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8년 식품회사 네슬레는 '네스카페'(Nescafe)라는 이름의 인스턴트커피를 시장에 내놓았다. ⓒ 네슬레
1938년 네스카페에 의해 촉발된 인스턴트커피 바람은 8년 후인 1946년 미국의 맥스웰하우스가 경쟁 제품을 출시하면서 커피 시장에서 일대 열풍으로 변하였다. 인스턴트커피는 무엇보다도 특별한 도구 없이 간편하게 마실 수 있다는 것, 로부스타종 커피 원두를 사용하여 생산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는 것이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더 이상 좋은 원두를 사용할 필요도, 또 복잡한 도구나 기계를 이용하여 만들 필요도 없이 뜨거운 물만 있으면 어디서나 쉽게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1953년에 미국 커피 시장에서 맥스웰하우스 인스턴트커피는 네스카페를 앞지르기 시작하였다. 미국인들의 애국심이 가져온 변화였다. 인스턴트커피 소비를 더욱 촉진시킨 것은 1947년에 등장하여 1950년대에 유행을 시작한 자동판매기 커피였다.
자동판매기(Vending machine)라는 기계는 놀랍게도 2000년의 역사를 지녔다. 1세기경(기원전이라는 설도 있음)에 헤로 알렉산드리아(Hero Alexandria)라는 그리스의 수학자 겸 엔지니어가 신에게 바치는 성수(holy water)를 공평하게 나누어 주기 위해 동전을 넣으면 그 무게만큼 자동으로 물이 나오는 기계를 발명하였다고 한다.
동전을 기계에 넣으면 동전이 레버와 연결된 팬 위에 놓이고, 그 무게에 의해 레버가 당겨져서 열린 밸브 사이로 일정한 양의 성수가 흐르는 방식이었다. 경사를 따라 동전이 내려가는 동안만 물이 나왔고, 이를 이용해 성수는 공평하게 나누어지는 방식이었다.
헤로 알렉산드리아의 자동판매기 원리가 상품 판매에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800년대였다. 1822년 영국의 서적상 리차드 카릴리가 자동 신문판매기를 발명하였다. 1867년에는 시메온 덴햄이 최초로 완전 자동판매기를 개발해 우표를 판매하였고, 이 기계의 특허를 취득하였다.
1883년에는 퍼시벌 에버리트가 보다 현대화된 우편엽서 자동판매기를 개발하여 자동판매기의 대중화를 가져왔다. 기차역과 우체국 등에 설치되었다. 1888년에는 토마스 아담스가 풍선껌을 판매하는 자동판매기를 개발하여 뉴욕의 지하철역에 설치하였고, 1893년에는 독일의 초콜릿 제조업자 스톨버르크가 무려 1만 5000대의 초콜릿 자동판매기를 독일 전역에 설치하였다.
최초의 커피 자동판매기 '퀵 카페'
▲ 1947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루드-멜리키안이라는 회사에서 최초의 커피 자동판매기 '퀵 카페'(Kwik Kafe)를 발명했다. ⓒ 유튜브 갈무리
음료를 자동판매기에서 판매하기 시작한 것은 코카콜라였다. 처음에는 컵에 부어주는 방식이었고, 이어서 병에 담긴 콜라를 자동판매기가 제공하였다. 얼음을 이용해 차가운 콜라를 제공하는 자동판매기가 설치된 것은 1937년 경이었다. 경쟁 기업인 펩시콜라도 자동판매기를 이용한 사업에 뛰어들었다.
커피를 자동판매기에서 판매하는 기계가 처음 발명된 것은 이보다 조금 늦은 1947년이었다. 물에 녹는 인스턴트커피의 대중화에 따른 발명이었다. 미국의 필라델피아에 있던 루드-멜리키안(Rudd-Melikian)이라는 회사에 의해서였다. 미국인들이 커피 자동판매기 발명을 환호한 것은 시간 때문이었다. 불과 몇 초라는 빠른 시간에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신속함이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최초의 커피 자동판매기 이름이 퀵 카페(Kwik Kafe)였다.
