의 상투적인 수법이었다. 

그래. 어떤 정보부 과장은 술 한잔 걸치고 들어와 가라사대.
"김지하는 애국자야. 애국자! 김지하는 천재야, 천재!"

또 어떤 간부는 살며시 구석 자리로 데려다놓고 담뱃불을 붙여 주며,
"미스터 김! 정부쪽에서 일 안해 보겠어? 여러 사람이 말이 일치하는 건데 지금 정부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해. 어떤가?" 

또 어떤 실장은 호기 있게,
"김지하, 술 한 잔 마실까? 어이 여봐, 자네 요 앞에 가서 술하고 좋은 안주 좀 시켜와!" 

별의별 희한한 일이 다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러는 것이다. 
"아무래도 당신 나이에 쓸 수 있는 글로 안 보인다는 거야. 감식 전문가들 말이야. 너무 잘 썼고 한학이 대단하다는 거야. 기분나빠하지 말고, 지금 여기 이 종이 위에 악명 높은 남산에 들어와 있는 솔직한 심정을 시로 한번 써 봐, 어디! 제목은 '남산'이야!" (주석 2)

김지하는 결핵 증세가 악화되어 유진산 신민당주의 주선으로 서울대병원을 거쳐 100여 일 만에 석방되었다. 육신은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출옥한 그는 한때 지인ㆍ명사들의 과분한 접대를 받으며 지내다 지친 심신을 달래고자 제2의 고향인 원주로 갔다. 

그에게 원주행은 축복이었다. 동학과 통일운동, 민주화운동 그리고 생명사상가인 무위당 장일순의 큰 그늘이 있었고, 그를 통해 가톨릭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 해 부활절에는 원주 단구동 성당에서 이영섭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가톨릭에 입교하였다.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가톨릭과의 인연은 뒷날 장기간 옥고를 치룰 때 정의구현사제단으로부터 여러 가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무위당을 스승으로 모시고 '생명사상'을 싹트게 되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은 의기투합하여 가톨릭센터를 거점으로 두 사람이 평생 추구해온 교육운동과 협동조합운동, 민주화운동 등 사회개혁운동을 과감하게 펼쳐나가게 된다. 이때부터 원주 가톨릭센터는 독재정권의 탄압을 피해 원주로 피신해 오는 대학생과 민주인사들의 해방구이자 민주화운동의 거점 장소가 되었다. 여기에 김지하가 자리 잡으면서 원주는 '민주화의 성지'라고 불리며,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뜨겁고도 역사적인 도시로 떠올랐다.


주석
1> 하야시 다께히꼬, 최현 옮김, <남북한 현대사>, 229쪽, 삼민사, 1989.
2> <회고록(2)>, 167~16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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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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