지금 사용되는 방식과 같은 원리였다. 종이컵을 작은 선반 위에 떨어뜨린 후 커피와 뜨거운 물이 내려오는 방식이었다. 단 5초 만에 커피 한잔이 만들어졌다. 1948년 한 해에 미국 전역에서 25만 컵의 커피가 자동판매기를 통해 판매되었다. 1955년에는 여러 기업에 의해 미국 전역에 6만 개 이상의 커피 자동판매기가 설치되었다. 인스턴트커피의 천국 영국에도 같은 해에 3만 5000개 이상의 커피 자동판매기가 설치되었고 이 숫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1952년에 라틴아메리카 기반의 커피 소비 촉진 기구인 범아메리카커피사무국(PACB)이 광고를 통해 '커피 브레이크'(coffee break) 개념을 확산시킴으로써 자판기 커피의 유행을 가속화시켰다.
커피 작가 마크 펜더그라스트에 의하면 PACB는 연 광고비 200만 달러를 투자하여 "당신 자신에게 커피 브레이크를 주세요, 그리고 커피가 당신에게 주는 혜택을 누리세요"라는 캠페인을 벌였고, 이 캠페인 이후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조사 대상 사업장 80퍼센트가 커피 브레이크를 도입하였다. 커피 브레이크에 가장 유용하고 인기 있는 것이 커피 자동판매기였다.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복도마다 자판기가 놓였다.
냉동건조법의 발명
▲ 1964년 제너럴푸드의 맥스웰하우스에서 최초의 냉동건조 커피 '맥심'(Maxim)을 출시했다. ⓒ 맥스웰하우스
인스턴트커피의 유행, 자동판매기의 보급과 반비례하는 것은 커피의 질이었다. 네슬레의 네스카페가 주도하던 기존의 인스턴트커피는 가열농축방법을 이용한 분무건조 커피였다. 진공상태에서 200도 가까이 가열하므로 열에 의한 향미의 손실이 발생하는 단점이 있었다. 물에 완벽하게 녹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그런데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1950년대의 TV 보급 확대에 맞추어 커피 광고가 홍수를 이루었던 것도 인스턴트커피의 유행을 지속시킨 배경이었다. 미국에서 이를 주도한 것은 제너럴푸드에 흡수된 맥스웰하우스였다. 코카콜라와 함께 TV 광고의 양대 주인공이었다. 미국에서 거래가 금지되었던 로부스타종 커피의 거래가 허용된 것도 이즈음인 1960년이었고, 자동판매기가 지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도 1960년이었다.
이처럼 커피 자동판매기 성능, 인스턴트커피 제조법, 그리고 커피 광고의 수준은 갈수록 높아졌고, 이에 비례하여 커피의 맛은 점점 더 떨어지는 역설의 현장이 미국의 1950~1970년대 커피 소비시장이었다. 전문가들이 커피 제1의 물결이라고 이름 붙인 바로 그 시기였다.
게다가 커피보다 더 편리하게 마실 수 있는 기호 음료인 콜라가 청소년들의 입맛과 취향을 사로잡기 시작함으로써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커피는 미국의 음료 시장에서 위기를 맞게 된다. 커피의 질이 낮아지는 것과 함께 1인당 소비량도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미국인 하루 커피 소비량은 1962년에 3.12잔에서 1967년에는 2.86잔으로 하락하였다.
인스턴트커피의 맛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냉동건조법의 발명이었다. 미국 인스턴트커피 시장에서 50퍼센트를 상회하는 점유율을 유지하던 제너럴푸드의 맥스웰하우스에서 최초의 냉동건조 커피 맥심(Maxim)을 출시한 것은 1964년이었다.
찬 온도에서 물을 얼려 수분을 제거하는 것이 기본 공정이었다. 수분을 제거하고 남은 커피를 농축한 후 작은 입자로 분쇄하기 때문에 커피 고유의 향미를 꽤 유지할 수 있었고, 물에도 잘 녹는 장점이 있었다. 설비 비용이 비싸다는 문제가 있지만 대량 생산의 경우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미국의 인스턴트커피나 자판기 커피 문화가 이탈리아식의 에스프레소 문화나 유럽식 카페 문화의 진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식 에스프레소를 제공하는 커피하우스들이 뉴욕, 샌프란시스코 등에서 문을 열어 유럽의 향수를 그리워하거나 궁금해하는 문화예술인, 보헤미안, 히피들의 감성을 자극하였다.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을 파는 시장도 형성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무엇도 미국에서 인스턴트커피와 자판기 커피가 주는 편리함과 신속함의 벽을 쉽게 넘지는 못하였다.